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우가 되물었다. 소국현은 연우에게서 아버지로서 느낄 수 있는 우월감과 위엄은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하여 연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분노에 차 손에 집히는 대로 찻잔을 집어 들어 연우를 향해 내던졌다. 힘껏 내던진 찻잔은 그녀를 명중하지 못하고 연우의 발치에 내동댕이 쳐졌지만 그 충격으로 부서진 찻잔의 조각이 튕겨올라 그녀의 희고 고운 손등에 한줄기 깊지도, 그렇다고 옅지도 않은 생채기를 만들어내며 벌어진 상처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연우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눈살 한번 찌푸리지 않은 채 여전히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껏 이러려고 부르셨어요? 욕도 다 하신 것 같으니 더 볼일 없으시면 먼저 가 볼게요.”
말을 마친 연우는 군더더기 없는 몸짓으로 돌아서 나가려 했다.
“그만하면 됐어요 국현 씨, 너무 화내지 마세요. 불러서 하려던 말은 해야죠.”
옆에서 실컷 구경만 하고 있던 황민희가 적당히 한마디 보탰다.
“거기 서!”
황민희의 언질을 들은 소국현은 그제야 연우를 불러들인 진짜 목적이 생각이 났는지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그녀를 붙잡았다. 그 소리를 들은 연우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듣자 하니 너 한 대표랑 이혼했다고?”
소국현이 물었다.
“네.”
소연우는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단호한 말투에 소국현은 혈압이 솟구쳐 올랐다.
“이년이! 너 당장 한 씨 집안으로 돌아가, 가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집에서 나오지 마!”
소국현은 명령하듯 소리쳤다. 한 씨 집안으로부터 받아먹을 것이 많았으니 그 돈줄을 놓치면 소 씨 집안은 그대로 풍비박산이 날것이 뻔했다.
“참나, 제가 같은 구덩이에 두 번 빠질 정도로 멍청해 보이세요?”
소연우는 소국현의 말들이 그저 웃길 뿐이었다.
“연우 너도 알잖니, 소 씨 집안은 한 씨 집안 없이는 안 되는 거.”
황민희는 내내 연우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이득 앞에서는 그녀도 한 수 접고 부탁하듯 말했다.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저는 소 씨 집안 사람도 아닌데.”
소국현이 자신의 어머니를 배신하는 만행을 저지른 후로 연우는 마음속에서 소 씨 집안과의 연을 끊은 지 오래였다. 이미 집안의 일은 상관치 않기로 굳게 결심한 듯 어떠한 설득도 통하지 않는 연우의 모습에 황민희는 소국현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무언가의 눈빛을 보냈다.
“그래. 그럼 지금 바로 전화해서 네 어머니의 치료비를 끊으라고 하마.”
소국현은 결국에는 또다시 연우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들먹였다. 몇 년 전 장희진의 병세가 심해져 매일 고액의 치료비를 들여 치료를 유지해야 되는 지경에 이른 후로 소국현은 연우가 고분고분 자신의 말을 듣도록 하기 위해 치료비를 끊어버린다는 협박을 밥 먹듯이 해왔던 것이다. 지금의 연우로써는 그 많은 치료비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기에 매번 똑같은 수에 진절머리가 났어도 그녀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연우는 이번만큼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한시혁을 뭐로 보시는 거예요?”
그녀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고양이? 강아지? 언제 까지고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어요?”
그녀가 비꼬듯 말을 마치자 소국현과 황민희의 낯빛이 순식간에 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한 씨 집안에서는 소국현과 황민희의 딸인 소연진을 며느리로 들이려 했었으나 못생긴 데다 동성애자 성향이 있는 남자에게 자신의 딸을 내어줄 수 없었던 황민희가 연우에게 약을 먹여 그녀를 보내 버린 것이었다.
“그것까지 내가 상관할 바 아니니까 네가 알아서 방법을 찾으란 말이야.”
소국현은 나 몰라라 하는 식으로 말했다. 연우는 끝내 참지 못하고 속으로 눈을 흘겼다.
“그 방법 이란 거 저는 못 찾겠네요. 한시혁이 직접 저를 한 씨 집안에서 쫓아낸 거예요. 그 사람이 직접 다시 데려가지 않는 이상은 저도 방법이 없다고요. 그런 게 아니라면 그 한 씨 집안에 저는 죽어도 다시 돌아갈 방법이 없다는 말이에요.”
연우는 마지막 한마디를 뱉으면서 날아갈 듯한 희열을 느꼈다. 한시혁이 소 씨 집안에 나타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건 굳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연우의 기쁨이 채 1초도 지나지 않아 바로 다음순간 고용인 하나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급히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