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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회장님의 정체

  • 점심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박미주는 집에 도착했다.
  • “미주 왔구나. 그래 내가 말한 그 파일들은 제대로 챙겨왔어?”
  • 박기환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얼른 끄며 물었다.
  • “아니요. 아빠가 말한 파일들을 박형욱이 문서세단기에 넣어 다 파쇄해버렸어요.”
  • 박미주가 품에 안은 종이박스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면서 분개한 목소리로 말했다.
  • “뭐라고? 박형욱 그 새끼가 감히…”
  • 책상을 탁하고 내리친 박기환이 분노에 찬 음성으로 이를 갈았다. 그의 반평생 심혈이 들어간 파일이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져버리다니. 박기환은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괜히 고상한 척 사위의 효도를 사양하는 게 아니었다며 후회했다.
  • 앞치마를 두른 주영란이 주방에서 푹 곤 닭백숙을 식탁 위로 날랐다.
  • “그냥 보통 파일 아니에요? 뭘 화를 그렇게 크게 내고 그래요.”
  • 박기환에게 한소리를 한 주영란이 다시 현관 쪽으로 시선을 돌려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 “미주야, 왜 너 혼자 왔어? 우리 착한 사위는 어디 갔는데? 나 너희들을 위해 특별히 닭백숙도 준비했는데.”
  • 박미주는 귀신이라도 본 듯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설마 엄마도 아빠처럼 진천하가 그 천하 군신이라고 믿는 거 아니겠지? 박미주는 그 이유를 제외하고는 주영란의 태도가 이토록 빠르게 변하게 된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 “지금 자전거 타고 오고 있을 거예요.”
  • 박미주는 주영란을 흘겨본 뒤 방으로 들어갔다.
  • 진천하는 점심시간이 다 돼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같이 식사를 하려고 다들 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며 진천하는 집의 따뜻함을 다시 한번 느꼈다.
  • “천하야, 여기 국물 한 번 마셔봐. 엄마가 오전 내내 끓인 건데, 맛이 어때?”
  • 주영란은 식사를 하는 내내 진천하에게 국물을 떠주랴, 살코기를 발라주랴 하며 바삐 움직였다. 그녀는 보면 볼수록 진천하가 마음에 쏙 들었다. 지난밤 박기환에게서 사위의 정체를 이미 전해 들은 주영란이었다.
  • 박미주는 제가 친 딸인지, 진천하가 친 아들인지 모르겠다며 속으로 한탄했다. 박기환과 주영란은 어느새 그녀를 까맣게 잊은 듯 진천하에게만 열성적으로 말을 걸고 있었다. 박미주는 질투가 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 그렇게 주말이 흘러갔다.
  •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난 진천하는 회사 과장한테 메시지를 보내 휴가를 신청했다. 허락이 떨어지건 말건 그는 박헌 그룹의 매매계약서를 챙긴 뒤 침대맡에 앉아 박미주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박미주는 어렴풋이 누군가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두 눈을 번쩍 뜬 박미주는 제 시선을 완전히 가로막은 커다란 얼굴과 마주 보게 되었다.
  • “꺄악… 진천하, 너 죽을래!”
  • 비명을 지르자마자 박미주는 어제 아침에 들었던 주영란의 말이 떠올랐다. 이번에도 주영란에게 오해 아닌 오해를 안겨줄 것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 연속 이틀 아침을 비명을 질러댔으니 박미주는 부모님이 자신을 욕구불만으로 보면 어쩌나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으로 머리채를 잡아뜯으며 발광하듯 진천하를 쳐다봤다.
  • “너… 대체 뭐 하자는 거야?”
  • 박미주가 이를 갈며 물었다.
  • 작게 웃어 보인 진천하는 등 뒤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 “생일 축하해!”
  • 진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움의 끝을 달렸다.
  • 생일 축하라는 단어를 듣고 박미주는 흠칫했다. 그녀는 오늘이 제 생일이라는 걸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진천하가 꺼내든 서류를 멍하니 건네받으며 박미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 “이게 뭔데?”
  • “직접 보면 되잖아.”
  • 진천하는 신비로운 표정을 지으며 서류를 열어보라고 시켰다.
  • “박헌 그룹 매매계약서?”
  • 서류 안에 든 내용을 본 박미주는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그녀는 얼른 계약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보았다.
  • “너… 너 고작 10억으로 박헌 그룹을 매수한 거야? 아냐, 그럴 리가 없어!”
