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란의 부름 소리에 박미주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이미 식사 준비까지 다 마친 그녀였으니 아까 제가 지른 비명소리를 듣고 주영란이 이상한 오해를 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박미주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십여 분 뒤, 네 가족이 모인 아침식사 자리에서 주영란은 때때로 고개를 들어 올리며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눈치를 보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에 박미주는 어쩐지 속이 뜨끔해지는 기분이었다.
“엄마가 잔소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비록 너희 둘, 혈기왕성한 젊은 남녀라지만 그래도 절제할 땐 절제해야지. 주위 시선도 의식하란 말이야. 이웃들이 들었으면 뭐라고 하겠어!”
주영란은 끝내 참지 못하고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사실과는 전혀 다른 오해에 박미주는 얼굴부터 목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진천하는 짐짓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몰래 웃기 바빴다.
박미주는 발을 들어 테이블 밑에서 힘껏 진천하의 발을 밟아버렸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진천하는 입이 벌어지며 아픔을 호소했다.
“엄마, 그게 아니고…”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기환이 중간에 끼어들며 말했다.
“네 엄마 말이 맞아. 젊었을 때 주의하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후회할 일만 생겨. 참, 마침 오늘 주말이니까, 미주 너 천하랑 같이 회사에 가서 짐을 좀 챙겨오거라. 네 할아버지 재산은 나도 이제 싫어졌으니까 알아서 하라고들 하지. 꼭 챙겨야 되는 중요한 물건은 나중에 네 휴대폰에 메시지로 보낼 테니까 가져오는 거 잊지 말고.”
자신의 사위가 천하 군신임을 알게 된 박기환은 이제 말투에서마저 의욕이 가득 넘쳐 보였다.
“알겠어요. 그럼 지금 다녀올게요.”
해명할수록 어쩐지 오해가 더 커질 것 같아 박미주는 더 이상 해명을 포기한 채 수저를 내려놓더니 가방을 챙겨 문을 나섰다.
“잘 먹었습니다.”
진천하는 얼른 박미주 뒤를 따라나섰다. 그녀가 타던 차는 이미 본가에서 거둬간 뒤라 박미주는 예전에 잠깐 탔었던 산악자전거를 다시 꺼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태워줄게!”
진천하가 기사를 자처하고 나섰다. 산악자전거 특성상 뒷좌석이 없었기에 박미주는 그의 어깨를 짚고 뒷바퀴 프레임을 밟고 서서 갔다.
가을로 들어서면서 낮과 밤의 기온차가 꽤나 크게 났다. 약 10분 정도 흐르자 뒤에 있던 박미주는 추워서 몸이 벌벌 떨려왔다. 그 모습을 본 진천하는 망설임 없이 자전거를 멈춰세웠다.
“뭐해?”
박미주가 의혹 섞인 표정으로 물어봤다. 그녀의 물음이 끝나기 무섭게 진천하는 제 셔츠를 벗어 박미주의 몸에 둘러주었다. 그리고 저는 안쪽에 받쳐 입는 러닝 하나만 입고 있었다.
“너…”
“그래도 추우면 내 등에 붙어.”
말을 마친 진천하는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 페달을 힘차게 돌렸다. 박미주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과 마음이 많이 따뜻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박헌 그룹에 도착했다.
“넌 밖에서 기다려. 나 짐만 잠깐 챙기고 바로 내려올게.”
박미주는 진천하에게 건물 아래에서 기다리라고 한 뒤 로비로 걸음을 옮겼다. 대표 사무실을 지나던 그녀는 사무실 안쪽에서 들려오던 박기태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뭐라고? 또 다른 업체에서 협력을 중지하겠다고 연락해왔다고? 대체 그 이유가 뭔지 오늘 안으로 당장 알아봐.”
박미주는 주말에도 박기태가 나와서 출근할 줄 생각도 못 했다. 그러다가 곧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빠른 걸음으로 대표 사무실을 지나쳤다. 어차피 자신은 가문에서 쫓겨난 처지였기 때문에 회사일에 관심을 꺼버렸다.
그녀는 먼저 제가 쓰던 사무실로 들어가 간단히 짐을 챙겼다. 그리고 곧바로 박기환이 쓰던 사무실로 향했다. 아까 집을 나서기 전 박기환은 사무실에 중요한 개인 물건이 있으니 반드시 가져오라고 그녀에게 신신당부한 참이었다.
박기환이 사용하던 사무실에 들어선 박미주는 사무실 한가운데 자리한 박형욱을 발견했다. 박기환이 테이블에 있다고 했던 자료들은 이미 어디에 치워두었는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박미주 너, 무슨 낯짝으로 다시 회사에 기어 나와!”
