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린 박인수는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다. 건강에 크게 문제가 생긴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아버지, 둘째네 이번에 진짜 큰 사고 쳤어요. 미주랑 이준혁 씨랑 결혼하는 거 지난주에 이미 다 발표했단 말이에요. 심지어 이 씨 가문에서 여러 명문가들한테 청첩장까지 다 보낸 상태인데, 박미주 고 계집애가 어디서 헌신짝 하나 구해와서 파혼해버렸으니 이 씨 가문을 욕보인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앞으로 이 씨 가문이 부산에서 어디 머리나 들고 다니겠어요? 그쪽 가문에서 절대 이대로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오늘 아침에만 해도 벌써 세 군데 업체에서 협력을 그만두겠다고 연락해왔어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사태를 수습해야 돼요.”
박기태는 박인수가 타격을 감당할 수 있는 상태이건 말건 그의 침대 옆으로 다가가 똑같이 걱정 가득한 척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박기주는 굳이 이런 시기에 아버지를 자극하는 맏형에 불만 있었지만 지금 박 씨 가문에 위기가 닥친 건 사실이라 같이 맞장구를 칠 수밖에 없었다.
“맞아요, 아버지. 그 누구도 부산에서 이 씨 가문한테 이런 모욕을 안겨준 적이 없었어요. 이 씨 가문에서 분명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수습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내지 않는 한 우리 박 씨 가문은 진짜 끝이라고요.”
“하. 이미 일이 벌어진 이상 어쩔 수 없지. 그래 다들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게냐?”
한숨을 내쉰 박인수가 물었다.
“할아버지, 제 생각엔 이게 다 둘째 작은아버지가 딸을 잘못 교육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상황을 보세요. 부산 제일의 명문가인 이 씨 가문에게 미움을 산 건 물론이고, 박미주가 어디서 남이 내다 버린 헌신짝이나 주워온 탓에 우리 박 씨 가문의 체면도 완전 말이 아니게 됐어요. 그러니까 차라리 처벌을 내린다 생각하고 둘째 작은아버지네 일가를 가문에서 내쫓는 게 어떠세요? 그러면 우리도 이번 일에서 발을 뺄 수 있을 거고 이 씨 가문에서도 우리한테 뭐라고 탓하지 못하겠죠.”
박미주의 사촌 오빠인 박형욱이 누구보다도 빠르게 제가 생각한 해결 방안을 얘기했다.
사실 이 방법은 박형욱과 박기태가 사전에 미리 말을 맞춰놓은 것으로 박기태가 먼저 서두를 떼면 두 사람이 서로 주고받으며 추진하기로 되어있었다. 두 사람의 목적은 박미주 일가를 박 씨 가문에서 쫓아내 이 씨 가문의 분노를 잠재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덤으로 그들의 모든 자금줄을 잘라낼 생각이었다.
“그… 셋째야, 넌 어떻게 생각하냐?”
박인수는 큰 아들네 부자 두 사람을 지그시 바라본 뒤 고개를 돌려 막내아들인 박기주에게 물었다.
“저는… 형욱이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둘째 형님네랑 관계를 끊어야 이 씨 가문에서 트집을 잡을 핑계가 없어질 것 같아요.”
박인수의 물음에 박기주는 잠시 머뭇하더니 솔직하게 대답했다.
“됐다, 됐어. 그럼 너희들 말대로 하자꾸나. 미주 일은 형욱이 네가 인수받도록 해. 나 이제 피곤하니까 너희들은 이만 나가 봐.”
첫째와 셋째가 둘째 아들을 내쫓는 데에 모두 동의하자 박인수는 제 가문을 지키기 위하여 할 수없이 그들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박인수의 말에 박기태 부자는 크게 기뻐했고 박기주네 가족은 못마땅한 표정을 했다. 원래 박기환 일가가 가문에서 쫓겨나면 이제 남는 건 박기태와 박기주 두 집안이 가문의 재산을 반반으로 나눠가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박인수가 박미주의 일을 박형욱에게 일임했다는 건 가문의 희망을 조카인 박형욱에게 맡겼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에 박미주는 큰 프로젝트를 하나 맡았는데 곧 사인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협력업체의 배후에 있는 사장은 부산의 갑부 이덕규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최오라는 자로 부산 언더세계의 왕으로 불렸다. 이 씨 가문에서 시비만 걸어오지 않는다면 이 프로젝트 하나로 앞으로 2, 3년 동안 박 씨 가문은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흥!”
박기주는 박기태를 향해 콧방귀를 뀌더니 제일 먼저 병실을 나섰다. 저들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은 박기태 부자는 셋째네 가족의 기분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모든 사람이 다 떠나고 나서 박인수는 차마 속이 내려가지 않는지 잠깐 표정을 굳히더니 곧이어 다시 확고한 눈빛을 했다. 자신이 한평생 일궈온 심혈을 둘째네 때문에 망칠 수는 없었다.
