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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별론데

  • 온지우의 전시회가 열리는 날, 윤솔은 한 시간 넘게 공들여 화장을 하고 긴 머리카락은 피시 테일을 땋아 등 뒤로 늘어뜨리고서 이마 양옆으로 자연스럽게 잔머리를 냈다.
  • 그러고는 실크 재질의 살구색 루스 핏 셔츠에 녹색의 7부 스커트를 매치해 프렌치한 우아함과 나른함이 묻어나는 섹시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 작정하고 치장한 윤솔의 모습을 보자마자 진민준은 저도 모르게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 “솔이 누나, 남자 친구는 언제 찾을 거야? 내가 먼저 줄을 서도 돼?”
  • 그 말에 윤솔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 “장난치지 마.”
  • “난 진지해.”
  • 그렇게 말하며 선글라스를 벗은 진민준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 윤솔은 일순 멈칫했다. 당분간 연애를 시작할 생각도 없거니와 회사에서 밀고 있는 배우에게 손을 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윤솔은 대답 대신 곧장 마세라티로 향했다.
  • 둘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진민준은 조금도 개의치 않은 얼굴이었다.
  • “소율 누나한테 얘기 들었어. 걱정하지 마. 오늘 내가 누나 기를 팍팍 세워줄게!”
  • 윤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 “그럼 부탁할게.”
  • “나만 믿어!”
  • 굉음을 내며 온지우의 갤러리 앞에 멈춰 서는 파란색 마세라티의 강렬한 모습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 안전벨트를 풀고서 마세라티에서 내린 윤솔은 진민준의 팔짱을 낀 채 갤러리로 향했다.
  • 입구에 다다르자 경호원이 앞을 막았다.
  • “초대장을 보여주세요.”
  • 윤솔은 가방에서 초대장을 꺼내 경호원에게 건넸다. 경호원은 초대장이 진짜인지 면밀히 살펴보고서 두 사람의 입장을 허락했다.
  • 온지우의 그림 외에도 다른 유명 예술가들의 그림이 많이 전시되었기에 아무나 입장할 수 없었다.
  • 허 씨 가문에는 못 미치지만 온 씨 가문도 서울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부유한 가문 중 하나였다.
  • 150평 남짓한 온지우의 갤러리는 1년 임대료만 해도 6억에 달했다. 화려한 인테리어는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보이는 번쩍번쩍한 샹들리에는 이탈리아의 한 예술가가 직접 디자인한 것으로 2억은 훨씬 넘는다고 들었다.
  • 초대한 손님들에게 편의를 주기 위해 진열장들을 다른 곳으로 옮긴 듯했다.
  • 솔직히 조금 난해하기는 했지만 온지우의 작품들은 꽤 흥미로웠다.
  • 온 씨 가문의 아가씨가 직접 개최한 전시회였기에 자연스럽게 수많은 언론 매체의 주목을 받았다.
  • 진민준은 오늘 루스 핏 셔츠에 살구색 슬랙스를 매치해 캐주얼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 평소보다 캐주얼한 옷차림 때문인지 아니면 선글라스 때문인지 기자들은 진민준을 쉽게 알아보지 못했다.
  • 2층으로 올라가자 멀리서도 온지우의 모습이 보였다. 프렌치 스타일의 잔꽃 무늬 롱 드레스에 긴 머리를 뒤로 넘긴 모습이 부드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 허주원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했다. 온지우는 시도 때도 없이 1 층 로비를 힐끔거렸다.
  • 2층 안쪽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간 윤솔과 진민준은 야외 발코니를 발견했다.
  • 발코니에는 파라솔 세 개가 놓여 있었고 각각의 파라솔 밑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구비되어 있었다.
  • 옆에는 페인트칠이 된 벽이 세워져 있었는데 벽 안쪽 구석에는 음료와 디저트가 제공되고 있었다.
  •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밖과 달리 발코니는 오히려 한적했다.
  • 윤솔은 옆에 선 진민준을 힐끗 바라보았다.
  • “잠깐 앉아서 쉴래?”
  • “좋지!”
  • 역시나 예술은 다가가기 어려운 분야였다.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려니 고역이었다.
  • 반 고흐나 다빈치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윤솔과 진민준은 최근 연예계의 가십거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윤솔은 연예계 가십에 소율만큼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끔씩 듣는다고 해서 나쁠 건 없었다.
  • 시원한 주스와 달콤한 디저트에 젊고 잘생긴 사내가 눈을 즐겁게 해주니 윤솔은 종일 이러고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 오후 내내 이곳에 늘어져 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오늘은 허정아를 골탕 먹이기 위해 꾸역꾸역 온 것이었기에 스멀스멀 고개를 쳐드는 욕구를 애써 눌렀다.
  • 윤솔은 들고 있던 주스를 내려놓고서 진민준을 응시했다.
  • “주인공들이 거의 도착했을 텐데 우리도 들어가자.”
  • 윤솔은 싱긋 미소 지으며 가방을 챙겨 들고서 자리에서 몸을 들이켰다.
  • 윤솔과 진민준이 발코니를 나오기도 전에 허정아의 놀란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 “당신이 여기 왜 있어요?”
  • 허정아는 윤솔을 보면 은근한 우월감을 느낌과 동시에 말도 안 되게 예쁜 얼굴을 보면 다시 기분이 언짢아졌다.
