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 모두 온통 지저분해져 있는 모습에 시혁은 방금 전 이곳에서 막장 극 한 편이 벌어졌음을 짐작했다. 연우는 자신에게 다가와 티슈 한 장을 뽑아 들어 그녀의 작은 얼굴을 닦아 내리는 시혁의 모습을 그저 담담하게 지켜보았다. 시혁은 고개를 살짝 돌려 입을 열었다.
“같이 지내시라고 한 적 없습니다. 아무 일도 없이 제 별장으로 찾아오지 않으면 되실 일 아닙니까.”
그의 한마디가 단숨에 최현옥의 괴변을 묵살시켰다.
‘소연우가 언제부터 시혁이랑 사이가 저렇게 좋았었지?’
이제껏 그들 모자의 관계는 다른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만큼 화목하지는 않았어도 한시혁이 지금처럼 그녀에게 맞선적은 없었다. 하지만 방금의 단 한마디로도 시혁이 소연우의 편에 섰음을 알아채기엔 충분했다.
“오랜만이야 시혁 씨, 잘 지냈어?”
남시아는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도 저 잘생긴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는 못했다. 몇 년 전 그때 자칫했으면 그들이 진짜 부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년간 그녀가 가장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건 소연우에게 자신의 남자를 빼앗겼다는 사실이었다. 한시혁은 차갑게 눈을 내리깔고 남시아는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산아, 사모님 모셔다 드려.”
순간 주위의 공기가 멈춘 듯했다. 남시아의 달달하던 미소가 서서히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녀가 내민 손마저도 정처 없이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연우를 대하는 시혁의 다정한 모습을 본 그녀는 질투심에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소연우는 대체 무슨 수로 한시혁을 꼬신 거지?’
그때 강산이 앞으로 다가와 공손하게 말했다.
“사모님, 아가씨,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내쫓으려는 의도가 분명한 그의 말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최현옥은 자신이 시혁에게 남처럼 취급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시혁이 소연우, 저 여우 같은 여자에게 홀려 정신을 못 차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속에 초조함과 분노가 차올랐다.
“시혁이 너 지금 저 순진한 얼굴에 속고 있는 거야. 저거 좋은 물건 아니다.”
연우는 낮게 깔아내린 눈으로 비웃듯 입꼬리를 올린 채 저들이 또 무슨 빌미를 들어 그녀를 모함하려 드는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시혁의 시선은 여전히 소녀의 정교한 얼굴 위에 머무른 채 연우의 목소리 이외의 다른 소리들은 그의 귀에 들리지 않는 듯 손끝에 잡은 물티슈로 연신 그녀의 얼굴에 묻어 있는 물감들을 닦아냈다. 무시당하는 기분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최현옥은 시혁이 아직 소연우의 추악한 진짜 모습을 모르고 있는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저 계집애가 사실 뒤에서는 한없이 쉬운 여자라는 걸 시혁이가 알게 되면 저 계집을 곁에 둘리가 없지… 알레르기가 완치됐다 하더라도 오랜 결벽은 사라지지 않았을 테니.’
“시혁아, 엄마가 이 말은 꼭 해야겠구나. 너 돌아오기 전날 밤에 소연우 저게 어느 호텔에서 어떤 놈 이랑 뒹굴었는지 몰라도 돌아왔을 때 그 자식 옷을 입고 있더라니까!”
최현옥은 사뭇 엄하게 나무랐다. 하다못해 연우를 당장이라도 한 씨 집안에서 내쫓을 기세였다.
‘저딴 쥐뿔도 가진 것 없는 여자가 한 씨 집안 도련님한테 가당키나 해? 시혁이가 한 씨 집안 후계자 자리에 오르도록 받쳐줄 수 있으려면 사업을 확장하고 자리를 공고히 하는데 도움이 되는 여자를 아내로 들여야지. 시아는 탄탄한 자금을 보유한 집안의 여식인데다 시혁이를 저렇게 좋아하니, 저 아이 만한 인물도 없어. 소연우만 쫓아내면 다른 것들은 다 간단한 문제잖아.’
“시혁 씨, 당신같이 우월한 사람이 어떻게 저런 더러운 여자를 안아?”
남시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 떠올랐다.
“소연우 씨, 만약 진짜 시혁 씨를 사랑한다면 저 사람이 어울리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도록 해줘야죠.”
이를 테면 그녀 같은…
연우는 밀려오는 역겨움을 겨우 참아냈다.
‘저 여자 대본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거 아니야? 뭐만 했다 하면 저렇게 나오겠다는 거지? 자기만 저딴 수작 부릴 줄 아나 본데, 나도 한다면 한다고.’
연우는 살짝 움직여 한시혁의 품에 기댔다. 그녀는 몸을 완전히 시혁에게 밀착시킨 채 흐릿한 눈빛으로 유혹하듯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