  • 박미주는 아직도 제 손에 들린 계약서가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 “안 될 게 뭐 있어. 이 씨 가문에서 손을 써둔 탓에 최오를 포함한 모든 협력업체에서 계약 파기를 요구해왔었거든.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은행에서도 대출 상환을 빨리하라고 재촉해오지. 회사를 팔지 않으면 강제 파산으로 경매에 넘어가기 직전 상황이었어.”
  • 진천하는 10억에 매수할 수 있었던 증거를 요목조목 대가며 설명했다.
  • “그… 그럼 지금 회사를 매수하면 은행 대출도 우리가 갚아야 되는 거 아냐? 우리한테 그렇게 많은 돈이 어디 있다고.”
  • 진천하의 설명은 반박할 여지없이 완벽했지만 박미주는 대출 문제가 심히 걱정되었다.
  • 박헌 그룹이 은행에서 돈을 얼마 대출했는지 그녀는 아주 잘 알았다. 박기환이 진천하에게 준 돈으로 박헌 그룹을 매수할 수 있었던 건 이미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박미주는 아빠가 그렇게 많은 비상금 숨겨뒀으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다.
  • “걱정 마. 나 천하 군신인 거 잊은 건 아니지? 대출 같은 자질구레한 문제는 그냥 나한테 맡겨.”
  • 진천하는 오늘 날씨를 얘기하듯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 “적당히 해. 박헌 그룹을 매수한 돈도 우리 아빠가 준 돈으로 그런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뻔뻔해도 정도가 있지. 난 그래도 네가 성실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다 착한 척 연기한 거였다니.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버려!”
  • 박미주는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나는지 아예 발로 진천하를 침대 밑으로 밀어낸 뒤 그를 방문 밖으로 쫓아냈다.
  • 진천하는 박미주가 한 말이 이해되지 않아 어리둥절해졌다. 제가 언제 장인어른의 돈을 받았다고 저렇게 화를 내는지 그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 아침 식사 자리에서 주영란은 다시 한번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진천하와 박미주를 쳐다봤다.
  • “어제 내가 했던 말 벌써 까먹었지 너희들. 특히 미주 너, 여자면 여자답게 조신해야지. 아침마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어쩌자는 거야. 하도 천하가 타고나기를 힘이 세고 건강하게 태어나 다행이지, 네 일방적인 요구를 다 맞춰줄 수 있는 남자가 이 세상에 그리 많지 않아.”
  • 주영란은 살짝 화가 났는지 박미주의 체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적나라하게 꼬집어 말했다.
  • “엄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저… 이만 나가볼게요.”
  • 눈을 새빨갛게 붉힌 박미주는 여기서 더 뭐라고 해명해야 될지 몰라 도피를 선택했다. 수저를 내려놓은 그녀는 진천하가 꺼내들었던 계약서를 손에 든 채 도망치듯 집을 나섰다.
  • “어머님, 아버님. 배부르게 잘 먹었습니다.”
  • 어제와 똑같이 진천하도 얼른 수저를 놓은 뒤 박미주 뒤를 쫓아 나갔다.
  • 이번에 박미주는 자전거를 타는 대신 택시를 잡아탔다. 진천하가 계단을 내려왔을 때 박미주는 이미 택시에 올라탄 뒤였다. 그는 할 수없이 다른 택시를 잡아탔다.
  • 박헌 그룹의 건물까지 와서야 진천하는 박미주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 “미주야. 내 얘기 좀 들어봐.”
  • 진천하는 박미주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 “회사 일을 다 처리하고 난 뒤에 얘기하는 걸로 해.”
  • 박미주는 진천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회사 건물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 진천하는 그녀의 말대로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고 일단은 박미주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녀의 보디가드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다.
  • 박헌 그룹의 회의실에는 박 씨 가문의 모든 주요인물들이 다 모여있었다. 박인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제 모든 업체와의 계약이 깨지고 은행 대출 상환 날짜도 앞당겨졌다는 소식을 들은 박인수는 또다시 정신을 잃고 쓰러졌었다. 오늘 아침에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는 큰아들이 보낸 사람들에 의해 지금 이곳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박인수의 코에는 산소호흡기가 아직까지도 달려있었다.
  • 박 씨 가문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시가총액이 2000억에 달했던 회사를 10억이라는 헐값에 팔아버렸으니, 떵떵거리며 살던 박 씨 가문의 좋은 날도 이젠 오늘로써 끝을 맞이할 터였다.
  • 그때 갑자기 회의실 문이 밖에 있던 누군가에 의해 힘껏 열렸다. 박 씨 가문의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 문가를 쳐다봤다. 그들은 박헌 그룹이 위기에 처해진 틈을 타 배춧값으로 회사를 매수한 회장이란 사람이 누구인지 너무도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