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11화 진심이 담긴 청혼

  • 혼담?!
  • 이 얘기가 나오자마자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다.
  • 사방은 쥐 죽은듯이 고요했다.
  • 모든 이의 눈길이 소지유한테로 향했지만 소지유도 어안이 벙벙했다.
  • 어쩌다가 혼담을 꺼내게 되었는지 그녀도 알 수가 없었다.
  • ‘혹시 안 세자가 산소 부족으로 지금 제정신이 아닌가?’
  • 하지만 안비삼의 생각은 단순했다. 그는 소지유한테 한눈에 반한 게 아니라 단지 젊은 여인이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신과 접문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내라 아무것도 손해 볼 게 없었지만 소지유는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명예와 절조를 잃었다. 사내로서 책임을 지는 게 마땅한 일이었다.
  • “비삼아…”
  • 안친 왕비는 그를 말리고 싶었지만, 막상 말을 꺼내기도 어려워 눈치만 계속 보냈다.
  • 하지만 안비삼은 굳게 결심한 듯 말문을 열었다.
  • “아씨한테 정식으로 혼인을 약속하는 바요.”
  • 이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자기 목숨을 구해준 여인의 인생이 망가지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 소지유는 입을 앙다물고 잔약하지만, 사내의 기질을 갖춘 안비삼을 쳐다봤다.
  • 안친왕은 지금 이 시대 주상의 의형제였다. 그는 당시 폐하가 천자의 자리에 등극하는 일에 엄청난 공을 세웠었다.
  • 그리하여 폐하는 자기와 다른 성씨를 지닌 그한테 망설임 없이 친왕이라는 작위를 봉했다.
  • 대주 경성에서 안친왕보다 힘이 센 사람은 황제밖에 없었다.
  • 안비삼은 안친왕의 유일한 독자로서 죽지 않는 한 안친왕의 권력을 그대로 물려받을 것이다. 소지유가 그와 혼례를 올린다면 사람들은 필히 그녀를 금이야 옥이야 받들 것이고 명예도 얻고 평생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 영의정과 지내며 겪은 모진 고난에 비하면 그야말로 극락이나 다름이 없었다.
  • 이 생각이 들자 소지유는 안비삼의 제의에 혹했다.
  • 더군다나 안비삼의 외모도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 윤이 나도록 고운 외모에 군자의 방정함을 갖추고 있어 격식 있는 의복을 입지 않아도 여전히 위풍이 당당했다.
  • 음…그리고 목소리도 허스키한 것이 매력이 넘쳤다.
  • 무염 대군을 빼면 그와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없었다.
  • 소지유는 설사 그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어도 남은 생을 잘 먹고 잘살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 ‘그냥 … 확 결혼해버릴까?’
  • 소지유는 눈을 깜빡이며 잠시 고민하다가 갓 입을 열려던 찰나 누군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서녀가 안친왕 가문에 들어가는 게 가당키나 한가. 안 세자, 너무 충동적이구려.”
  • 이 목소리는 전혀 기복이 없었고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견고한 의지가 드러났다.
  • 모든 이의 눈길은 또 한 곳에 집중됐다. 이 말을 한 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일곱 대군 중에서 유일하게 작위를 받은 무염 대군 군무염이었다.
  • 소지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무염 대군의 말투에 섞인, 전혀 거리낌 없는 오만이 너무 싫었다.
  • 하지만 그가 이 말을 뱉음으로써 소지유는 머리에 찬물을 끼얹음 당한 듯 많이 차분해졌다.
  • 그의 말은 틀린 게 전혀 없었다. 신분 차이는 그녀가 평생 넘을 수 없는 벽이다. 안친왕 가문에 시집가 오점을 남기고 은인에서 원수가 될 바엔 자기 주제를 알고 선을 넘지 않는 게 낫다.
  • 소지유는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 “안 세자의 총애에 몸 둘 바를 모르겠으나 소녀는 아직 혼인에 관하여 고려해본 적이 없사옵니다.”
  • “왜 아직 고려해보지 않았느냐?”
  • 안비삼은 어리둥절했다. 세간에서 그의 혼인 요청을 거절할 여자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 나라의 공주라도 흔쾌히 그와 혼연을 맺으려 할 것이다.
  • 소지유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또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 “왜 그런 것이냐?”
  • 이번엔 무범 대군 군무범이었다. 군무범은 소지유가 혼담을 거절한 건 자기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 소지유는 군무범을 쳐다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표정은 분명히 “신경 쓰지 마!”라는 뜻이었다.
  •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안비삼을 보며 상냥하게 대답했다.
  • “소녀는 일개 의녀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 사람 목숨을 구할 때마다 혼례를 치러야 한다면 평생 몇 번 혼인해야 할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