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말은 최현옥을 걱정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실상은 이미 연우를 이 집안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한시혁은 이제 그녀 한 사람의 차지가 되는 것이니. 하지만 아무리 최현옥이 시켰다 해도 고용인들 중 단 한사람도 감히 연우에게 손을 댈 사람은 없었다. 연우는 두 손을 허리 위에 얹었는데 기세등등한 얼굴은 마치 자신을 어떻게 할 수나 있겠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무도 감히 그녀에게 손을 대는 사람이 없자 최현옥은 차라리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
“저것들이 너를 무서워한다고 나까지 널 무서워할 것 같아? 내가 오늘 손수 한 씨 가문을 대신해 청소 한번 해야겠구나.”
‘저런 지조도 없는 여자는 놔둬 봐야 속만 뒤집어지지!’
최현옥은 오십이 다된 나이였어도 손끝에 자비를 두는 법이 없었다. 그녀의 표독스러운 모습은 어디를 봐도 고상한 한 씨 집안 사모님의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단숨에 연우의 앞에 놓여있던 물감들을 뒤집어엎었다. 형형색색의 물감들이 뒤섞여 검은 자국이 되어 연우의 하얀 원피스를 물들였다. 예전 같으면 연우는 그저 비굴하게 위층에 올라가 새 옷으로 갈아입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는 붓을 헹구는 수통을 집어 들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앞으로 내던졌다. 최현옥은 물론 근처에 있던 남시아도 피해가지는 못했다. 거뭇한 물이 입고 있던 치마를 더럽히자 남시아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당장이라도 두 눈에서 불을 뿜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보고 있는 눈들이 없었다면 곧장 앞에 있는 저 막돼먹은 여자를 찢어발겼을 것이다. 물감들이 섞여 냄새가 코를 찌르는 물이 최현옥의 얼굴을 흥건하게 적셨다. 그녀는 말을 하는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었다.
“소연우 넌 위아래도 모르는 거니!”
연우는 눈을 치켜뜨며 냉정하게 물었다.
“분명 사모님께서 아랫사람을 아끼지 않으신 거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저한테 어른을 공경하지 않는다고 뭐라 하실 수 있으세요?”
지난 몇 년 동안 연우를 대하는 최현옥의 태도는 일개 고용인을 대하는 태도보다도 못했다. 만약 최현옥이 조금이나마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대해주었다면 방금 전의 수모는 그녀도 참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참으면 더 당하기만 할 뿐이었다.
“감히 말대꾸까지 하다니. 내가… 내가 오늘 네 년을 때려죽이고 말 거야!”
하지만 나이가 나이 인지라 감정이 격해지자 최현옥은 곧바로 혈압이 상승했다. 연우에게 손도 대보지 못하고 그녀는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괜찮으세요 어머님?”
남시아가 다급히 최현옥을 부축하며 날카롭게 연우를 질책했다.
“소연우 씨, 대체 무슨 생각인 거예요. 어머님께서 쓰러지셔야 속이 시원하겠어요?”
과연 세계적인 대배우다운 연기였다. 연우는 어이가 없는 듯 코웃음 쳤다.
“여기 카메라 없어요. 신파극 같은 연기 안 해도 된다고요.”
남시아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현옥을 부축한 채로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신이 지나치게 나서는 것도 다른 이들이 보기에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앞쪽 정원에서 자동차 엔진이 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이야. 시혁 씨가 돌아왔어! 그가 소연우의 추잡스러운 모습을 보게 된다면 무조건 저 여자를 이 집에서 쫓아내겠지. 게다가 저 여자가 사모님을 다치게 했으니 그거 하나만으로도 여기 계속 남아있을 자격을 잃기에 충분할 거야! 누가 자기 어머니를 때린 아내를 그냥 보고 넘기겠어?’
낮지만 안정적인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자 짙은 화약냄새가 공기 중에 가득 찼다. 세 사람의 처참한 모습을 본 한시혁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다들 뭐 하시는 겁니까?”
최현옥은 귀한 아들이 돌아온 것을 보고 자신의 편이 생겼다는 생각에 기세가 살아났다.
“시혁아, 소연우 저게 이젠 눈에 뵈는 게 없는지 나한테 손찌검까지 하더라니까. 나는 저 계집애 하고는 단 하루도 한 씨 집안에서 같이 못 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