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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즐거움 끝엔 슬픔이 따른다

  • “맞아, 나 오늘 파혼하러 왔어. 그러니까 앞으로 다시는 날 괴롭히지 마. 그렇지 않으면 성희롱으로 고소해버릴 거니까. 가자, 여보.”
  • 박미주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한 뒤 혼인관계 증명서를 든 채 진천하의 팔짱을 끼고 그곳을 떠나려 했다.
  • 그녀는 이준혁처럼 돈 좀 있다고 잘난 척하고 여자를 옷 바꿔 입듯 바꾸는 바람둥이를 제일 싫어했다.
  • 그녀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반려자는 천하 군신처럼 나라를 구하고 시민들을 구하는 위대한 영웅이었고 언젠가 그 신비한 천하 군신이 백마를 타고 와서 그녀와 결혼해 주길 줄곧 바랐다.
  • 그녀는 이런 헛된 꿈을 이미 몇 년 동안 상상해왔지만 꿈은 어디까지나 꿈일 뿐, 박미주는 천하 군신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아직 잘 몰랐다.
  • “야, 얼마면 돼!”
  • 이준혁이 이를 악물고 말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 이준혁의 눈에는 이 세상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설령 있다 해도 분명 상대가 돈의 액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 돈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는 것은 그가 어릴 때부터 해온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문제 해결방법이었다.
  • 하지만 그가 이번에 만난 사람은 바로 진천하였는데 그는 이 세상에서 재산이 가장 많은 남자였다. 이준혁의 돈이 제일이라던 법칙은 진천하의 앞에서는 아무런 효력도 없었다.
  • 그러나 이준혁의 얘기에 박미주는 약간 긴장했다.
  • 그녀는 진천하가 어쨌든 얼마 전 서 씨 가문에서 돈 문제로 곤욕을 치렀고 무엇보다 돈이 필요할 시기였기에 돈 때문에 두 사람 사이의 약속을 어기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 “이준혁 너의 그 더러운 생각은 집어치워. 내가 미주에 대한 감정은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야.”
  • 진천하의 힘찬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고 박미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박미주, 내 구역 부산시에서 아무도 나에게 이렇게 모욕감을 준 사람은 없었어. 내가 확신하는데, 너희 박 씨 가문은 3일 내로 너의 그 경솔한 행동 때문에 다시는 회생이 불가능해질 거야.”
  • 두 사람이 이 씨 가문 별장을 나서자 뒤에서는 히스테릭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 깜짝 놀란 박미주의 눈에는 당황하고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 그녀는 이 씨 가문이 보복을 해올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자기 생각만 하며 충동적으로 행동한 것은 아닌지 후회했다.
  • 박 씨 가문은 부산시에서 그저 이류 가문에 속했지만 이 씨 가문은 부산시 최고의 명문가이자 단연 으뜸이었다.
  • 만약 이 씨 가문이 정말 그들에게 보복하려 한다면 박 씨 가문은 발버둥 칠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 그러나 박미주가 혼인관계 증명서를 내던질 때부터 일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 파혼의 기쁨은 완전히 식어버렸고 대신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 “걱정 마, 박 씨 가문에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야. 날 믿어.”
  • 진천하는 박미주의 근심을 알아차리고 두 손으로 그녀의 두 팔을 잡고 자신만만한 얼굴로 위로했다.
  • “그래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자.”
  • 박미주는 진천하가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자신만만한 모습에 어느샌가 걱정은 잊고 고개를 끄덕였다.
  • 진천하는 마음이 편치 않은 박미주를 집으로 돌려보낸 후에야 렌트한 웨딩카를 반납했다.
  • 저녁 8시, 박 씨 가문 별장 안은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이미 자취를 한 박미주를 제외한 박 씨 가문의 모든 가족들이 모여 박미주와 이준혁이 다음 달 초 올리게 될 혼사를 논의했다.
  • 박인수는 시골 출신으로 성공하겠다는 의지 하나로 시골에서 올라와 부산시의 한 의류 공장에서 일했다.
  • 마흔이 넘은 나이에 저축한 돈을 모두 털어 자신의 의류공장을 차렸고 그 추진력으로 20여 년의 노력 끝에 부산시에서 입지를 굳히고 이류 가문에 진입하게 되었다.
  • 인맥이 부족했던 박 씨 가문에게 있어 이류 가문에 오르는 것은 이미 그들의 한계였고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었다.
  • 그러던 중 부산 최고 갑부 이덕규가 불쑥 찾아와 혼담을 꺼냈고 박 씨 가문은 그제야 희망을 찾은 듯했다.
