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손님께서 지금 다른 사람의 카드 도용으로 의심받고 있습니다. 저희랑 같이 안쪽 사무실로 자리를 옮기셔서 조사에 협조 부탁드립니다.”
주영란이 상황 파악을 마치기도 전에 경비원 두 명이 양쪽에서 그녀를 둘러싸고 사무실로 강제 안내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이거 놔요!”
순간 넋이 나간 주영란이 어쩔 줄을 몰라 큰소리를 치자 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녀에게 시선을 던져왔다.
주영란의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택시 기사 또한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졌다. 경비원들이 주영란을 끌고 가는 모습이 마치 수배범을 체포하고 있는 모습 같았다. 그러고 보니 택시 기사는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인신매매 수배범이라는 한 중년 여성의 사진을 봤던 게 생각났다. 나이도 그렇고, 택시 기사는 보면 볼수록 그 수배범의 체형이 눈앞의 중년 여성이랑 비슷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괜한 일에 휘말리기 싫었던 택시 기사는 만 3천 원의 택시비를 과감히 포기하고 뛰어서 은행을 빠져나왔다.
경비원이 성공적으로 주영란을 제압하자 은행 직원은 얼른 팀장에게 보고하러 달려갔다. 신분과 지위를 상징하는 미러 퍼플 카드의 손실을 성공적으로 막아 그 카드의 주인한테 눈도장이라도 찍을 수 있다면 그녀의 인생이 꽃 피는 건 순식간일 것이다. 은행 직원의 기대 가득한 발걸음이 경쾌했다.
이 은행 지점의 팀장은 40대 대머리 남자였다. 은행 직원의 보고를 듣고 미러 퍼플 카드를 확인한 팀장 또한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런 카드를 소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재벌이라는 단어로 간단히 일축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일 것이었다. 엄청 존귀한 사람만이 이 미러 퍼플 카드를 소유할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팀장의 생각은 은행 직원하고 똑같았다. 그 또한 미러 퍼플 카드를 안전하게 보호했다는 명의로 이 카드 주인의 눈에 들기라도 한다면 엄청난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연봉 인상은 따놓은 당상일 게 분명했다.
“대충 상황은 이제 알겠으니까 먼저 가 보세요. 이 사건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주영란이 끌려간 사무실 문 앞까지 걸어간 팀장이 옆에서 같이 따라오던 은행 직원에게 말했다. 그러자 은행 직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팀장님, 저…”
은행 직원은 조금이라도 기회를 엿보려 했으나 팀장에게 바로 커트를 당했다. 아무래도 그녀에게 조금의 콩고물도 떨어지는 게 없이 팀장 혼자 공로를 꿀꺽하려는 속셈인 모양이었다.
“하지만이고 뭐고 할 것 없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다시 부를 테니까 이만 가 보세요.”
말을 마친 팀장이 쾅 하고 사무실 문을 닫아버렸다. 은행 직원은 코앞에 날아온 기회를 허무하게 놓쳐버리고 말았다.
“흥, 혼자 그렇게 다 해처먹다가 언젠가 체할 거야!”
은행 직원은 달갑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에 들어선 팀장은 50대로 보이는 한 중년 여성을 소파에 강제로 내리눌러 앉히고 있는 두 경비원을 발견했다. 중년 여성의 반항이 만만치 않았다.
“당신들 지금 이거 불법 감금이야. 지금 당장 여기 은행 팀장 불러와! 너희들 싹 다 고소해버릴 테니까.”
주영란이 씩씩대며 엄포를 놓았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가 바로 이 은행 지점의 팀장입니다. 긴말할 것 없이 물어보죠. 이 카드 어디에서 난 겁니까?”
팀장이 주영란의 앞으로 다가간 뒤 미러 퍼플 카드를 보여주며 냉랭하게 물어왔다.
이거 진천하 그놈 카드잖아. 이게 왜 여기 있지? 은행 팀장이라는 사람의 반응을 보아하니 주영란은 저 카드가 보통 카드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무슨 범죄에 연루된 장물은 아니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카드의 정체가 이상한 것 같다고 판단한 주영란은 모르쇠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그 카드 제 거 아니에요.”
주영란은 은행 팀장의 눈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며 시선을 피했다.
“흥, 시치미를 잡아떼시겠다? 그럼 이거 한번 보시죠.”
