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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차라리 그냥 뺏어가지 그래요?

  • “미주야, 아침 먹게 일어나.”
  • 주영란의 부름 소리에 박미주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이미 식사 준비까지 다 마친 그녀였으니 아까 제가 지른 비명소리를 듣고 주영란이 이상한 오해를 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박미주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 십여 분 뒤, 네 가족이 모인 아침식사 자리에서 주영란은 때때로 고개를 들어 올리며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눈치를 보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에 박미주는 어쩐지 속이 뜨끔해지는 기분이었다.
  • “엄마가 잔소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비록 너희 둘, 혈기왕성한 젊은 남녀라지만 그래도 절제할 땐 절제해야지. 주위 시선도 의식하란 말이야. 이웃들이 들었으면 뭐라고 하겠어!”
  • 주영란은 끝내 참지 못하고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 사실과는 전혀 다른 오해에 박미주는 얼굴부터 목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진천하는 짐짓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몰래 웃기 바빴다.
  • 박미주는 발을 들어 테이블 밑에서 힘껏 진천하의 발을 밟아버렸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진천하는 입이 벌어지며 아픔을 호소했다.
  • “엄마, 그게 아니고…”
  •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기환이 중간에 끼어들며 말했다.
  • “네 엄마 말이 맞아. 젊었을 때 주의하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후회할 일만 생겨. 참, 마침 오늘 주말이니까, 미주 너 천하랑 같이 회사에 가서 짐을 좀 챙겨오거라. 네 할아버지 재산은 나도 이제 싫어졌으니까 알아서 하라고들 하지. 꼭 챙겨야 되는 중요한 물건은 나중에 네 휴대폰에 메시지로 보낼 테니까 가져오는 거 잊지 말고.”
  • 자신의 사위가 천하 군신임을 알게 된 박기환은 이제 말투에서마저 의욕이 가득 넘쳐 보였다.
  • “알겠어요. 그럼 지금 다녀올게요.”
  • 해명할수록 어쩐지 오해가 더 커질 것 같아 박미주는 더 이상 해명을 포기한 채 수저를 내려놓더니 가방을 챙겨 문을 나섰다.
  • “잘 먹었습니다.”
  • 진천하는 얼른 박미주 뒤를 따라나섰다. 그녀가 타던 차는 이미 본가에서 거둬간 뒤라 박미주는 예전에 잠깐 탔었던 산악자전거를 다시 꺼낼 수밖에 없었다.
  • “내가 태워줄게!”
  • 진천하가 기사를 자처하고 나섰다. 산악자전거 특성상 뒷좌석이 없었기에 박미주는 그의 어깨를 짚고 뒷바퀴 프레임을 밟고 서서 갔다.
  • 가을로 들어서면서 낮과 밤의 기온차가 꽤나 크게 났다. 약 10분 정도 흐르자 뒤에 있던 박미주는 추워서 몸이 벌벌 떨려왔다. 그 모습을 본 진천하는 망설임 없이 자전거를 멈춰세웠다.
  • “뭐해?”
  • 박미주가 의혹 섞인 표정으로 물어봤다. 그녀의 물음이 끝나기 무섭게 진천하는 제 셔츠를 벗어 박미주의 몸에 둘러주었다. 그리고 저는 안쪽에 받쳐 입는 러닝 하나만 입고 있었다.
  • “너…”
  • “그래도 추우면 내 등에 붙어.”
  • 말을 마친 진천하는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 페달을 힘차게 돌렸다. 박미주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과 마음이 많이 따뜻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박헌 그룹에 도착했다.
  • “넌 밖에서 기다려. 나 짐만 잠깐 챙기고 바로 내려올게.”
  • 박미주는 진천하에게 건물 아래에서 기다리라고 한 뒤 로비로 걸음을 옮겼다. 대표 사무실을 지나던 그녀는 사무실 안쪽에서 들려오던 박기태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 “뭐라고? 또 다른 업체에서 협력을 중지하겠다고 연락해왔다고? 대체 그 이유가 뭔지 오늘 안으로 당장 알아봐.”
  • 박미주는 주말에도 박기태가 나와서 출근할 줄 생각도 못 했다. 그러다가 곧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빠른 걸음으로 대표 사무실을 지나쳤다. 어차피 자신은 가문에서 쫓겨난 처지였기 때문에 회사일에 관심을 꺼버렸다.
  • 그녀는 먼저 제가 쓰던 사무실로 들어가 간단히 짐을 챙겼다. 그리고 곧바로 박기환이 쓰던 사무실로 향했다. 아까 집을 나서기 전 박기환은 사무실에 중요한 개인 물건이 있으니 반드시 가져오라고 그녀에게 신신당부한 참이었다.
  • 박기환이 사용하던 사무실에 들어선 박미주는 사무실 한가운데 자리한 박형욱을 발견했다. 박기환이 테이블에 있다고 했던 자료들은 이미 어디에 치워두었는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 “박미주 너, 무슨 낯짝으로 다시 회사에 기어 나와!”
