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아, 너 위에 가서 내 다른 셔츠 좀 가지고 와. 엄마한테 그날의 셔츠가 내 거라는 걸 똑똑히 보여줘야겠어.”
옆에 서 있던 강산이 한시혁의 지시를 받고 황급히 위층으로 향했다. 비교를 해보면 더 이상 의심을 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한시혁의 옷을 손에 들고 급히 내려온 강산은 그 옷을 탁자 위에 잘 보이도록 펴놓았다. 그날 소연우가 입은 옷이 주름이 많이 생긴 것만 빼고는 두 옷 모두 왼쪽 옷깃에 H라고 새겨져 있었다. 한시혁의 옷은 전부 이탈리아 고급 장인한테서 맞춤 제작한 것이기에 모든 옷에는 한시혁의 이니셜 H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를 보며 최현옥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그러더니 혈압이 다시 올라오는 듯 목덜미를 붙들며 휘청거렸다. 그 모습을 본 강산이 급히 다가가 부축했다.
“사모님, 제가 댁까지 모셔다드릴게요.”
뻔한 결말에 최현옥은 콧방귀를 뀌고는 강산의 도움을 받아 그 자리를 떠났다. 남시아도 최현옥과 알고 지낼 뿐 한 씨 집안과 친분이 없는지라 최현옥이 자리를 뜨자 곧바로 뒤를 이어 요란한 차 소리를 내며 그곳을 떠나갔다.
“관객들이 다 갔으니 연기 이제 그만하지.”
한시혁 품에 달라붙어 있던 소연우는 급 거리를 두며 말했다. 이때 자기의 감정이 사람을 약 올리는 도구로 사용됐다는 생각에 한시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소연우 거기 안 서?”
조금은 화가 섞인 말투로 한시혁이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연우는 한시혁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는 재빨리 위층으로 달려갔다.
거실에 도착한 그녀가 잠옷을 갈아입으려는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더니 갑자기 뒤에서 사람 온기가 느껴지면서 팔 하나가 그녀의 허리를 휘어감았다.
“뭐 하는 짓이야! 나 지금 옷 갈아입고 있잖아!”
윗몸 절반쯤 위치에 걸려있는 잠옷은 그녀의 허리와 다리가 전부 드러나게 하였다. 그 모습을 본 한시혁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호흡과 심장 박동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처음 본 것도 아닌데 뭐.”
한시혁이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말했다. 맞춤양복 안에 입은 웨이스트코트는 그의 훤칠하고 탄탄한 몸매를 잘 드러나게 해주었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자태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팔을 밀치며 소연우는 화를 냈다.
“그날 밤 얘기는 이제 그만해!”
그날 밤은 실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인생 계획이 큰 변화가 생긴 건 아니었다. 그러나 한시혁이 그녀 인생길의 제일 큰 장애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한시혁은 그녀의 턱을 잡고는 실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그래, 알았어. 그럼 몸이 다시 기억나게 해줄게. 아니, 더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줄게.”
소연우가 놀라 눈을 크게 뜬 순간 그녀의 몸이 가볍게 들리더니 침대로 던져졌다. 한시혁은 힘으로 그녀의 두 손을 머리 위에 누르고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 그녀의 아름답고 정교한 얼굴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에서 사람의 영혼을 매혹시키는 독특한 향이 났다.
“너 미쳤어? 이거 안 놔?”
그날 밤의 실수와는 달리 오늘 밤은 강제 추궁이었다. 소연우는 한시혁한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으나 역부족이었다. 도무지 그의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이걸 놓으면 너 가만히 있을 거야?”
한시혁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
그러지 않을 게 뻔했다. 무엇에 홀린 것처럼 눈물이 고인 그녀의 눈과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는 순간 한시혁은 그녀와 사랑하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다. 한시혁은 머리를 조금 내려서 그의 얇은 입술을 그녀의 입에 갖다 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