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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호형호제

  • “엄마 얼굴 왜 그래? 누구한테 맞았어?”
  • 진천하를 포함한 세 사람이 집에 들어섰다. 주영란의 얼굴이 빨갛게 부어있는 것을 본 박미주가 화들짝 놀라며 다급하게 그녀에게 물었다.
  • “엄마 괜찮아. 시장에서 장 보다가 다른 사람이랑 잠깐 시비 붙었는데 네 아빠가 마침 제때에 도착해가지고 조금밖에 안 다쳤어. 상대방은 나보다 더 많이 다쳤어.”
  • 주영란의 말은 엄밀히 말하자면 절반은 진짜였고 절반은 가짜였다. 그녀가 말한 상대방 중 경비원은 손을 하나 잃었고 은행 팀장은 혀를 잃었다. 두 사람 모두 주영란이 다친 것보다 상태가 훨씬 많이 심각했다. 진천하의 정체를 알아내기 전에 그녀는 딸에게 은행에서 일어난 일을 함구하기로 결심했다.
  • 주영란의 말에 신빙성이 없어 보였는지 박미주는 진천하와 박기환을 바라봤다. 이미 세 사람이서 입을 맞추기로 합의가 되어 있었던 터라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여 주영란의 말에 긍정했다. 박미주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지금부터 엄마랑 같이 밥 차리자. 너 집에서 나와 혼자 살고 나서부터 너랑은 요리를 같이 해 본 지 몇 년은 더 지난 것 같아.”
  • 주영란은 시장에 마저 들러 산 생닭을 흔들어 보이더니 박미주를 끌고 주방으로 향했다.
  • “우리는 베란다에 나가 얘기하자꾸나.”
  • 박기환이 먼저 베란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진천하는 장인어른이 자신의 신분에 대해 물어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박기환의 뒤를 따라 베란다로 걸어갔다. 어차피 진천하는 박미주네 가족을 속일 생각이 없었다.
  • “한 대 줄까?”
  • 박기환이 담배 하나를 건네왔다.
  • 진천하는 담배를 피워도 그만, 안 펴도 그만이었다. 그는 공손하게 박기환의 손에서 담배를 건네받았다. 두 남자가 나란히 베란다에서 담배 연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 “그래 자네 신분이 대체 뭔가? 우리 미주한테 접근한 목적은 또 뭐고?”
  • 담배 한 대를 끝까지 태운 뒤 박기환이 꽁초에 붙은 불을 비벼 껐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들어 진천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그의 눈 속 깊은 곳에 은은한 살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만약 진천하가 자기 딸한테 조금이라도 나쁜 의도로 접근한 거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딸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 “이거 한 번 봐주시겠어요?”
  • 진천하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호두가 하나 빠진 호두 팔찌를 꺼내 박기환에게 보여주었다.
  • “이건 미주의 호두 팔찌잖아. 그래 이 팔찌하고 자네 신분이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 박기환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 “이 호두 팔찌에 왜 호두 하나가 빠졌죠?”
  • 진천하는 여전히 대답에 급급하지 않았다. 대신 또 다른 물음 하나를 던졌다.
  • “우리 딸 미주는 어려서부터 마음씨가 아주 착했다네. 예전에 미주가 아직 어릴 때 길가에서 꼬마 거지 아이를 본 적이 있었는데 불쌍해 보였는지 제 패딩이랑 팔찌에서 호두 하나를 떼어내 그 아이한테 준 적이 있었거든. 그리고 그날 집에 왔는데 글쎄 미주 입술이 얼어서 자줏빛이 되었더라고. 그리고 그날로부터 미주는 내리 세 날을 고열로 꼬빡 앓아누웠는데 나랑 애 엄마가 얼마나 놀랐던지.”
  • 박기환은 옛 기억에 잠시 잠겼다.
  • “그 호두, 혹시 이거예요?”
  • 진천하는 목에서 목걸이를 빼내 손에 쥐었다. 그리고 줄에 끼여진 작은 호두 한 알을 박기환에게 보여주었다. 그 호두는 팔찌에 달린 다른 호두랑 사이즈하고 모양이며 모두 똑같았다. 굳이 다른 점을 꼽자면 진천하의 손에 들린 호두 표면이 좀 더 매끄럽다는 정도였다. 그 이유는 진천하가 호두를 시도 때도 없이 자주 만졌기 때문이었다.
  • 지금까지 진천하는 구사일생의 고비를 몇 번이나 겪었었다. 매번 생사의 경계선에서 배회할 때마다 그는 이 호두를 꺼내 만지작대고는 했다. 그리고 그 호두는 절대 그의 기대를 저버리는 법이 없었다. 호두는 진천하와 함께 모진 역경들을 극복해나갔으며 결국 오늘날의 천하 군신이라는 타이틀을 성취하였다.
  • “그럼 자네가 그때 그 길가에 있었던 거지 아이란 말인가?”