  • 박인수는 망설임 없이 박미주와 이 씨 가문의 혼사를 허락했고 이젠 결혼까지 열흘 남짓 남았을 뿐이다.
  • 박 씨 가문 전체에 경사스러운 분위기가 넘쳐흘렀고 설날보다 더 떠들썩했다. 특히 박미주의 부모님이 제일 기뻐했다.
  • 박 씨 가문의 삼 형제 중 박미주의 아버지 박기환은 둘째였고 딸만 있고 아들은 없었다.
  • 불효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중 가장 큰 불효가 바로 대를 이을 자손이 없는 것이었다.
  • 게다가 박인수의 낡은 전통 관념에 의해 박미주의 가족은 하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취급을 받았다.
  • 그러나 만약 박미주가 이준혁과 결혼을 하게 되면 박기환은 곧 부산시 최고의 명문가의 사돈이 될 수 있었기에 드디어 이 집안에서 기를 펼 수 있게 된다.
  • 그렇게 되면 박 씨 가문 뿐만 아니라 부산시에서도 우쭐댈 수 있었다.
  • “너무 축하드려요, 형님. 미정이 걔가 정말 좋은 집안을 찾았네요.”
  • “그래, 기환아. 너 딸 한번 잘 낳았다. 우린 왜 이렇게 몹쓸 자식들만 낳은 거냐. 너무 부럽네.”
  • 큰 형 박기태와 셋째 동생 박기주가 부러운 표정으로 박기환을 바라보았다.
  • 예전에 두 사람은 줄곧 둘째인 박기환을 무시했고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박인수의 앞에서 그를 야유하곤 했었다.
  • 그러나 이제 그들은 되려 박기환에게 아부하기 시작했다. 만약 박미주가 명문가에 시집가게 되면 그들에게도 큰 이익이 차려지게 될 것이다.
  • 그리고 재산을 다투는 강력한 라이벌 하나가 없어지게 될 뿐만 아니라 명문가 이 씨 가문과의 인맥으로 가문의 수준 역시 한 단계 올라가게 된다.
  • 박 씨 가문이 곧 이 씨 가문과 혼약을 맺게 된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박미주가 담당하고 있던 큰 프로젝트의 경쟁자들이 줄줄이 퇴출 선언을 했고 누구도 감히 박 씨 가문과 경쟁하려 하지 않았다.
  • 그러니 박기태와 박기주에게는 그야말로 큰 경사였고 박미주가 명문가에 시집을 간다는 사실에 박기태와 박기주는 박미주의 부모님보다 더 기뻐했다.
  • “기환이가 확실히 대견한 딸을 낳았어. 우리 박 씨 가문이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미주에게 달렸어. 하하하.”
  • 칠순이 넘은 박인수도 웃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 이때 박기환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 “조용히들 하세요. 우리 부자 사위가 또 안부를 전하려고 전화를 걸어왔네요.”
  • 발신자 번호를 본 박기환은 웃음 가득한 얼굴로 모두를 향해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고 모두가 조용해진 후에야 그는 전화를 받았다.
  • 그러나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기쁨에 넘쳐 웃음기 가득했던 박기환의 표정은 싹 굳어졌고 그는 휴대폰이 땅에 떨어진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채 바보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 “기환아, 무슨 일이야?”
  • “기환아, 우리 손녀사위가 너에게 대체 뭐라고 한 거냐?”
  • 모두들 박기환의 행동에 어리둥절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 “아버지, 방금 이준혁이 전화를 걸어와서 미주 그 계집애가 오늘 어떤 막돼먹은 놈을 데려와 구청에 가서 혼인 신고를 하고 이 씨 가문에 찾아가 파혼을 하겠다 했대요. 이준혁이 우리 박 씨 가문은 이제… 파산 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라는데요.”
  • 박기환은 방금 전 이준혁이 했던 말을 어렵게 다시 한번 반복했다.
  • “뭐? 박미주 이 계집애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다니!”
  • 박인수는 분노에 휩싸여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기절했다.
  • “아버지!”
  • “할아버지!”
  • “얼른 구급차 불러…”
  • 박 씨 가문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고 20분 후 박인수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
  • 이미 몇 년 전에 박 씨 가문을 떠나 자취하며 혼자 살던 박미주는 휴대폰을 서 씨 저택에 두고 갔던 터라 박 씨 가문이 그녀의 일로 이미 엉망진창이 된 것을 전혀 몰랐다.
  • “펑펑펑!”
  • 밤 10시쯤 박미주의 자취방에서 큰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녀가 문을 열자 진천하는 문 앞에 멀뚱멀뚱 선 채 손에 캐리어를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