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억 예상 시가총액도 다 예전 얘기죠. 지금의 박헌 그룹은 딱 20억 정도의 가치만 있습니다. 그것도 지금 현재 가격이 그렇다는 거고, 조금 있으면 더 떨어질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신중하게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겁니다.”
청룡은 가까이에 있는 소파에 앉아 시가렛 한 대를 꺼내 손안에 쥐고 굴리기 시작했다.
“경…”
박기태가 경비원을 불러 청룡을 밖으로 내쫓으려던 그때, 그의 휴대폰과 사무실 전화가 동시에 울리기 시작했다. 박기태는 누구한테서 걸려온 전화인지 두 전화를 모두 확인했다.
그중 하나는 은행의 김 지점장한테서 걸려온 전화였고 나머지 하나는 박헌 그룹과 얼마 전에 꽤나 큰 금액의 협업 계약서를 체결한 회사의 사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박기태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여보세요, 최 사장님. 네? 뭐라고요? 저희 회사랑 계약을 파기하시겠다니, 혹시 저희가 최 사장님 맘에 안 들만한 행동…”
박기태가 마저 질문을 물어보기도 전에 상대방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나 박기태는 감히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상대방은 부산 언더세계의 왕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는 최오였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박미주가 이준혁과 결혼한다는 소식이 발표되었을 때 다른 경쟁 회사에서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서는 바람에 박헌 그룹은 최오가 거느리고 있던 회사와 무려 400억짜리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최근 이틀 동안 이 씨 가문에서 복수를 해오는 탓에 박헌 그룹은 여러 회사와 계약을 파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박기태는 크게 걱정되지 않았었다. 그에게는 아직 최오와의 계약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만 계속 안고 갈 수 있다면 박헌 그룹은 2년 동안 근심 걱정 없이 잘 굴러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 박기태는 최오에게서 계약 파기 통보를 결국 받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거의 모든 업체와의 계약이 파기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기존에 예상 시가총액이 2000억이었던 박헌 그룹은 졸지에 작업장과 설비만 남은 빈껍데기 회사가 되어버렸다.
넋이 나간 박기태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그때, 사무실의 유선 전화가 명을 재촉하듯이 끊어질 생각을 않고 계속 울리고 있었다.
“여보세요. 무사하셨습니까, 지점장님. 네? 뭐라고요? 대출금을 지금 당장 갚아야 된다고요? 지난번에 반 년을 연장해 주기로 하셨잖습니까. 근데 왜…”
이번에도 박기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대방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신호음을 들으며 박기태는 완전히 정신을 놔버렸다.
만약 최오의 전화로 박헌 그룹의 시가총액이 10분의 1로 줄어들었다면 은행에서 걸려온 전화로 박헌 그룹은 아예 파산의 위기에 처해졌다.
회사에서는 최오와의 계약을 담보로 은행에 대출 상환 기한을 반년 더 연장한 참이었다. 지금 모든 계약이 파기되고, 또 은행에서는 대출 상환을 재촉하는 마당에 박헌 그룹은 막다른 골목길에 다다랐다고 볼 수 있었다.
회사 자금은 이미 모두 곳곳에 물려있는 상태였다. 최오와 소송까지 가는 건 아예 죽을 길을 스스로 찾아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어떤가요? 20억 매수 금액이 더 이상 사기로 들리지는 않죠? 그런데 이걸 어쩌죠? 저 지금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제는 10억 밖에 내놓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사인하셔도 아직 괜찮으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사인 못 하겠으면 파산의 길로 가시던가. 그때 되면 회사도 없어지고, 집이랑 자동차도 은행에서 가져가 경매에 넘어가게 될 겁니다.”
청룡은 손에 들고 있던 시가렛에 불을 붙인 뒤 한 모금 들이마시며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은… 이 씨 가문에서 나온 사람인가요?”
얼굴이 하얗게 질린 박기태는 의자에 주저앉아 청룡에게 물었다.
“이 씨 가문? 고작 그따위 가문이요?”
연속으로 뱉은 두 물음이 청룡의 현재 심정을 완벽하게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경멸의 표정이 떠올랐다.
“저 아버지한테 전화 한 통만 하겠습니다.”
“……”
결국 박 씨 가문은 강제 파산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10억의 가격으로 어제까지만 해도 시가총액이 2000억에 달했던 유니콘 회사를 정체 모를 신비한 회장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됐습니다. 이제 이틀 뒤에 저희 회장님께서 회사를 인수하러 들릴 테니까 그때까지 모든 준비를 다 마쳐주세요. 인수인계가 끝나는 시점에 그쪽 통장에 돈이 들어갈 것입니다. 그럼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하고 가보겠습니다. 저 경비원한테 길 안내를 부탁드리죠.”
청룡은 떠나기 전 한 경비원을 콕 집어 자신을 배웅하기를 요구했다. 새로운 사장님에게 지명을 당한 경비원은 그에게 잘 보여 높은 자리로 올라갈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렇게 무사히 건물 밖까지 청룡을 모시고 나온 경비원은 승승장구의 기회 대신 자신을 향해 피 묻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악몽과 마주하게 되었다.
