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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배은망덕한 인간이 되지 마

  • “2000억 예상 시가총액도 다 예전 얘기죠. 지금의 박헌 그룹은 딱 20억 정도의 가치만 있습니다. 그것도 지금 현재 가격이 그렇다는 거고, 조금 있으면 더 떨어질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신중하게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겁니다.”
  • 청룡은 가까이에 있는 소파에 앉아 시가렛 한 대를 꺼내 손안에 쥐고 굴리기 시작했다.
  • “경…”
  • 박기태가 경비원을 불러 청룡을 밖으로 내쫓으려던 그때, 그의 휴대폰과 사무실 전화가 동시에 울리기 시작했다. 박기태는 누구한테서 걸려온 전화인지 두 전화를 모두 확인했다.
  • 그중 하나는 은행의 김 지점장한테서 걸려온 전화였고 나머지 하나는 박헌 그룹과 얼마 전에 꽤나 큰 금액의 협업 계약서를 체결한 회사의 사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박기태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여보세요, 최 사장님. 네? 뭐라고요? 저희 회사랑 계약을 파기하시겠다니, 혹시 저희가 최 사장님 맘에 안 들만한 행동…”
  • 박기태가 마저 질문을 물어보기도 전에 상대방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나 박기태는 감히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상대방은 부산 언더세계의 왕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는 최오였기 때문이었다.
  • 애초에 박미주가 이준혁과 결혼한다는 소식이 발표되었을 때 다른 경쟁 회사에서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서는 바람에 박헌 그룹은 최오가 거느리고 있던 회사와 무려 400억짜리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 최근 이틀 동안 이 씨 가문에서 복수를 해오는 탓에 박헌 그룹은 여러 회사와 계약을 파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박기태는 크게 걱정되지 않았었다. 그에게는 아직 최오와의 계약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만 계속 안고 갈 수 있다면 박헌 그룹은 2년 동안 근심 걱정 없이 잘 굴러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 박기태는 최오에게서 계약 파기 통보를 결국 받게 되었다.
  • 이렇게 되면 거의 모든 업체와의 계약이 파기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기존에 예상 시가총액이 2000억이었던 박헌 그룹은 졸지에 작업장과 설비만 남은 빈껍데기 회사가 되어버렸다.
  • 넋이 나간 박기태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그때, 사무실의 유선 전화가 명을 재촉하듯이 끊어질 생각을 않고 계속 울리고 있었다.
  • “여보세요. 무사하셨습니까, 지점장님. 네? 뭐라고요? 대출금을 지금 당장 갚아야 된다고요? 지난번에 반 년을 연장해 주기로 하셨잖습니까. 근데 왜…”
  • 이번에도 박기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대방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신호음을 들으며 박기태는 완전히 정신을 놔버렸다.
  • 만약 최오의 전화로 박헌 그룹의 시가총액이 10분의 1로 줄어들었다면 은행에서 걸려온 전화로 박헌 그룹은 아예 파산의 위기에 처해졌다.
  • 회사에서는 최오와의 계약을 담보로 은행에 대출 상환 기한을 반년 더 연장한 참이었다. 지금 모든 계약이 파기되고, 또 은행에서는 대출 상환을 재촉하는 마당에 박헌 그룹은 막다른 골목길에 다다랐다고 볼 수 있었다.
  • 회사 자금은 이미 모두 곳곳에 물려있는 상태였다. 최오와 소송까지 가는 건 아예 죽을 길을 스스로 찾아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 “이제 어떤가요? 20억 매수 금액이 더 이상 사기로 들리지는 않죠? 그런데 이걸 어쩌죠? 저 지금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제는 10억 밖에 내놓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사인하셔도 아직 괜찮으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사인 못 하겠으면 파산의 길로 가시던가. 그때 되면 회사도 없어지고, 집이랑 자동차도 은행에서 가져가 경매에 넘어가게 될 겁니다.”
  • 청룡은 손에 들고 있던 시가렛에 불을 붙인 뒤 한 모금 들이마시며 담담하게 말했다.
  • “당신은… 이 씨 가문에서 나온 사람인가요?”
  • 얼굴이 하얗게 질린 박기태는 의자에 주저앉아 청룡에게 물었다.
  • “이 씨 가문? 고작 그따위 가문이요?”
  • 연속으로 뱉은 두 물음이 청룡의 현재 심정을 완벽하게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경멸의 표정이 떠올랐다.
  • “저 아버지한테 전화 한 통만 하겠습니다.”
  • “……”
  • 결국 박 씨 가문은 강제 파산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10억의 가격으로 어제까지만 해도 시가총액이 2000억에 달했던 유니콘 회사를 정체 모를 신비한 회장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 “됐습니다. 이제 이틀 뒤에 저희 회장님께서 회사를 인수하러 들릴 테니까 그때까지 모든 준비를 다 마쳐주세요. 인수인계가 끝나는 시점에 그쪽 통장에 돈이 들어갈 것입니다. 그럼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하고 가보겠습니다. 저 경비원한테 길 안내를 부탁드리죠.”
  • 청룡은 떠나기 전 한 경비원을 콕 집어 자신을 배웅하기를 요구했다. 새로운 사장님에게 지명을 당한 경비원은 그에게 잘 보여 높은 자리로 올라갈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 그렇게 무사히 건물 밖까지 청룡을 모시고 나온 경비원은 승승장구의 기회 대신 자신을 향해 피 묻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악몽과 마주하게 되었다.
