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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수배범

  • “손님, 손님께서 지금 다른 사람의 카드 도용으로 의심받고 있습니다. 저희랑 같이 안쪽 사무실로 자리를 옮기셔서 조사에 협조 부탁드립니다.”
  • 주영란이 상황 파악을 마치기도 전에 경비원 두 명이 양쪽에서 그녀를 둘러싸고 사무실로 강제 안내했다.
  •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이거 놔요!”
  • 순간 넋이 나간 주영란이 어쩔 줄을 몰라 큰소리를 치자 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녀에게 시선을 던져왔다.
  • 주영란의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택시 기사 또한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졌다. 경비원들이 주영란을 끌고 가는 모습이 마치 수배범을 체포하고 있는 모습 같았다. 그러고 보니 택시 기사는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인신매매 수배범이라는 한 중년 여성의 사진을 봤던 게 생각났다. 나이도 그렇고, 택시 기사는 보면 볼수록 그 수배범의 체형이 눈앞의 중년 여성이랑 비슷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 괜한 일에 휘말리기 싫었던 택시 기사는 만 3천 원의 택시비를 과감히 포기하고 뛰어서 은행을 빠져나왔다.
  • 경비원이 성공적으로 주영란을 제압하자 은행 직원은 얼른 팀장에게 보고하러 달려갔다. 신분과 지위를 상징하는 미러 퍼플 카드의 손실을 성공적으로 막아 그 카드의 주인한테 눈도장이라도 찍을 수 있다면 그녀의 인생이 꽃 피는 건 순식간일 것이다. 은행 직원의 기대 가득한 발걸음이 경쾌했다.
  • 이 은행 지점의 팀장은 40대 대머리 남자였다. 은행 직원의 보고를 듣고 미러 퍼플 카드를 확인한 팀장 또한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런 카드를 소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재벌이라는 단어로 간단히 일축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일 것이었다. 엄청 존귀한 사람만이 이 미러 퍼플 카드를 소유할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 현재 팀장의 생각은 은행 직원하고 똑같았다. 그 또한 미러 퍼플 카드를 안전하게 보호했다는 명의로 이 카드 주인의 눈에 들기라도 한다면 엄청난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연봉 인상은 따놓은 당상일 게 분명했다.
  • “대충 상황은 이제 알겠으니까 먼저 가 보세요. 이 사건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 주영란이 끌려간 사무실 문 앞까지 걸어간 팀장이 옆에서 같이 따라오던 은행 직원에게 말했다. 그러자 은행 직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하지만 팀장님, 저…”
  • 은행 직원은 조금이라도 기회를 엿보려 했으나 팀장에게 바로 커트를 당했다. 아무래도 그녀에게 조금의 콩고물도 떨어지는 게 없이 팀장 혼자 공로를 꿀꺽하려는 속셈인 모양이었다.
  • “하지만이고 뭐고 할 것 없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다시 부를 테니까 이만 가 보세요.”
  • 말을 마친 팀장이 쾅 하고 사무실 문을 닫아버렸다. 은행 직원은 코앞에 날아온 기회를 허무하게 놓쳐버리고 말았다.
  • “흥, 혼자 그렇게 다 해처먹다가 언젠가 체할 거야!”
  • 은행 직원은 달갑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사무실에 들어선 팀장은 50대로 보이는 한 중년 여성을 소파에 강제로 내리눌러 앉히고 있는 두 경비원을 발견했다. 중년 여성의 반항이 만만치 않았다.
  • “당신들 지금 이거 불법 감금이야. 지금 당장 여기 은행 팀장 불러와! 너희들 싹 다 고소해버릴 테니까.”
  • 주영란이 씩씩대며 엄포를 놓았다.
  •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가 바로 이 은행 지점의 팀장입니다. 긴말할 것 없이 물어보죠. 이 카드 어디에서 난 겁니까?”
  • 팀장이 주영란의 앞으로 다가간 뒤 미러 퍼플 카드를 보여주며 냉랭하게 물어왔다.
  • 이거 진천하 그놈 카드잖아. 이게 왜 여기 있지? 은행 팀장이라는 사람의 반응을 보아하니 주영란은 저 카드가 보통 카드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무슨 범죄에 연루된 장물은 아니겠지?
  • 아무리 생각해도 카드의 정체가 이상한 것 같다고 판단한 주영란은 모르쇠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그 카드 제 거 아니에요.”
  • 주영란은 은행 팀장의 눈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며 시선을 피했다.
  • “흥, 시치미를 잡아떼시겠다? 그럼 이거 한번 보시죠.”
  • 은행 팀장은 상대방이 제 카드가 아니라고 이상할 정도로 강경하게 부인하면서 시선까지 흔들리자 눈앞의 여성이 카드를 훔쳤음을 더 확신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당장 홀의 CCTV 영상을 찾아 재생했다. 영상에는 주영란이 은행 직원에게 미러 퍼플 카드를 건네는 장면이 담겨있었다.
