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천하랑 같이 먼저 짐을 옮기고 계세요. 저 먼저 집에 가서 방을 좀 치우고 있을게요.”
박미주는 서재에서 잠을 자는 진천하를 보고 부모님이 의심할까 걱정돼 방을 치우겠다는 이유로 먼저 집으로 돌아가서 그의 짐을 제 방으로 옮기기로 생각했다.
“그래. 몸조심하면서 가.”
그렇게 서로 흩어지고 반 시간이 지난 시점에 진천하가 짐을 차에 싣고 있던 그때, 박기환은 주영란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
“뭐라고? 은행에서 매를 맞았어? 당신 지금 어느 은행이야? 우리 지금 당장 갈게.”
전화 너머에서 주영란의 훌쩍이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깜짝 놀란 박기환은 얼른 진천하와 함께 은행으로 향했다.
은행에 도착한 뒤 진천하는 은행 팀장의 사무실을 발로 뻥하고 세차게 걷어찼다. 그러자 육중한 문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졌다.
“당신들 누구야?”
은행 팀장과 경비원이 놀란 얼굴을 했다. 그중 먼저 정신을 차린 은행 팀장이 갑자기 쳐들어온 두 사람을 향해 큰소리로 호통쳤다.
문이 부서지면서 낸 굉음에 홀에 있던 손님들과 은행 직원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일제히 같은 쪽을 향했다. 그들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사무실 주위에 천천히 몰려들었다.
진천하와 박기환은 은행 팀장을 무시한 채 빠른 걸음으로 주영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부어오른 것을 본 두 사람은 분노를 터트렸다.
“장모님, 어떤 새끼가 장모님을 이렇게 만들어놨어요?”
진천하는 고개를 돌려 어둠이 드리운 얼굴로 은행 팀장과 경비원을 쳐다봤다.
“저리 비켜. 누가 네 장모님이야! 너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녔길래 은행 사람들이 네 카드를 보자마자 날 이리로 끌고 와서 혹독하게 고문하는 거야?”
주영란은 진천하의 얼굴을 향해 삿대질을 날리며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녀의 말을 듣고도 어리둥절한 진천하와 박기환은 다시 고개를 돌려 은행 팀장에게 시선을 던졌다. 두 사람이 뭐라고 묻기도 전에 은행 팀장이 먼저 알아서 시비를 걸어왔다.
“네가 바로 미러 퍼플 카드를 훔치고 이 사람한테 현금을 인출해오라 시킨 정신 나간 새끼야? 경비원, 저 사람을 잡아다가 당장 경찰서로 끌고 가.”
주영란의 말을 통해 눈앞의 젊은 남성이 바로 카드를 훔친 도둑임을 확인한 은행 팀장이 경비원에게 진천하를 잡으라고 지시했다.
미간을 찌푸린 진천하는 손을 뻗어 경비원을 구석자리에 밀어 넣고는 은행 팀장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거 제 카드인데, 훔치긴 뭘 훔쳤다는 겁니까?”
진천하는 침착을 잃지 않으며 은행 팀장에게 되물었다.
“흥.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우기기는. 너 이 미러 퍼플 카드가 어떤 카드인지 알아? 이 카드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에서 발행한 한정 카드로 메인이랑 서브로 나뉘는데, 서브 카드만 해도 최저한도가 자그마치 2천억이야, 2천억. 그리고 메인 카드는 한도가 아예 없어. 전 세계에 딱 99장만 있는 이 미러 퍼플 카드는 거의 대부분을 각 나라의 왕실들이 갖고 있지. 지금 내 손에 들려있는 이 카드가 바로 그 미러 퍼플 카드의 서브 카드인데 안에 지금 잔액이 무려 1억 달러가 들어있어. 자, 그럼 이제 질문한다. 넌 어느 나라의 왕자이지?”
은행 팀장은 냉소와 함께 미러 퍼플 카드의 이력에 대해 쭈욱 설명하더니 마지막에는 카드로 진천하의 뺨까지 찰싹 때렸다.
“헉!”
은행 직원은 물론이고 미러 퍼플 카드에 대한 정보를 들은 다른 손님들도 모두 헛숨을 들이켰다. 그중에서도 특히 박기환과 주영란이 절망적인 눈빛을 했다.
주영란은 그제야 왜 은행에서 이토록 난리를 피웠는지 이해했다. 이 미러 퍼플 카드의 주인은 보통 신분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진천하가 어디에서 이 카드를 훔쳐 왔는지 몰랐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자기 딸인 박미주가 저 범죄자랑 혼인신고를 이미 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주영란은 딸마저 이번 일에 연루될까 걱정되었다.
