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가 준비되자마자 박기환은 한시도 지체하기 싫다는 듯 진천하의 잔을 채우고는 동생, 동생 하면서 첫 잔을 바로 원샷 해버렸다. 그의 이상 행동에 주영란과 박미주 모녀는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이 식사를 준비하러 주방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박기환은 진천하를 원수 보듯 차가운 태도를 고집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식사를 준비하는 그 짧은 사이에 마치 신혼여행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두 사람의 사이가 저렇게 좋아질 수 있는지, 박미주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특히 진천하를 바라보는 박기환의 눈빛이 우상을 보듯 반짝반짝 빛났다.
주영란은 더는 보고 있기 힘들었는지 젓가락을 탁하고 밥상에 세게 내려놓았다. 그는 박기환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여보, 당신 지금 제정신이에요? 그렇게 동생, 동생거리면 관계가 뒤죽박죽 엉망이 되잖아요!”
박미주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주영란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술이 들어가면 간이 커진다고, 이미 두 잔을 스트레이트로 꺾어 버린 박기환이 아랑곳하지 않고 되받아쳤다.
“당신이 뭘 알아. 이건 별개의 일이라고. 자, 천하 동생. 여편네들은 상관 말고 우리끼리 재밌게 마셔보자고.”
열정적으로 술을 권해오는 박기환을 보며 진천하는 염치 불고하고 같이 잔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둘만 있는 듯 서로 잔을 기울이던 두 사람은 한 시간 만에 무려 소주 두 병을 비워버렸다.
“자, 동생. 한 잔 더 받…”
눈이 풀린 박기환은 술잔을 들더니 더는 버티지 못하고 끝내 밥상에 털썩하고 엎드려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와 반대로 진천하는 아주 멀쩡했다.
“으이그, 쯧쯧. 술을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그러게 웬 센 척이야. 미주야, 여기 정리 좀 부탁할게. 난 네 아빠를 방으로 데리고 가야겠어.”
박기환을 부축한 주영란이 박미주가 미리 준비해둔 방으로 함께 들어가자 남겨진 진천하와 박미주가 나란히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나랑 같은 방에서 자.”
부모님이 자리를 비워서야 박미주는 진천하에게 같이 자야 된다는 소식을 알릴 수 있었다. 무심한 듯 얘기를 빠르게 마친 박미주의 얼굴이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예쁘다. 진천하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했다.
박미주는 주영란이 두 사람의 사이를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갑자기 그녀가 들이닥쳤을 때를 대비해 진천하를 바닥에서 자게 할 수 없었다. 설거지까지 깨끗하게 마치고 방으로 들어온 박미주는 침대 중간에 이불로 벽을 만들어 공간을 둘로 나누었다.
성인 남녀가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그것도 술을 잔뜩 마신 진천하가 곁에 누워있다고 생각하니 박미주는 심장이 쿵! 쿵! 가속도로 뛰는 걸 느끼며 잔뜩 긴장했다. 그녀는 등을 계속 켜놓은 채 잠자기를 거부했다. 박미주는 다른 이불로 제 몸을 꽁꽁 둘러싼 후 머리만 이불 밖으로 내놓았다.
“너 밥 먹기 전에 우리 아빠랑 무슨 얘기 했어? 왜 아빠가 갑자기 너한테 태도를 달리하는데?”
어색하게 30분이라는 시간을 누워있는 동안 진천하가 아무런 이상행동도 하지 않음을 확인한 뒤에야 박미주는 마음이 놓이는지 고개를 돌려 궁금했던 걸 물었다.
“별거 없었어. 그냥 예전에 군대에 있었다고만 잠깐 얘기드렸어.”
진천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박미주는 그제야 이해되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역시 그랬구나. 우리 아빠가 군인을 진짜 존경하거든. 특히 그 천하 군신을 제일 좋아해. 아참, 그러고 보니 너도 예전에 참전했었다고 들었는데, 혹시 전설 속의 그 천하 군신을 본 적 있어?”
천하 군신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박미주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딱 봐도 그녀 또한 천하 군신의 팬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당연히 봤지.”
진천하가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박미주도 자신의 팬이었다니. 그는 지금 제 신분을 밝힌다면 박미주가 오늘 밤 침대 중간에 놓은 이불을 치울지, 안 치울지가 궁금했다.
“천하 군신을 봤다고? 그분 어떻게 생겼는데? 기골이 엄청 장대하셔? 칼질 한 방이면 백만 적수의 목을 베어버리고 막 그래?”