  • 진천하의 손에 있던 호두와 딸의 호두 팔찌를 대보더니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모습을 보며 박기환이 조금은 확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 “맞습니다. 제가 바로 그때 그 거지였어요. 그때 미주가 벗어준 패딩이 여자아이용 패딩이라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보긴 했지만 전 그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 호두의 힘으로 천하 군신이라는 타이틀도 거머쥐었고요. 그래서 전 결심했어요.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등지더라도 미주 하나만큼은 영원히 저버리지 않겠다고요.”
  • 결심을 다지는 진천하의 목소리가 바위처럼 견고하면서도 눈빛은 흐르는 물처럼 부드러웠다.
  • “뭐라고? 자네가 그 비밀에 쌓인 천하 군신이란 말인가?”
  • 박기환이 경악한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 “그게 아니라면 제가 이 미러 퍼플 카드를 어떻게 갖고 있었겠어요?”
  • 박기환이 믿지 못하는 듯하자 진천하가 미러 퍼플 카드를 꺼내며 말했다.
  • “아니… 그럼 자네가 그 전설 속의 천하 군신이라면 왜 고작 6천만 원의 예물 비용도 내지 못해 서 씨 가문에서 쫓겨났지?”
  • 박기환은 제가 제일 궁금했던 걸 물었다.
  • “이게 다 미주가 6년 전에 호두 팔찌를 서은정한테 선물로 줘서 그래요. 그 때문에 전 서은정이 18년 전의 미주인 줄로 착각했고, 그 오해를 어제서야 알게 됐었어요.”
  • 진천하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천하를 호령하는 천하 군신인 제가 이렇듯 우스운 오해를 했다는 게 너무 창피했기 때문이었다.
  • “어쩐지,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진천하, 천하 군신. 미주가 어렸을 적 멋모르고 한 선행이 이렇게 큰 복이 되어 돌아오다니. 착한 사람에게는 역시 복이 따라오기 마련이지. 암, 그렇고말고. 우리 사위, 하하하.”
  • 진천하의 해명과 눈앞의 호두 팔찌, 그리고 미러 퍼플 카드가 합쳐져 박기환은 진천하의 말을 완전히 믿게 되었다. 순식간에 흥분한 박기환은 어느새 진천하를 부르는 호칭도 자네에서 우리 사위로 바꿔버렸다. 와이프와 제가 여태껏 얕잡아 보던 헌신짝 사위가 세상에서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천하 군신이라니, 박기환은 모든 우울했던 감정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 박미주가 이준혁과 결혼했을 때 박기환이 부산에서 큰소리를 떵떵 칠 수 있다면 천하 군신을 사위로 둔 지금은 전 세계에서 큰소리를 떵떵 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박기환은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걸 느끼며 마치 스무 살은 젊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아버님, 제가 듣기로 할아버지께서 아버님 카드를 정지시켰다면서요? 이 카드 드릴 테니까 급할 때 먼저 용돈 삼아 쓰세요.”
  • 박기환이 자신을 사위로 인정하자 똑같이 기분이 좋아진 진천하는 아까 꺼내놨던 미러 퍼플 카드의 서브 카드를 박기환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는 원래부터 카드 안에 들어있는 1억 달러를 박미주의 부모님께 드려 효도하려고 생각했었다.
  • “이 귀한 카드를 어찌!”
  • 박기환은 카드를 아래위로 돌려보며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장인어른이 그대로 카드를 받을 거라 생각하고 있던 그때, 박기환은 카드를 다시 진천하에게 돌려주었다.
  • “고마워, 우리 사위. 천하 네 뜻은 잘 알겠으니까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우리 와이프랑 내 카드가 정지되긴 했지만 내가 금융학과 출신이라 평소에 주식을 좀 했었거든. 그때 쟁여둔 비상금이 아직 조금 남아있어. 천하 네 카드 잔액만큼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노년을 보내기에는 충분하니 그 돈은 네가 갖고 있으렴. 아니면 미주한테 좋은 거라도 선물해 줘서 체면을 좀 살려주던지. 미주 사촌들한테 얕잡아 보이지 않게 말이야.”
  • 박기환의 얼굴이 자신감으로 가득 찼다.
  • “알겠습니다, 아버님. 그러면 나중에 돈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 진천하는 더 권하는 대신 카드를 다시 지갑에 넣어두었다. 그가 박기환의 손에서 카드를 건네받아 챙기는 모습을 마침 주방에서 요리를 들고나오던 박미주가 보고 말았다. 그녀는 박기환이 진천하에게 ‘돈을 주는’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 “아버님은 무슨, 그렇게 부르면 내가 너무 나이가 많아 보이잖아. 나는 한평생 천하 너처럼 전장에서 이름을 떨친 사람들을 제일 존경해왔어. 아니면 이렇게 하자꾸나. 내가 나이가 많으니까 앞으로 자네를 천하 동생이라고 부를게. 자, 이제 식사가 다 준비된 것 같으니까 이만 나가지. 나 소주 사러 잠깐 다녀올 테니까 오늘 저녁 아주 그냥 진하게 마셔보자고!”
  • 박기환이 흥분 가득한 표정으로 편의점에 가려고 현관문을 나섰다. 그의 흥분한 목소리가 집안에 아직 떠다니고 있는 듯했다.
  • 진천하와 박미주는 할 말을 잃은 채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