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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파멸

  • “그렇게 싫은데 결혼은 왜 하는 거야? 자기 결혼하면 우리도 더는 지금처럼 자주 못 만나.”
  • “그 여자가 나한테 결혼해 달라고 졸라대지 않았으면 내가 왜 그 여자랑 결혼하려 했겠어?”
  • 허민혁은 아무 거리낌도 없이 이런 말을 내뱉고는 진예은의 배 위에 올라탔다.
  • “그런데 자기야, 자기 약혼녀 진짜 왔어.”
  • 진예은은 두 손으로 허민혁의 가슴팍을 살짝 밀치며 침실 입구를 가리켰다.
  • “그럴 리가. 조금 전 데려다주고 왔는데….”
  • 허민혁은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돌렸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 “시안아, 네가 왜 여기에 있어?”
  •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경직된 표정으로 재빨리 진예은의 몸에서 내려오더니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불과 조금 전까지 욕망에 불타오르던 그는 나를 본 순간 당황해서 옷을 걸치는 것도 깜빡한 모양이었다.
  • 진예은은 이불로 자신의 몸을 가리고 비웃음 가득한 미소를 머금고 나를 바라보았다.
  • 이미 눈물범벅이 된 나는 이 분노와 원망을 당장이라도 터뜨리고 싶었지만, 잔인한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에 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 허민혁은 뒤늦게 욕실 가운을 걸치고 재빨리 나한테 다가와서 잔뜩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 “시안아. 일단 내 설명 좀 들어 봐….”
  • “내가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뭘 더 설명해? 핑계라도 대고 싶은 거야?”
  • 가슴이 아파서 숨조차 잘 쉬어지지 않았지만, 해명하겠다는 허민혁의 태도에 또 한 가닥 기대를 품어본다.
  • 허민혁의 셔츠를 몸에 걸치고 웨이브를 넣은 긴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진예은은 여자인 내가 봐도 섹시하고 예뻤다.
  • 그녀는 나한테 다가와서 도발적인 시선으로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 “정원이는 민혁 씨 아이야.”
  • 정원, 올해 갓 세 살이 된 진예은의 아이. 그 아이가 허민혁의 아이였구나….
  • 실낱같던 희망이 잔인하게 부서진 순간이었다. 나는 머리가 울리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내 세상이 처참하게 무너진 느낌이었다.
  • 나는 허민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가 아니라고 부정하기를, 내가 생각하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고 말하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 그는 죄책감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정원의 신분을 인정한 셈이었다.
  • 가슴이 칼에 베인 듯 아팠다. 나는 당장이라도 욕설을 퍼붓고 이 더러운 인간들을 때려 부수고 싶었다. 하지만 갑자기 휘몰아친 감정의 무게가 너무 숨 막혀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그것은 깊은 분노와 원망이었다!
  • 무려 7년이었다. 이들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런 더러운 짓을 벌이는 동안 나는 사랑하는 남자, 가장 믿을 수 있는 절친으로 7년이나 최선을 다해 그들을 사랑했다. 그런데 이들은 뒤에서 나를 배신하고 불륜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이미 아이까지 낳았다.
  • “더러운 년!”
  • 나는 더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굴욕감을 주체할 수 없어서 진예은에게 힘껏 귀뺨을 날렸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내 손이 다 얼얼할 정도였다.
  • “예은아!”
  • 허민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 나에게 맞아서 고개가 돌아갔던 진예은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분노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 “예은아, 괜찮아? 어디 다치지 않았어?”
  •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진예은의 상태를 살피는 허민혁의 행동이 다시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 내 약혼자가 나를 앞에 두고 우리 사이를 망친 불륜녀를 걱정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어떻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 “민혁 씨, 쟤가 나 때렸어. 너무 아파.”
  • 진예은은 불쌍한 표정으로 허민혁의 팔짱을 끼더니 눈물을 뚝뚝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