박기태는 병실을 나서자마자 은행에 박기환 일가의 모든 카드를 정지시켜달라는 전화를 넣었다. 그리고 그들 명의의 차량과 부동산도 모두 손을 써놓은 뒤 박 씨 가문에서 박기환 일가를 방출했음을 정식으로 대외에 알렸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박기태는 집에 전화를 걸어 집사한테 당장 둘째네 일가의 모든 짐을 정리해서 밖에 내던지라고 분부했다.
박미주는 본집 별장에까지 쫓아와서야 부모님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미주야, 너 또 왜 여기까지 쫓아왔어. 임신 초기에는 그렇게 나돌아다녀선 안 돼. 조심해야지.”
차에서 방금 내린 주영란이 집까지 쫓아온 박미주를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임신 첫 3개월은 태아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로 자칫 잘못하면 유산 위험이 있었다.
“엄마, 아빠. 뭘 그렇게 급하게 돌아가세요. 카드도 까먹고 집에 두고 가시고. 그리고 아까 엄마가 오해…”
박미주는 세 장의 은행 카드를 주영란의 가방에 바로 집어넣고는 자신이 임신하지 않았음을 해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때 본가의 집사가 몇몇 하인을 대동하여 나오더니 세 사람의 짐을 밖에 내다던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팽 집사,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주영란은 딸의 얘기를 들을 새도 없이 몸을 돌려 씩씩거리며 팽 집사에게 질문했다.
“첫째 형님분께서 말씀하시길 세 분이 박 씨 가문을 위기에 빠트리고 치욕까지 안긴 죄를 물어 어르신께서 세 분을 박 씨 가문에서 내쫓기로 결정했다고 하셨어요. 저희는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참, 여기 있는 두 자동차도 가문에서 내준 거니까 다시 거둬들일 거예요. 거기! 차 몰 줄 아는 사람으로 두 명 와봐. 여기에 있는 차를 차고에 당장 갖다 놔.”
박인수가 평소에 박기환을 썩 탐탁지 않아 했던 터라 팽 집사 역시 덩달아 둘째네 가족을 얕잡아 보게 되었다. 거기다가 지금 가문에서 쫓겨나기까지 한 지금, 팽 집사는 그들의 짐을 밖에다 버린 뒤 다른 사람을 시켜 박미주와 박기환의 차를 끌고 별장 차고에 세워두게 했다. 일련의 조치를 마친 후 팽 집사는 별장 대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
“저… 팽 집사 저거 너무, 너무하잖아요! 안되겠어요. 저 아버님한테 따지러 갈래요.”
한낱 집사한테 치욕스러운 홀대를 당한 주영란은 분노를 삭이지 못해 가슴을 들썩거렸다. 그녀는 박인수와 양심 따윈 개나 줘버린 첫째와 셋째를 찾아가 따져야겠다며 몸을 돌려 당장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가긴 어딜 가! 지금 아버지 찾아가면 형님이 순순히 만나게 해줄 거라고 생각해?”
박기환은 주영란을 단번에 잡아당기며 제지했다. 그도 화가 났지만 박기환은 박인수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 번 내린 결정은 절대 바꾸는 법이 없었다. 지금 그를 찾아가는 건 아무 소용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큰 형님과 셋째 동생에게 수모를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럼 어떡해요? 지금 못 돼 처먹은 두 형제한테 이렇게 당하고도 당신은 참아져요, 이게? 내가 애초에 왜 당신같이 쓸모없는 사람을 선택했을까? 이혼해요. 이대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어요.”
이런 상황에서도 겁을 먹고 움츠러드는 박기환에 주영란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두 사람은 본가 문 앞에서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참지 않으면 어쩔 건데? 내가 집에서 위신 없는 것도 다 당신이 아들 하나 낳지 못해서 그런 거 아냐! 당신이 남자아이만 낳았어도 아버지가 나한테 이랬겠어? 큰 형님도 날 이렇게 얕봤겠냐고!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다 너 때문이라고!”
지금까지의 설움이 모두 폭발한 박기환은 주영란에 대한 모든 원망을 한꺼번에 털어냈다.
“엄마, 아빠. 싸우지 마세요. 다 제 탓이에요. 제가 너무 제 생각만 해서 두 분께 폐를 끼쳐드렸어요. 저 지금 당장 이준혁 도련님한테 사과하러 갈게요.”
부모님이 대판 싸우는 모습을 보며 박미주는 갑자기 제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은 마음에 죄송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서러움을 이기지 못한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박미주는 이준혁한테 사과하러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