  • “악! 내 손!”
  • 경비원의 목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 “똑바로 기억해. 사람은 절대 배은망덕한 인간이 돼서는 안 되는 거야.”
  • 그렇게 한마디를 남긴 청룡은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 박 씨 가문 외에도 아직 북쪽에서 돌아오지 않은 부산의 제일 갑부 이덕규 또한 아랫사람들한테서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
  • “뭐라고? 오늘 세무청에서 불시에 감사를 나왔다고?”
  • 부하 직원의 보고를 들은 이덕규는 식은땀을 한 바가지 쏟았다. 부산에서 이덕규의 지위로 놓고 보자면 이러한 불시적 감사는 먼저 그에게 사전 통보가 갔어야 맞았다. 그러나 이번 감사는 전혀 그런 게 없었고 감사를 진행한 시간 또한 말도 안 되는 주말이었다. 이건 분명 누군가가 이덕규에게 시비를 걸어온 게 틀림없었다.
  • 제 주위 인맥을 한 바퀴 스윽 검사해 본 이덕규는 어디에서 문제가 생겨난 건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 그는 아들 이준혁이 생각나 그에게 당장 전화를 걸었다.
  • “아들, 요즘 집에 뭐 별다른 일은 없었어?”
  • 이덕규는 걱정되는 마음에 얼른 이준혁에게 물었다.
  • “아버지, 그렇지 않아도 저 아버지한테 연락 드리려 했어요. 글쎄 박미주 그년이 어제 웬 남자 하나를 데리고 와서 파혼하자고 그러지 뭐예요? 저희 가문을 우습게 봐도 유분수지. 이건 분명 우리 이 씨 가문을 욕보인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 이준혁은 평정심을 잃고 노발대발하며 박미주와 진천하가 직접 찾아와 파혼한 사실을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았다.
  • “그 남자 이름이 뭔데? 너 그 사람들한테 본때를 제대로 보여줬지?”
  • 감히 이 씨 가문에 이런 수모를 안겨주다니. 이준혁의 말에 이덕규 또한 화가 끓어올랐지만 제대로 된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끝까지 성질을 참으며 물었다.
  • “그럼요. 둘이 그렇게 떠나가고 나서 저 그 자리에서 당장 최오를 제외한 박헌 그룹의 협력 업체에 모두 전화를 돌려 그들과의 계약을 중지하라고 시켰어요. 그리고 박미주가 데려온 그 남자 이름이 뭐였더라. 진천 뭐였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요.”
  • “진천? 혹시 그 사람 이름 진천하 맞아?”
  • 이덕규는 설마 하는 마음에 재빨리 이준혁에게 물었다. 긴장으로 갑자기 세차게 뛰기 시작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이덕규는 제발 제가 생각하는 게 아니길 바랐다.
  • “어어어, 맞아요. 이름이 딱 진천하였어요. 그 사람 이름을 아버지가 어떻게 아세요?”
  • 이준혁은 이덕규의 다급한 음성을 들으며 의혹이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 “어쩐지, 진짜 진천하였어. 너 이 새끼 지금 큰 사고를 쳤어, 알아? 너 이틀 동안 어디에도 나가지 마. 집에 조용히 처박혀 있어. 나 저녁에 바로 출발해서 들어갈 테니까 내일 나랑 같이 박 씨 가문에 들러서 박미주한테 사과하러 가자. 그리고 전화를 집사한테 줘 봐.”
  • 상대방의 정체가 천하 군신의 진천하임을 확인한 이덕규는 식은땀을 잔뜩 흘렸다. 전화에서 아들을 대판 혼낸 이덕규는 집사에게 이준혁을 한 발자국도 집에서 못 나가게 집에 가둬두라고 지시했다.
  • 진 회장님의 심기마저 건드리게 된다면 그는 체면이고 뭐고 자기 가문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 진 회장님이 자신의 아들을 죽인다 해도 이덕규는 잘못 걸렸다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진천하의 그 어떤 신분도 이 씨 가문이 감히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 이준혁은 제가 들은 게 맞는지 제 귀를 의심했다. 제 가문을 모욕한 박미주를 혼내는 게 아니라 같이 사과하러 가야 된다니. 이준혁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괘씸한 게 있었으니 바로 집사가 그를 집안에 가둬두었다는 점이었다. 더불어 휴대폰과 컴퓨터와 같이 외부와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모든 전자기기 또한 모두 몰수당했다. 이준혁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누구 하나 도와주는 이가 없었다. 평소에 자주 부르던 모델을 불러와 놀려고 해도 지금의 그에겐 그림의 떡 같은 얘기였다.
  • 진천하가 지시한 임무를 완성한 청룡은 얼른 그에게 전화를 걸어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 전화를 끊은 뒤 주위를 둘러보던 진천하는 자기가 한 명품카 매장 근처까지 왔음을 발견했다. 어젯밤 장인어른과의 대화가 생각난 진천하는 그대로 브레이크를 걸어 자전거를 멈춰세웠다. 그는 자전거를 문 앞에 세워둔 뒤 매장 안으로 걸어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