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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이미 사인했어

  • “대표님, 별장에 가보시겠습니까?”
  • 한참 동안 시혁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자 강산이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럴 필요 없어.”
  • 시혁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여자의 일은 신경 쓸 가치도 없었다. 동시에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에 들고 있던 서류들을 던지듯 강산에게 건넸다.
  • “이것들도 처리해 버려.”
  • “알겠습니다.”
  • 시혁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챈 강산은 두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시혁은 편안한 자세로 고쳐 앉아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이내 일에 몰두했다.
  • 똑똑!
  • 그러던 중 갑자기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 “들어와.”
  • “한 대표님, 작은 사모님께서 이혼서류에 사인을 마치셨습니다.”
  •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노변호사였다. 그는 연우가 사인을 마친 이혼합의서를 건넸다. 잠시 멈칫하던 시혁은 이내 아침에 노변호사에게 자신의 이혼에 관한 일들을 지시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는 노변호사의 수중에서 건네받은 이혼서류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 “뭐라고 안 하던가요?”
  • “별말 없으셨습니다.”
  • 애초에 그와 소 씨 집안의 혼사는 최현옥이 밀어붙인 일이었다. 그가 이 결혼에 동의한 목적은 오직 하나, 손자가 장가가는 모습을 꼭 보고 싶으시다던 편찮으신 할머니의 소원 때문이었다. 하지만 할머니께서 편찮으시던 것도 괜찮아졌으니 그 여자도 이젠 그에게 필요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인지라 소 씨 집안에서 딸을 시집보내면서 그에게서 100억을 받아간 것과 그 집안에서 지난 3년간 한 씨 집안에 빌붙어 적지 않은 이득을 가져갔던 것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하여 이 이혼으로 소 씨 집안에서 크게 한몫 챙겨갈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토록 흔쾌한 태도는 그 역시도 꽤나 의외라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 “소연우?”
  • 시혁의 사색이 잠시 중단됨과 동시에 서류의 마지막 페이지가 펼쳐졌다. 여인의 작지만 수려한 사인이 남자의 눈에 들어왔다.
  • “그 여자 이름이 소연우인가요?”
  • 시혁은 고개를 들어 사뭇 믿을 수 없는듯 노변호사를 쳐다보았다.
  • “네, 작은 사모님 성함이 소연우이십니다.”
  • 노변호사는 한시혁이 대체 왜 저런 질문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의 질문에 답을 해주었다. 노변호사의 한마디 긍정에 시혁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방금 전 강산이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다음 순간 서로 연관이 없는 듯했던 모든 일들이 하나로 이어지며 그의 머릿속에 하나의 완전한 시나리오가 완성되었다.
  • “협의를 파기합니다.”
  • 시혁은 차갑게 눈을 내리깔며 하나의 지시를 내렸다.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노변호사가 채 무언가를 묻기도 전에 시혁은 그에게 서류를 건네주고는 몸을 일으켜 문을 향해 걸어갔다.
  • “산아.”
  • 시혁이 강산을 부르자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강산이 이내 문을 열어젖히며 물었다.
  • “네, 대표님?”
  • “차 대기시켜. 별장으로 간다.”
  • “알겠습니다.”
  • 한 대표가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강산은 그저 지시대로 할 뿐이었다.
  • ……
  • 한성가의 별장을 나온 연우는 기숙사로 돌아갔다. 다들 졸업을 앞두고 있던 터라 룸메이트들 모두 인턴십을 위해 기숙사를 비우고 거의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혼자만의 조용한 분위기를 즐기며 느긋하게 소파에 누워 쉬고 있을 때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울렸다. 눈을 뜬 연우는 휴대폰으로 시선을 던졌다. 소 씨 집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연우는 받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시간에 집에서 전화가 걸려 온다는 건 자신과 한시혁의 이혼을 집에서도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휴대폰은 그칠 줄 모르고 울려 댔다.
  • “여보세요.”
  • 결국 연우는 어쩔 수 없이 눈살을 찌푸리며 내키지 않는 듯 전화를 받았다.
  • “너 어디야? 당장 집으로 기어들어와!”
  • 아버지인 소국현의 호통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울려 퍼졌다. 그 너머에서 소국현이 길길이 날뛰는 모습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연우는 휴대폰을 귓가에서 살짝 떼어놓고 차갑게 물었다.
  • “무슨 일이신 데요?”
  • “무슨 일? 지금 무슨 일이냐는 말이 나와? 네가 무슨 짓을 벌여 놨는지 모르고 하는 말이야?”
  • 소국현의 목소리가 당장이라도 고막을 찢고 들어올 것 같았다.
  • “한 시간 안에 당장 기어들어와!”
  • 아비라는 자가 자신의 딸에게 연신 기어들어오라 소리치는 모습은 듣는 사람도 마음 한편이 서늘해질 정도였지만 연우는 익숙한 듯 더욱 차갑게 거절했다.
  • “오후에 수업 있어요.”
  • “네가 네 엄마를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있다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 그는 분노에 찬 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검어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연우는 입가를 삐죽거렸다. 소국현이 쓰는 수는 매번 뻔했지만 애석하게도 그 뻔한 수가 그녀에겐 항상 먹혀들었다. 그녀에게 어머니는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존재였기에 그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연우의 사슴 같은 눈망울에 짙은 어둠이 깔렸다. 그녀의 어머니인 장희진은 종래로 강압적이던 적이 없던 사람이었다. 그녀의 기억 속의 그 여인은 소 씨 집안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했지만 소국현은 한창 잘 나가기 시작하니 바람을 피웠다. 연우가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소국현은 자신의 애인인 황민희와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세 살배기 소연진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장희진은 연우를 위해 결국 참는 선택을 하고 맨몸으로 집을 떠났다. 하지만 장희진의 양보와 선의는 그다지 좋은 보답을 받지는 못했다. 오히려 돌아온 것은 소국현과 그의 애인의 끊임없는 계략들이었다.
  • 3년 전, 장희진은 병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되며 치료비로 큰돈을 들여야 했었다. 그들은 그때부터 치료비를 빌미로 연우를 자신들 멋대로 휘두르며 한 씨 집에 시집보내 버리고 100억의 지참금을 챙겨 망해가는 사업을 일으키는데 쏟아부었다. 이쯤에 생각이 미친 연우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집안 사람들은 사람을 이용해 먹다 못해 골수까지 빨아먹을 인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