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11화 신분을 밝히다

  • “자, 천하 동생. 이 형님이 주는 술을 한잔 받게나.”
  • 식사가 준비되자마자 박기환은 한시도 지체하기 싫다는 듯 진천하의 잔을 채우고는 동생, 동생 하면서 첫 잔을 바로 원샷 해버렸다. 그의 이상 행동에 주영란과 박미주 모녀는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 두 사람이 식사를 준비하러 주방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박기환은 진천하를 원수 보듯 차가운 태도를 고집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식사를 준비하는 그 짧은 사이에 마치 신혼여행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두 사람의 사이가 저렇게 좋아질 수 있는지, 박미주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특히 진천하를 바라보는 박기환의 눈빛이 우상을 보듯 반짝반짝 빛났다.
  • 주영란은 더는 보고 있기 힘들었는지 젓가락을 탁하고 밥상에 세게 내려놓았다. 그는 박기환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 “여보, 당신 지금 제정신이에요? 그렇게 동생, 동생거리면 관계가 뒤죽박죽 엉망이 되잖아요!”
  • 박미주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주영란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 술이 들어가면 간이 커진다고, 이미 두 잔을 스트레이트로 꺾어 버린 박기환이 아랑곳하지 않고 되받아쳤다.
  • “당신이 뭘 알아. 이건 별개의 일이라고. 자, 천하 동생. 여편네들은 상관 말고 우리끼리 재밌게 마셔보자고.”
  • 열정적으로 술을 권해오는 박기환을 보며 진천하는 염치 불고하고 같이 잔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둘만 있는 듯 서로 잔을 기울이던 두 사람은 한 시간 만에 무려 소주 두 병을 비워버렸다.
  • “자, 동생. 한 잔 더 받…”
  • 눈이 풀린 박기환은 술잔을 들더니 더는 버티지 못하고 끝내 밥상에 털썩하고 엎드려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와 반대로 진천하는 아주 멀쩡했다.
  • “으이그, 쯧쯧. 술을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그러게 웬 센 척이야. 미주야, 여기 정리 좀 부탁할게. 난 네 아빠를 방으로 데리고 가야겠어.”
  • 박기환을 부축한 주영란이 박미주가 미리 준비해둔 방으로 함께 들어가자 남겨진 진천하와 박미주가 나란히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오늘은 나랑 같은 방에서 자.”
  • 부모님이 자리를 비워서야 박미주는 진천하에게 같이 자야 된다는 소식을 알릴 수 있었다. 무심한 듯 얘기를 빠르게 마친 박미주의 얼굴이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 예쁘다. 진천하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했다.
  • 박미주는 주영란이 두 사람의 사이를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갑자기 그녀가 들이닥쳤을 때를 대비해 진천하를 바닥에서 자게 할 수 없었다. 설거지까지 깨끗하게 마치고 방으로 들어온 박미주는 침대 중간에 이불로 벽을 만들어 공간을 둘로 나누었다.
  • 성인 남녀가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그것도 술을 잔뜩 마신 진천하가 곁에 누워있다고 생각하니 박미주는 심장이 쿵! 쿵! 가속도로 뛰는 걸 느끼며 잔뜩 긴장했다. 그녀는 등을 계속 켜놓은 채 잠자기를 거부했다. 박미주는 다른 이불로 제 몸을 꽁꽁 둘러싼 후 머리만 이불 밖으로 내놓았다.
  • “너 밥 먹기 전에 우리 아빠랑 무슨 얘기 했어? 왜 아빠가 갑자기 너한테 태도를 달리하는데?”
  • 어색하게 30분이라는 시간을 누워있는 동안 진천하가 아무런 이상행동도 하지 않음을 확인한 뒤에야 박미주는 마음이 놓이는지 고개를 돌려 궁금했던 걸 물었다.
  • “별거 없었어. 그냥 예전에 군대에 있었다고만 잠깐 얘기드렸어.”
  • 진천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 박미주는 그제야 이해되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 “어쩐지, 역시 그랬구나. 우리 아빠가 군인을 진짜 존경하거든. 특히 그 천하 군신을 제일 좋아해. 아참, 그러고 보니 너도 예전에 참전했었다고 들었는데, 혹시 전설 속의 그 천하 군신을 본 적 있어?”
  • 천하 군신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박미주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딱 봐도 그녀 또한 천하 군신의 팬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 “당연히 봤지.”
  • 진천하가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박미주도 자신의 팬이었다니. 그는 지금 제 신분을 밝힌다면 박미주가 오늘 밤 침대 중간에 놓은 이불을 치울지, 안 치울지가 궁금했다.
  • “천하 군신을 봤다고? 그분 어떻게 생겼는데? 기골이 엄청 장대하셔? 칼질 한 방이면 백만 적수의 목을 베어버리고 막 그래?”