은행 팀장은 상대방이 제 카드가 아니라고 이상할 정도로 강경하게 부인하면서 시선까지 흔들리자 눈앞의 여성이 카드를 훔쳤음을 더 확신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당장 홀의 CCTV 영상을 찾아 재생했다. 영상에는 주영란이 은행 직원에게 미러 퍼플 카드를 건네는 장면이 담겨있었다.
은행 팀장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더니 냉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더 이상 할 말 없으시죠? 손님 뒤에 서있는 남자분은 같은 편인가요?”
주영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전 정말 저 카드가 왜 제 가방에 있었는지 몰라요. 저 남자가 누군지도 모르고요. 저랑은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주영란이 여전히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자 제 앞날을 고려한 은행 팀장이 작정하고 두 경비원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제대로 대답할 생각이 들 때까지 저 사람 때려.”
은행 팀장의 지시에 두 경비원은 서로를 한 번씩 쳐다볼 뿐 곧바로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 사람을 때리는 건 위법행위였다. 그러나 상사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그들은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었다.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질 테니까 때리라고!”
두 사람이 우려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챈 은행 팀장이 재차 말했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폭력은 위법행위입니다. 거기다가 여성분을 때리라뇨. 전 그럴 수 없습니다.”
그중 나이가 젊은 경비원이 고집스레 제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제 어머니와 연배가 비슷한 중년 여성한테 차마 손을 댈 수 없었다.
두 경비원이 움직일 생각을 않자 은행 팀장이 노발대발하며 소리쳤다.
“쓸모없는 새끼들, 때리지 않을 거면 짐 챙기고 당장 꺼져. 내일부터 나오지 않아도 돼.”
“그깟 일자리가 뭐 아쉬울 줄 알아? 다 집어치워!”
젊은 경비원 또한 똑같이 성질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와 반대로 나이가 조금 더 많은 경비원은 나갈지 말지 갈피를 못 잡으며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넌 왜 아직도 안 꺼져?”
은행 팀장이 그 경비원을 향해 호통쳤다.
“저… 때릴게요. 팀장님 말대로 하겠습니다.”
나이 많은 경비원은 말을 마치자마자 주영란의 얼굴을 향해 힘껏 손바닥을 날렸다. 아까 자리를 박차고 나간 제 동료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싱글이라 경제 부담이 적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에게는 혼자 먹여살려야 될 아내와 자식이 있었다. 지금 이 일자리를 잃는다면 그의 가족은 모두 쫄쫄 굶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경비원이 작정하고 때린 따귀에 힘이 얼마나 가득 실렸는지 주영란의 오른쪽 뺨이 순식간에 빨갛게 부어올랐다.
“당신 지금 나 쳤어? 딱 기다려. 나 너희들 고소해버릴 거야!”
얼얼한 얼굴을 감싼 주영란은 반쯤 정신이 나가있었다. 진짜로 자신한테 매를 들 줄 몰랐던 그녀는 무기력해진 마음에 고함소리로 제 두려운 속마음을 감췄다.
“자, 말하세요. 이 카드 어디에서 난 거죠?”
은행 팀장은 주영란의 위협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은행 팀장의 음산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주영란은 은행 팀장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다시 한번 진천하가 위범행위를 저질렀음을 확신했다. 저 카드는 장물임에 분명했다.
딸이 이번 일에 말려드는 걸 피하기 위해 주영란은 아픔을 참으며 억지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고분고분 불지 않겠다 이건가요? 말하고 싶은 생각 들 때까지 있는 힘껏 다시 때려.”
은행 팀장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창창한 앞날을 생각해서라도 그는 주영란에게서 사건의 진상을 속속들이 알아내지 않는 한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악에 받친 지시에 경비원 또한 기를 쓰며 주영란의 얼굴을 향해 끊임없이 따귀를 날렸다.
“윽… 말할… 말할게요. 말하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만 때려요. 저 카드는 다른 사람이 저한테 준 거예요. 지금 그 사람한테 전화해서 오라고 할게요.”
주영란은 한낱 평범한 가정주부에 불과했다. 이런 고문을 당해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경비원에게 뺨을 열몇 대 맞더니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주영란은 휴대폰을 꺼내들어 전화를 걸었다.
“흑, 흐흑… 여보, 나 은행에서 사람한테 맞았어. 얼른 진천하 그 수배범 새끼 데리고 와줘.”
진천하의 번호를 몰랐던 주영란은 박기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곁에서 그녀의 통화를 듣고 있었던 은행 팀장은 남편에게 수배범을 데리고 오라고 하던 주영란의 말에 전에 했던 제 짐작이 맞았음을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