흥분한 박미주는 상체를 벌떡 일으키고 앉아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천하 군신의 사진을 한 장 꼭 얻고 싶었으나 천하 군신은 어찌나 신비한지 한 번도 맨얼굴로 사람들 앞에 나선 적이 없었다고 했다. 전장에 나서더라도 그는 항상 나비 가면을 쓰고 싸움을 했었다.
“칼질 한 방에 백만 적진의 목을 베었다고? 내가 그렇게 대단했었나? 나는 왜 몰랐지?”
진천하는 멈칫하더니 얼떨떨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했다.
제대로 듣지 못한 박미주가 의문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방금 뭐라고 그랬어?”
“내가 바로 천하 군신이라고. 내가 그렇게 세 보여?”
진천하는 눈을 깜빡이며 박미주를 바라봤다. 그는 박기환처럼 깜짝 놀랄 그녀의 모습을 속으로 상상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다르게 박미주는 노기 가득한 눈빛으로 불같이 화를 벌컥 냈다.
“너 혹시 아까 우리 아빠한테도 네가 그 전설의 천하 군신이라고 그랬어?”
제가 생각한 반응과 전혀 다른 박미주의 반응에 진천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은 솔직하게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는 쪽을 택했다.
“맞아. 아버님께서 내 신분을 물어보기에 그냥 솔직하게 알려드렸어.”
박미주는 두 눈을 크게 부릅뜨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너… 너 대체 뭐라고 말했길래 그런 새빨간 거짓말로 우리 아빠를 감쪽같이 속인 거야?”
“새빨간 거짓말이라니, 내가 한 말 중에서 어디가 거짓말처럼 들렸는데?”
이제 보니 박미주는 제가 거짓말을 한 줄로만 아는 모양이었다. 진천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잠깐, 네 이름도 천하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군신이란 단어를 모욕하지 말아줄래?”
박미주는 경멸 가득한 얼굴로 진천하를 쏘아보며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냥 솔직하게 천하 군신을 본 적이 없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해. 워낙 천하 군신께서 신비주의였잖아. 대신 천하 군신을 사칭하는 것만은 용서할 수 없어. 그건 역겨운 짓이라고!”
박미주는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가슴을 크게 들썩였다. 침대에 확 드러누운 박미주는 이불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 더 이상 진천하의 헛소리를 듣기 싫다는 뜻을 대놓고 표현했다.
그러니까 아빠가 돈도 쥐여주고 호형호제하며 태도를 달리하셨지. 진천하가 천하 군신을 사칭해서 자신의 아빠를 기만했다고 생각하니 박미주는 그에 대한 호감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걸 느꼈다.
천하 군신은 그녀 마음속의 영웅이자 우상이었으며, 또한 꿈속의 연인이었다. 지금 제 옆에 누워있는, 할 줄 아는 거라곤 여자 곁이나 맴돌기나 하는 진천하와는 닮은 점이 일도 없는, 그야말로 천지차이가 나는 다른 사람이었다.
“아니…”
진천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뭘 했다고 군신이라는 이름을 모욕했다고 그러는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박미주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이불을 뒤집어쓰고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자 진천하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진실을 말해도 믿어주지 않는 상황에 그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박미주는 오래도록 씩씩대며 뒤척이다 한밤중에서야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최근 이틀 동안 제대로 휴식하지 못한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새벽 즈음에 몸을 뒤집더니 진천하를 평소에 안고 잠들던 인형이라 생각하고 그를 품안 가득 그러안았다.
그렇게 아침이 되고 날이 밝아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집안에 비명소리가 갑자기 울려 퍼졌다.
“꺄악! 진천하 이 나쁜 놈아!”
잠에서 깨어난 박미주는 상체를 드러낸 채 그녀의 침대에서 자고 있는 진천하를 발견했다. 그녀의 옷 또한 잔뜩 흐트러져 있었는데 상의 잠옷의 단추가 두, 세 개 풀어져 있는 것이 박미주의 우유 빛깔 속살을 그대로 내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바로 그녀가 진천하의 가슴팍에 기댄 채 글쎄… 글쎄 꿀잠을 잤다는 사실이었다.
“너… 너 옷은 왜 벗었어?”
중간에 놔둔 이불을 넘어간 게 본인임을 자각한 박미주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로 진천하를 가리키며 한참만에야 겨우 한마디를 뱉어냈다.
“어제 아버님이랑 술 한잔했더니 더워서 벗었어.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새벽에 너 혼자서 넘어와서 나 안은 거야. 그리고 소리를 그렇게 크게 지르면 어떡해. 장인어른이랑 장모님이 오해하면 어쩌려고?”
진천하가 자신은 죄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그는 속으로 기쁨의 환호를 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