  • 은행 팀장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더니 냉소를 지어 보였다.
  • “이제 더 이상 할 말 없으시죠? 손님 뒤에 서있는 남자분은 같은 편인가요?”
  • 주영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 “전 정말 저 카드가 왜 제 가방에 있었는지 몰라요. 저 남자가 누군지도 모르고요. 저랑은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 주영란이 여전히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자 제 앞날을 고려한 은행 팀장이 작정하고 두 경비원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 “제대로 대답할 생각이 들 때까지 저 사람 때려.”
  • 은행 팀장의 지시에 두 경비원은 서로를 한 번씩 쳐다볼 뿐 곧바로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 사람을 때리는 건 위법행위였다. 그러나 상사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그들은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었다.
  •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질 테니까 때리라고!”
  • 두 사람이 우려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챈 은행 팀장이 재차 말했다.
  • “죄송합니다, 팀장님. 폭력은 위법행위입니다. 거기다가 여성분을 때리라뇨. 전 그럴 수 없습니다.”
  • 그중 나이가 젊은 경비원이 고집스레 제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제 어머니와 연배가 비슷한 중년 여성한테 차마 손을 댈 수 없었다.
  • 두 경비원이 움직일 생각을 않자 은행 팀장이 노발대발하며 소리쳤다.
  • “쓸모없는 새끼들, 때리지 않을 거면 짐 챙기고 당장 꺼져. 내일부터 나오지 않아도 돼.”
  • “그깟 일자리가 뭐 아쉬울 줄 알아? 다 집어치워!”
  • 젊은 경비원 또한 똑같이 성질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와 반대로 나이가 조금 더 많은 경비원은 나갈지 말지 갈피를 못 잡으며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 “넌 왜 아직도 안 꺼져?”
  • 은행 팀장이 그 경비원을 향해 호통쳤다.
  • “저… 때릴게요. 팀장님 말대로 하겠습니다.”
  • 나이 많은 경비원은 말을 마치자마자 주영란의 얼굴을 향해 힘껏 손바닥을 날렸다. 아까 자리를 박차고 나간 제 동료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싱글이라 경제 부담이 적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에게는 혼자 먹여살려야 될 아내와 자식이 있었다. 지금 이 일자리를 잃는다면 그의 가족은 모두 쫄쫄 굶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 경비원이 작정하고 때린 따귀에 힘이 얼마나 가득 실렸는지 주영란의 오른쪽 뺨이 순식간에 빨갛게 부어올랐다.
  • “당신 지금 나 쳤어? 딱 기다려. 나 너희들 고소해버릴 거야!”
  • 얼얼한 얼굴을 감싼 주영란은 반쯤 정신이 나가있었다. 진짜로 자신한테 매를 들 줄 몰랐던 그녀는 무기력해진 마음에 고함소리로 제 두려운 속마음을 감췄다.
  • “자, 말하세요. 이 카드 어디에서 난 거죠?”
  • 은행 팀장은 주영란의 위협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은행 팀장의 음산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 주영란은 은행 팀장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다시 한번 진천하가 위범행위를 저질렀음을 확신했다. 저 카드는 장물임에 분명했다.
  • 딸이 이번 일에 말려드는 걸 피하기 위해 주영란은 아픔을 참으며 억지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 “고분고분 불지 않겠다 이건가요? 말하고 싶은 생각 들 때까지 있는 힘껏 다시 때려.”
  • 은행 팀장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창창한 앞날을 생각해서라도 그는 주영란에게서 사건의 진상을 속속들이 알아내지 않는 한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 악에 받친 지시에 경비원 또한 기를 쓰며 주영란의 얼굴을 향해 끊임없이 따귀를 날렸다.
  • “윽… 말할… 말할게요. 말하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만 때려요. 저 카드는 다른 사람이 저한테 준 거예요. 지금 그 사람한테 전화해서 오라고 할게요.”
  • 주영란은 한낱 평범한 가정주부에 불과했다. 이런 고문을 당해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경비원에게 뺨을 열몇 대 맞더니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주영란은 휴대폰을 꺼내들어 전화를 걸었다.
  • “흑, 흐흑… 여보, 나 은행에서 사람한테 맞았어. 얼른 진천하 그 수배범 새끼 데리고 와줘.”
  • 진천하의 번호를 몰랐던 주영란은 박기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곁에서 그녀의 통화를 듣고 있었던 은행 팀장은 남편에게 수배범을 데리고 오라고 하던 주영란의 말에 전에 했던 제 짐작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 망명 수배범만이 감히 미러 퍼플 카드를 도용하는 무모한 짓을 저지를 것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