  • 흥분한 박미주는 상체를 벌떡 일으키고 앉아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천하 군신의 사진을 한 장 꼭 얻고 싶었으나 천하 군신은 어찌나 신비한지 한 번도 맨얼굴로 사람들 앞에 나선 적이 없었다고 했다. 전장에 나서더라도 그는 항상 나비 가면을 쓰고 싸움을 했었다.
  • “칼질 한 방에 백만 적진의 목을 베었다고? 내가 그렇게 대단했었나? 나는 왜 몰랐지?”
  • 진천하는 멈칫하더니 얼떨떨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했다.
  • 제대로 듣지 못한 박미주가 의문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 “방금 뭐라고 그랬어?”
  • “내가 바로 천하 군신이라고. 내가 그렇게 세 보여?”
  • 진천하는 눈을 깜빡이며 박미주를 바라봤다. 그는 박기환처럼 깜짝 놀랄 그녀의 모습을 속으로 상상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다르게 박미주는 노기 가득한 눈빛으로 불같이 화를 벌컥 냈다.
  • “너 혹시 아까 우리 아빠한테도 네가 그 전설의 천하 군신이라고 그랬어?”
  • 제가 생각한 반응과 전혀 다른 박미주의 반응에 진천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은 솔직하게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는 쪽을 택했다.
  • “맞아. 아버님께서 내 신분을 물어보기에 그냥 솔직하게 알려드렸어.”
  • 박미주는 두 눈을 크게 부릅뜨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 “너… 너 대체 뭐라고 말했길래 그런 새빨간 거짓말로 우리 아빠를 감쪽같이 속인 거야?”
  • “새빨간 거짓말이라니, 내가 한 말 중에서 어디가 거짓말처럼 들렸는데?”
  • 이제 보니 박미주는 제가 거짓말을 한 줄로만 아는 모양이었다. 진천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 “잠깐, 네 이름도 천하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군신이란 단어를 모욕하지 말아줄래?”
  • 박미주는 경멸 가득한 얼굴로 진천하를 쏘아보며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 “그냥 솔직하게 천하 군신을 본 적이 없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해. 워낙 천하 군신께서 신비주의였잖아. 대신 천하 군신을 사칭하는 것만은 용서할 수 없어. 그건 역겨운 짓이라고!”
  • 박미주는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가슴을 크게 들썩였다. 침대에 확 드러누운 박미주는 이불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 더 이상 진천하의 헛소리를 듣기 싫다는 뜻을 대놓고 표현했다.
  • 그러니까 아빠가 돈도 쥐여주고 호형호제하며 태도를 달리하셨지. 진천하가 천하 군신을 사칭해서 자신의 아빠를 기만했다고 생각하니 박미주는 그에 대한 호감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걸 느꼈다.
  • 천하 군신은 그녀 마음속의 영웅이자 우상이었으며, 또한 꿈속의 연인이었다. 지금 제 옆에 누워있는, 할 줄 아는 거라곤 여자 곁이나 맴돌기나 하는 진천하와는 닮은 점이 일도 없는, 그야말로 천지차이가 나는 다른 사람이었다.
  • “아니…”
  • 진천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뭘 했다고 군신이라는 이름을 모욕했다고 그러는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 박미주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이불을 뒤집어쓰고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자 진천하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진실을 말해도 믿어주지 않는 상황에 그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 박미주는 오래도록 씩씩대며 뒤척이다 한밤중에서야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최근 이틀 동안 제대로 휴식하지 못한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새벽 즈음에 몸을 뒤집더니 진천하를 평소에 안고 잠들던 인형이라 생각하고 그를 품안 가득 그러안았다.
  • 그렇게 아침이 되고 날이 밝아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집안에 비명소리가 갑자기 울려 퍼졌다.
  • “꺄악! 진천하 이 나쁜 놈아!”
  • 잠에서 깨어난 박미주는 상체를 드러낸 채 그녀의 침대에서 자고 있는 진천하를 발견했다. 그녀의 옷 또한 잔뜩 흐트러져 있었는데 상의 잠옷의 단추가 두, 세 개 풀어져 있는 것이 박미주의 우유 빛깔 속살을 그대로 내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바로 그녀가 진천하의 가슴팍에 기댄 채 글쎄… 글쎄 꿀잠을 잤다는 사실이었다.
  • “너… 너 옷은 왜 벗었어?”
  • 중간에 놔둔 이불을 넘어간 게 본인임을 자각한 박미주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로 진천하를 가리키며 한참만에야 겨우 한마디를 뱉어냈다.
  • “어제 아버님이랑 술 한잔했더니 더워서 벗었어.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새벽에 너 혼자서 넘어와서 나 안은 거야. 그리고 소리를 그렇게 크게 지르면 어떡해. 장인어른이랑 장모님이 오해하면 어쩌려고?”
  • 진천하가 자신은 죄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그는 속으로 기쁨의 환호를 지르고 있었다.
  • 진천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영란이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