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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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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울

Last update: 2022-12-30

제1화 약혼자와 절친

  • 데라 가든 아파트, 밤 열시.
  •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 전등을 켰다. 거실 샹들리에의 밝은 불빛에 창문에 내 그림자가 드리웠다.
  • 내일 결혼식을 마치면 이 집은 곧 신혼집이 된다. 내 약혼자 허민혁은 한 회사의 부장급 인사이다. 잘생기고 나를 잘 챙기고 능력도 좋은 사람이라 나는 줄곧 그와 만난 걸 내 생의 가장 큰 행운이라 생각했다.
  • 관습대로 결혼 전야인 오늘 밤, 우리는 따로 지내기로 했다. 그래서 허민혁은 신혼집에, 나는 절친 하영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 잠자기전 내일 필요한 물건들을 정리하던 나는 면사포를 두고 온 사실을 뒤늦게 발견했다.
  • 그래서 나는 허민혁에게 따로 연락을 넣지 않고 홀로 신혼집으로 돌아왔다. 깜짝 이벤트를 해줄 생각이었다.
  • 나는 내일이 지나면 허민혁과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살 거라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 슬리퍼로 갈아신고 거실로 들어가던 나는 안방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신음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 나는 놀란 눈으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달뜬 신음 소리는 살짝 열린 안방 문틈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 순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온몸이 떨렸다. 나는 돌덩이처럼 무거운 다리를 옮겨 그쪽으로 걸어갔다.
  • 안방 문 앞에 도착하자 음탕한 비명 소리가 점점 더 똑똑히 들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숨이 막혔다.
  • 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문을 열었다.
  • 베이지색 하이힐과 여자의 옷가지들이 바닥에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굳이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당황함을 억누르며 침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예리한 비수가 날아와서 내 가슴에 사정없이 꽂혔다.
  • 대학 4년 동안 나와 기숙사 동기였고 가장 친한 친구라고 믿었던 여자와 내일이면 나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릴 예정인 약혼자가 지금 침대에서 같이 엉켜 뒹굴고 있었다.
  • 진예은의 시선이 입구에 멍하니 서 있는 나에게 닿았다. 그녀는 나를 향해 도발적인 눈빛을 보내더니 더 음탕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 나는 숨을 쉬는 것조차 아픈 느낌이 어떤 건지 오늘에야 비로소 경험했다. 내 사랑하는 약혼자가 내 눈앞에서 다른 여자를 안고 우리의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다.
  • 분노와 굴욕감이 가슴을 채웠다. 나는 달려가서 그들을 찢어 죽이고 싶은 충동을 두 주먹을 꽉 쥐며 참아냈다.
  • 진예은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허민혁의 민감한 부위를 쉴 새 없이 쓰다듬으며 교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 “자기야, 내일이면 고시안이랑 결혼하는데 지금 나랑 이러고 있는 거, 시안이한테 미안하지 않아?”
  • “미안할 게 뭐가 있어? 결혼 전날 밤이 평소랑 다를 건 또 뭐야? 그리고 시안이가 우리 사이를 알게 되는 일은 아마 없을 거야.”
  • 허민혁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 “혹시 모르잖아. 만약에 시안이가 연락도 없이 갑자기 집에 왔는데 우리가 이러고 있는 걸 보면 시안이는 어떻게 할 것 같아? 그때도 자기랑 결혼할까?”
  • 해볼 테면 해보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진예은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 “오늘 시안이 이 집에 올 일은 없어. 그리고 알면 걔가 뭘 할 수 있는데? 그까짓 결혼 안 하면 그만이야. 어차피 나도 이렇게 일찍 결혼할 마음은 없었어.”
  • 허민혁은 대수롭지 않은 미소를 지으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 “그렇게 싫은데 결혼은 왜 하는 거야? 자기 결혼하면 우리도 더는 지금처럼 자주 못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