  • 그래서 윤솔을 볼 때마다 허정아는 어김없이 윤솔의 속을 박박 긁어댔고 오늘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알아요? 여기가 당신 같은 사람이 올 수 있는 곳인 줄 알아요? 설마 우리 오빠도 오늘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재혼해 달라고 매달리기 위해 온 건 아니죠?”
  • 허정아는 얘기를 거듭할수록 자신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느껴졌다.
  • “꿈도 꾸지 마요! 우리 오빠랑 재혼하고 싶으면 나한테 먼저 애원해 봐요. 내가 마음이 약해지면 오빠한테 사정해 줄지도 모르잖아요. 오빠는 결국 재혼에 동의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말 몇 마디는 들어줄 거예요! 어때요? 내 제안 괜찮죠? 여기 보는 눈도 얼마 없는데 그냥…”
  • 윤솔을 발견하자마자 온통 윤솔을 골탕 먹일 생각뿐이었던 탓에 윤솔의 옆에 누군가 서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챘다.
  •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었다. 윤솔의 옆에 선 사내가 진민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찰나, 허정아의 표정은 코믹 그 자체였다.
  • “당, 당신이 왜 진민준이랑 같이 있어요?”
  • 윤솔은 대답 대신 진민준에게 시선을 보냈다.
  • 그러자 진민준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대신 대답했다.
  • “솔이랑 같이 왔어요.”
  • “아— 어, 어떻게! 왜!”
  • 허정아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진민준을 바라보았다.
  • 윤솔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마구 날뛰어대는 어릿광대를 보듯 허정아를 바라보았다.
  •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고 감상을 마친 윤솔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 “가자.”
  • 일전에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들을 보면서도 파파라치들이 일부로 각도를 어긋나게 찍은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진민준과 윤솔은 아무 사이 아닐 것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던 허정아였다.
  • 하지만 오늘 자신의 우상이 윤솔 같은 여자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자 허정아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
  • 그 여자가 뭔데! 윤솔이 뭔데!
  • “거기 서!”
  •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 윤솔은 진작에 갤러리로 다시 들어갔고 진민준은 그 뒤를 바짝 따라가고 있었다.
  • 선글라스 아래로 보이는 얇은 입술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가 있었고 고개를 숙인 채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행복에 젖은 얼굴이었다.
  • 허정아는 분노로 눈앞이 벌겋게 물드는 것 같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허정아는 얼른 두 사람의 뒤를 쫓아갔다.
  • 몇 발자국 내딛기도 전에 윤솔과 진민준은 등 뒤에 카메라를 든 기자들을 줄줄이 단 채 나란히 걸어오고 있는 온지우와 허주원을 맞닥뜨렸다.
  • 네 사람 사이에 일순 어색한 적막이 감돌았다. 온지우가 맨 먼저 경직된 분위기를 깨며 입을 열었다.
  • “오랜만이에요, 윤솔 씨.”
  • 윤솔은 고개를 살짝 까닥여 보였다.
  • “한가하던 참에 구경하러 와봤어요. 꽤 흥미롭네요.”
  • 그 말에 온지우는 놀란 듯 외마디 감탄을 내뱉었다.
  • “윤솔 씨도 제 그림을 좋아해 주실 줄 몰랐어요. 영광이에요.”
  • 참 여우 같은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 전시회가 흥미로웠다는 칭찬 한마디에 온지우는 당연히 자신의 그림을 좋아해 줄 줄 알았다며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다.
  • 윤솔이 모르면서 아는 척한다며 에둘러 조롱한 거나 다름없었다.
  • 윤솔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 “저는 예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여기 있는 진민준은 데뷔하기 전에 미술 전공이었어요.”
  • 그렇게 말하며 잠시 뜸을 들이던 윤솔은 이내 진민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 “온지우 씨 그림, 어떤 것 같아?”
  • “별론데.”
  • 그 말에 윤솔은 짐짓 나무라는 투로 속삭였다.
  • “그런 식으로 말하면 온지우 씨가 우리를 내쫓을지도 몰라.”
  • 진민준의 신랄한 평가에 안색이 어두워졌던 온지우는 윤솔의 말을 듣고는 억지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 “역시 전공자라 그런지 날카로우시네요. 진민준 씨에 비하면 변변찮은 수준이죠.”
  • 진민준은 조금도 겸손을 떨지 않았다.
  • “네, 그래서 일전에 콜라보를 제안하셨을 때 매니저한테 거절해 달라고 부탁한 거니까 너무 마음에 두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 “그, 그럼요.”
  • 온지우는 분한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이 정도면 충분한 듯싶어 윤솔은 진민준의 팔을 살짝 잡았다.
  • “됐어, 그만해. 네가 이렇게 싫어할 줄 알았으면 오지 말걸 그랬어. 온지우 씨를 방해하지 말고 우린 이만 가자. ”
  • “솔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 두 사람은 곧장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 처음부터 끝까지 윤솔은 온지우의 옆에 있는 사내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 그에 반해 허주원의 어둡고 짙은 시선은 윤솔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솔이’라는 호칭이 거슬리는지 미간을 찌푸리기도 했다.
  • 얼마나 친한 사이이기에 저렇게 닭살스럽게 부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