“악! 내 손!”
경비원의 목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똑바로 기억해. 사람은 절대 배은망덕한 인간이 돼서는 안 되는 거야.”
그렇게 한마디를 남긴 청룡은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박 씨 가문 외에도 아직 북쪽에서 돌아오지 않은 부산의 제일 갑부 이덕규 또한 아랫사람들한테서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
“뭐라고? 오늘 세무청에서 불시에 감사를 나왔다고?”
부하 직원의 보고를 들은 이덕규는 식은땀을 한 바가지 쏟았다. 부산에서 이덕규의 지위로 놓고 보자면 이러한 불시적 감사는 먼저 그에게 사전 통보가 갔어야 맞았다. 그러나 이번 감사는 전혀 그런 게 없었고 감사를 진행한 시간 또한 말도 안 되는 주말이었다. 이건 분명 누군가가 이덕규에게 시비를 걸어온 게 틀림없었다.
제 주위 인맥을 한 바퀴 스윽 검사해 본 이덕규는 어디에서 문제가 생겨난 건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 그는 아들 이준혁이 생각나 그에게 당장 전화를 걸었다.
“아들, 요즘 집에 뭐 별다른 일은 없었어?”
이덕규는 걱정되는 마음에 얼른 이준혁에게 물었다.
“아버지, 그렇지 않아도 저 아버지한테 연락 드리려 했어요. 글쎄 박미주 그년이 어제 웬 남자 하나를 데리고 와서 파혼하자고 그러지 뭐예요? 저희 가문을 우습게 봐도 유분수지. 이건 분명 우리 이 씨 가문을 욕보인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이준혁은 평정심을 잃고 노발대발하며 박미주와 진천하가 직접 찾아와 파혼한 사실을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았다.
“그 남자 이름이 뭔데? 너 그 사람들한테 본때를 제대로 보여줬지?”
감히 이 씨 가문에 이런 수모를 안겨주다니. 이준혁의 말에 이덕규 또한 화가 끓어올랐지만 제대로 된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끝까지 성질을 참으며 물었다.
“그럼요. 둘이 그렇게 떠나가고 나서 저 그 자리에서 당장 최오를 제외한 박헌 그룹의 협력 업체에 모두 전화를 돌려 그들과의 계약을 중지하라고 시켰어요. 그리고 박미주가 데려온 그 남자 이름이 뭐였더라. 진천 뭐였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요.”
“진천? 혹시 그 사람 이름 진천하 맞아?”
이덕규는 설마 하는 마음에 재빨리 이준혁에게 물었다. 긴장으로 갑자기 세차게 뛰기 시작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이덕규는 제발 제가 생각하는 게 아니길 바랐다.
“어어어, 맞아요. 이름이 딱 진천하였어요. 그 사람 이름을 아버지가 어떻게 아세요?”
이준혁은 이덕규의 다급한 음성을 들으며 의혹이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어쩐지, 진짜 진천하였어. 너 이 새끼 지금 큰 사고를 쳤어, 알아? 너 이틀 동안 어디에도 나가지 마. 집에 조용히 처박혀 있어. 나 저녁에 바로 출발해서 들어갈 테니까 내일 나랑 같이 박 씨 가문에 들러서 박미주한테 사과하러 가자. 그리고 전화를 집사한테 줘 봐.”
상대방의 정체가 천하 군신의 진천하임을 확인한 이덕규는 식은땀을 잔뜩 흘렸다. 전화에서 아들을 대판 혼낸 이덕규는 집사에게 이준혁을 한 발자국도 집에서 못 나가게 집에 가둬두라고 지시했다.
진 회장님의 심기마저 건드리게 된다면 그는 체면이고 뭐고 자기 가문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 진 회장님이 자신의 아들을 죽인다 해도 이덕규는 잘못 걸렸다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진천하의 그 어떤 신분도 이 씨 가문이 감히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준혁은 제가 들은 게 맞는지 제 귀를 의심했다. 제 가문을 모욕한 박미주를 혼내는 게 아니라 같이 사과하러 가야 된다니. 이준혁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괘씸한 게 있었으니 바로 집사가 그를 집안에 가둬두었다는 점이었다. 더불어 휴대폰과 컴퓨터와 같이 외부와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모든 전자기기 또한 모두 몰수당했다. 이준혁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누구 하나 도와주는 이가 없었다. 평소에 자주 부르던 모델을 불러와 놀려고 해도 지금의 그에겐 그림의 떡 같은 얘기였다.
진천하가 지시한 임무를 완성한 청룡은 얼른 그에게 전화를 걸어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 전화를 끊은 뒤 주위를 둘러보던 진천하는 자기가 한 명품카 매장 근처까지 왔음을 발견했다. 어젯밤 장인어른과의 대화가 생각난 진천하는 그대로 브레이크를 걸어 자전거를 멈춰세웠다. 그는 자전거를 문 앞에 세워둔 뒤 매장 안으로 걸어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