  • 박미주의 등장에 박형욱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녀는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듯 사무실 책상으로 직진하며 박기환이 갖고 오라던 자료들을 찾기 시작했다.
  • “너 이거 찾아?”
  • 박형욱이 서랍에서 어떤 파일을 한가득 꺼내들고는 웃으며 박미주를 향해 물었다.
  • “이리 줘!”
  • 박미주는 손을 뻗어 뺏어오려고 했으나 박형욱이 몸을 돌리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 “네 아빠가 주식에 손을 대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비상금을 꽤 많이 감춰놨더라고. 그런데 이 파일들이 없으면 네 아빠가 몇십 년을 힘들게 모아온 돈도 다 물거품이 되는 거 알지?”
  • 말을 마친 박형욱은 손에 든 자료를 그대로 문서세단기에 집어넣었다. 종이가 절단되는 소리와 함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온전했던 파일들이 갈가리 찢어진 종이 쪼가리로 변신했다.
  • “박형욱, 너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 박형욱의 행동은 박미주를 완전히 꼭지 돌게 만들었다.
  • 은행 카드가 동결된 탓에 박미주네 가족은 박기환이 숨겨놓은 비상금으로 당분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방금 그녀 가족의 자금줄이 되어줄 파일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박형욱은 박미주 일가를 막다른 골목까지 몰아넣었다.
  • “왜, 문제 될 거 있어? 이 사무실에 있는 종이는 모두 회사 거야. 내가 우리 회사 물건을 버리겠다는데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너 이렇게 마음대로 사무실에 들이닥치는 거 위법행위야 알아? 경비원, 여기 내 사무실에 뛰쳐들어온 여자 지금 당장 끌어내!”
  • 박형욱이 경비실에 전화를 걸었다.
  • “박형욱, 너 딱 기다려. 내가 언젠가 너 나한테 제발 살려달라고 싹싹 빌게 만들 테니까.”
  • 경비원은 박미주를 건물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간 뒤 그녀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 “당신…”
  • 박미주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손가락으로 경비원을 가리키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예전에 회사를 다니면서 박미주는 아랫사람들한테 그래도 꽤나 잘해주었다고 자부했었다. 그러나 배은망덕한 그들은 옛정을 하나도 봐주는 법 없이 그녀를 철저히 외면하는 길을 택했다.
  • “미주야, 괜찮아?”
  • 박미주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떨어트린 채 바닥에 넘어지자 진천하는 당장이라도 경비원의 손을 잘라낼 기세로 두 눈을 차갑게 빛냈다.
  • “왜, 그렇게 째려보다 한 대 때리겠어? 까불지 마. 그러다 큰 코 다친다?”
  • 전자 곤봉을 손에 든 경비원이 한껏 으스대는 표정으로 진천하를 향해 비아냥댔다.
  • “진천하, 너 전에 나랑 폭력 쓰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 진천하의 눈빛이 달라진 걸 눈치챈 박미주가 얼른 그를 막아 나섰다. 지금도 이미 제 가족의 처지가 충분히 처참해진 터라 그녀는 박기태 가족에게 더 이상 다른 약점을 잡히기 싫었다.
  • “알겠어. 건드리지 않을게.”
  • 진천하는 잠시 성질을 참아냈다.
  • “자전거에 짐을 싣는 건 무리니까 잠깐만 기다려봐. 내가 차를 불러올게.”
  • 박미주를 부축하고 일어선 진천하는 택시를 부른 뒤 박미주를 혼자 먼저 보냈다. 그녀를 태운 택시가 멀어지자 진천하의 눈 속에 다시 차가운 빛줄기가 번뜩이기 시작했다.
  • “박미주, 나 내가 직접 때리지는 않겠다고 약속했지, 다른 사람이 손쓰는 건 막겠다는 얘기 안 했다.”
  • 진천하는 박미주의 자전거를 타고 자리를 떠났다. 그가 모습을 감추자마자 서류 가방을 든 청룡이 박헌 그룹의 대표 사무실에 나타났다.
  • “누구시죠? 여긴 어쩐 일로 오셨는지?”
  • 박헌 그룹과 협력 관계를 이어오던 업체들이 연달아 협력 중지 통보를 해오자 박기태는 할 수없이 주말에도 나와서 업무를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은 연이은 나쁜 소식으로 인해 수심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쳐들어온 청룡을 발견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 “저희 회장님께서 20억으로 박헌 그룹 매수를 원하십니다. 여기 회사 매매계약서를 가져왔으니 사인하시죠.”
  • 청룡이 명령조로 박기태에게 말했다.
  • “뭐라고요? 저희 회사는 예상 시가총액이 2000억을 넘는 유니콘 회사입니다. 그런데 뭐라고요? 20억? 차라리 그냥 뺏어가지 그래요? 그쪽 회장님이 얼마를 불러도 전 회사를 팔 생각이 없습니다.”
  • 박기태는 재롱떠는 원숭이를 쳐다보듯 청룡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