“안되겠어요, 여보. 집에 가자마자 미주한테 저 범죄자랑 당장 이혼해라고 해야겠어요. 아기도 무조건 지워버리고. 아니면 저놈 때문에 미주 인생이 완전히 망가질 것 같아요.”
주영란은 얼굴의 고통을 간신히 참으며 박기환에게 작게 말했다. 박기환도 두렵기는 마찬가지라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전 그 어떤 나라의 왕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미러 퍼플 카드가 제 것이 아니라는 반증도 없죠. 정 못 믿겠으면 제가 말한 게 진짜인지, 아닌지 가서 컴퓨터로 찾아보면 될 거 아닙니까. 비밀번호는 xxxxxx, 지금 당장 확인해 보세요.”
진천하는 주민등록증과 함께 미러 퍼플 메인카드도 지갑에서 꺼내 은행 팀장의 면전에 대고 던졌다.
“아직도 입만 살…”
땅에 떨어진 주민등록증과 또 다른 미러 퍼플 카드를 본 은행 팀장은 계속 호통치려던 것을 멈추고 입을 닫아버렸다. 당당한 표정으로 태연하게 서있는 진천하를 보며 은행 팀장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으며 불길한 생각이 드는 걸 느꼈다.
카드와 주민등록증을 주운 은행 팀장은 제자리로 돌아와 은행 시스템에 등록하여 미러 퍼플의 자료와 제 손에 들린 주민등록증 번호를 대조해 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3분쯤 지났을까, 은행 팀장은 갑자기 의자 위에서 놀라 떨어졌다.
“용… 용서해 주세요, 진천하 님. 제가 감히 이 카드가 진천하 님 카드인 줄 모르고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제가 정말 죽을죄를 지었어요.”
은행 팀장은 헐레벌떡 진천하의 앞으로 달려가 털썩하고 바닥에 무릎 꿇고 앉은 뒤 고개를 바닥에 조아리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눈앞의 젊은 청년이 어찌하여 이 어린 나이에 난다 긴다 하는 재벌들도 신청할 자격 없는 미러 퍼플 카드를 갖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난데없이 벌어진 장면에 주위에 몰려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문짝이 떨어져 나간 문가에서 구경하고 있던 은행 직원들 또한 하나같이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번듯한 은행의 한 팀장이 개처럼 한 청년 앞에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리면서 비는 모습이란 실로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박기환과 주영란 또한 갑자기 벌어진 장면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신분과 지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저 미러 퍼플 카드가 정말 진천하 것이었다니. 그는 허풍을 친 것이 아닌, 정말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말했던 것이었다. 허나 두 사람에게는 아직 의문이 남아있었다. 만약 진천하에게 돈이 그렇게 많았다면 왜 고작 6천만 원의 예물 비용을 내지 못해 서 씨 가문에서 쫓겨나게 된 것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박기환과 주영란은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켜졌다.
“이제 제 카드인 게 확인되었으니 다른 걸 한번 따져봅시다. 누가 제 장모님을 저렇게 때려놨죠?”
진천하는 은행 팀장과 경비원을 훑어보았다.
“저, 저기 사장님. 전… 전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저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진천하의 신분이 확인된 것도 다 보고, 또 바닥에 무릎을 꿇은 은행 팀장도 한번 쳐다본 경비원은 구석에서 걸어 나와 털썩하고 무릎을 꿇어버렸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제 장모님한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가 없습니다. 누가 시켜서 그랬든, 제 의지로 그랬든 잘못된 행동을 했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죠. 아까 어떤 손으로 때렸죠? 그 손 잘라냅시다. 그리고 은행 팀장님은 혀를 자르면 되겠네요.”
말을 마친 뒤 진천하는 아직까지도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고 있는 박기환과 주영란을 모시고 사무실을 떠났다. 세 사람이 문밖으로 사라지자마자 사람들 무리 속에서 손에 칼을 든 청룡이 불쑥 튀어나왔다.
“허억…”
“꺄악! 경비원 손바닥이 잘렸어.”
“은행 팀장님 혀도 잘렸어! 무서워.”
진천하와 박기환, 그리고 주영란이 은행을 막 나서려던 그때 그들의 뒤에서 구경꾼들과 은행 직원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중 비위가 약한 몇몇은 은행에서 뛰어나와 바닥에 대고 연신 토악질을 해댔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박기환과 주영란은 몸을 흠칫 떨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려 진천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장모님, 장모님께 감히 폭력을 휘두른 자들입니다. 목숨을 살려둔 것만 해도 많이 봐준 거예요. 이제 그만 돌아가시죠. 미주가 집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