박미주의 등장에 박형욱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녀는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듯 사무실 책상으로 직진하며 박기환이 갖고 오라던 자료들을 찾기 시작했다.
“너 이거 찾아?”
박형욱이 서랍에서 어떤 파일을 한가득 꺼내들고는 웃으며 박미주를 향해 물었다.
“이리 줘!”
박미주는 손을 뻗어 뺏어오려고 했으나 박형욱이 몸을 돌리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네 아빠가 주식에 손을 대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비상금을 꽤 많이 감춰놨더라고. 그런데 이 파일들이 없으면 네 아빠가 몇십 년을 힘들게 모아온 돈도 다 물거품이 되는 거 알지?”
말을 마친 박형욱은 손에 든 자료를 그대로 문서세단기에 집어넣었다. 종이가 절단되는 소리와 함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온전했던 파일들이 갈가리 찢어진 종이 쪼가리로 변신했다.
“박형욱, 너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박형욱의 행동은 박미주를 완전히 꼭지 돌게 만들었다.
은행 카드가 동결된 탓에 박미주네 가족은 박기환이 숨겨놓은 비상금으로 당분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방금 그녀 가족의 자금줄이 되어줄 파일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박형욱은 박미주 일가를 막다른 골목까지 몰아넣었다.
“왜, 문제 될 거 있어? 이 사무실에 있는 종이는 모두 회사 거야. 내가 우리 회사 물건을 버리겠다는데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너 이렇게 마음대로 사무실에 들이닥치는 거 위법행위야 알아? 경비원, 여기 내 사무실에 뛰쳐들어온 여자 지금 당장 끌어내!”
박형욱이 경비실에 전화를 걸었다.
“박형욱, 너 딱 기다려. 내가 언젠가 너 나한테 제발 살려달라고 싹싹 빌게 만들 테니까.”
경비원은 박미주를 건물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간 뒤 그녀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당신…”
박미주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손가락으로 경비원을 가리키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예전에 회사를 다니면서 박미주는 아랫사람들한테 그래도 꽤나 잘해주었다고 자부했었다. 그러나 배은망덕한 그들은 옛정을 하나도 봐주는 법 없이 그녀를 철저히 외면하는 길을 택했다.
“미주야, 괜찮아?”
박미주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떨어트린 채 바닥에 넘어지자 진천하는 당장이라도 경비원의 손을 잘라낼 기세로 두 눈을 차갑게 빛냈다.
“왜, 그렇게 째려보다 한 대 때리겠어? 까불지 마. 그러다 큰 코 다친다?”
전자 곤봉을 손에 든 경비원이 한껏 으스대는 표정으로 진천하를 향해 비아냥댔다.
“진천하, 너 전에 나랑 폭력 쓰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진천하의 눈빛이 달라진 걸 눈치챈 박미주가 얼른 그를 막아 나섰다. 지금도 이미 제 가족의 처지가 충분히 처참해진 터라 그녀는 박기태 가족에게 더 이상 다른 약점을 잡히기 싫었다.
“알겠어. 건드리지 않을게.”
진천하는 잠시 성질을 참아냈다.
“자전거에 짐을 싣는 건 무리니까 잠깐만 기다려봐. 내가 차를 불러올게.”
박미주를 부축하고 일어선 진천하는 택시를 부른 뒤 박미주를 혼자 먼저 보냈다. 그녀를 태운 택시가 멀어지자 진천하의 눈 속에 다시 차가운 빛줄기가 번뜩이기 시작했다.
“박미주, 나 내가 직접 때리지는 않겠다고 약속했지, 다른 사람이 손쓰는 건 막겠다는 얘기 안 했다.”
진천하는 박미주의 자전거를 타고 자리를 떠났다. 그가 모습을 감추자마자 서류 가방을 든 청룡이 박헌 그룹의 대표 사무실에 나타났다.
“누구시죠? 여긴 어쩐 일로 오셨는지?”
박헌 그룹과 협력 관계를 이어오던 업체들이 연달아 협력 중지 통보를 해오자 박기태는 할 수없이 주말에도 나와서 업무를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은 연이은 나쁜 소식으로 인해 수심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쳐들어온 청룡을 발견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저희 회장님께서 20억으로 박헌 그룹 매수를 원하십니다. 여기 회사 매매계약서를 가져왔으니 사인하시죠.”
청룡이 명령조로 박기태에게 말했다.
“뭐라고요? 저희 회사는 예상 시가총액이 2000억을 넘는 유니콘 회사입니다. 그런데 뭐라고요? 20억? 차라리 그냥 뺏어가지 그래요? 그쪽 회장님이 얼마를 불러도 전 회사를 팔 생각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