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솔은 일순 멈칫했다. 당분간 연애를 시작할 생각도 없거니와 회사에서 밀고 있는 배우에게 손을 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윤솔은 대답 대신 곧장 마세라티로 향했다.
둘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진민준은 조금도 개의치 않은 얼굴이었다.
“소율 누나한테 얘기 들었어. 걱정하지 마. 오늘 내가 누나 기를 팍팍 세워줄게!”
윤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부탁할게.”
“나만 믿어!”
굉음을 내며 온지우의 갤러리 앞에 멈춰 서는 파란색 마세라티의 강렬한 모습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안전벨트를 풀고서 마세라티에서 내린 윤솔은 진민준의 팔짱을 낀 채 갤러리로 향했다.
입구에 다다르자 경호원이 앞을 막았다.
“초대장을 보여주세요.”
윤솔은 가방에서 초대장을 꺼내 경호원에게 건넸다. 경호원은 초대장이 진짜인지 면밀히 살펴보고서 두 사람의 입장을 허락했다.
온지우의 그림 외에도 다른 유명 예술가들의 그림이 많이 전시되었기에 아무나 입장할 수 없었다.
허 씨 가문에는 못 미치지만 온 씨 가문도 서울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부유한 가문 중 하나였다.
150평 남짓한 온지우의 갤러리는 1년 임대료만 해도 6억에 달했다. 화려한 인테리어는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보이는 번쩍번쩍한 샹들리에는 이탈리아의 한 예술가가 직접 디자인한 것으로 2억은 훨씬 넘는다고 들었다.
초대한 손님들에게 편의를 주기 위해 진열장들을 다른 곳으로 옮긴 듯했다.
솔직히 조금 난해하기는 했지만 온지우의 작품들은 꽤 흥미로웠다.
온 씨 가문의 아가씨가 직접 개최한 전시회였기에 자연스럽게 수많은 언론 매체의 주목을 받았다.
진민준은 오늘 루스 핏 셔츠에 살구색 슬랙스를 매치해 캐주얼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평소보다 캐주얼한 옷차림 때문인지 아니면 선글라스 때문인지 기자들은 진민준을 쉽게 알아보지 못했다.
2층으로 올라가자 멀리서도 온지우의 모습이 보였다. 프렌치 스타일의 잔꽃 무늬 롱 드레스에 긴 머리를 뒤로 넘긴 모습이 부드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허주원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했다. 온지우는 시도 때도 없이 1 층 로비를 힐끔거렸다.
2층 안쪽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간 윤솔과 진민준은 야외 발코니를 발견했다.
발코니에는 파라솔 세 개가 놓여 있었고 각각의 파라솔 밑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구비되어 있었다.
옆에는 페인트칠이 된 벽이 세워져 있었는데 벽 안쪽 구석에는 음료와 디저트가 제공되고 있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밖과 달리 발코니는 오히려 한적했다.
윤솔은 옆에 선 진민준을 힐끗 바라보았다.
“잠깐 앉아서 쉴래?”
“좋지!”
역시나 예술은 다가가기 어려운 분야였다.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려니 고역이었다.
반 고흐나 다빈치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윤솔과 진민준은 최근 연예계의 가십거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윤솔은 연예계 가십에 소율만큼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끔씩 듣는다고 해서 나쁠 건 없었다.
시원한 주스와 달콤한 디저트에 젊고 잘생긴 사내가 눈을 즐겁게 해주니 윤솔은 종일 이러고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오후 내내 이곳에 늘어져 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오늘은 허정아를 골탕 먹이기 위해 꾸역꾸역 온 것이었기에 스멀스멀 고개를 쳐드는 욕구를 애써 눌렀다.
윤솔은 들고 있던 주스를 내려놓고서 진민준을 응시했다.
“주인공들이 거의 도착했을 텐데 우리도 들어가자.”
윤솔은 싱긋 미소 지으며 가방을 챙겨 들고서 자리에서 몸을 들이켰다.
윤솔과 진민준이 발코니를 나오기도 전에 허정아의 놀란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당신이 여기 왜 있어요?”
허정아는 윤솔을 보면 은근한 우월감을 느낌과 동시에 말도 안 되게 예쁜 얼굴을 보면 다시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래서 윤솔을 볼 때마다 허정아는 어김없이 윤솔의 속을 박박 긁어댔고 오늘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알아요? 여기가 당신 같은 사람이 올 수 있는 곳인 줄 알아요? 설마 우리 오빠도 오늘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재혼해 달라고 매달리기 위해 온 건 아니죠?”
허정아는 얘기를 거듭할수록 자신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느껴졌다.
“꿈도 꾸지 마요! 우리 오빠랑 재혼하고 싶으면 나한테 먼저 애원해 봐요. 내가 마음이 약해지면 오빠한테 사정해 줄지도 모르잖아요. 오빠는 결국 재혼에 동의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말 몇 마디는 들어줄 거예요! 어때요? 내 제안 괜찮죠? 여기 보는 눈도 얼마 없는데 그냥…”
윤솔을 발견하자마자 온통 윤솔을 골탕 먹일 생각뿐이었던 탓에 윤솔의 옆에 누군가 서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챘다.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었다. 윤솔의 옆에 선 사내가 진민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찰나, 허정아의 표정은 코믹 그 자체였다.
“당, 당신이 왜 진민준이랑 같이 있어요?”
윤솔은 대답 대신 진민준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진민준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대신 대답했다.
“솔이랑 같이 왔어요.”
“아— 어, 어떻게! 왜!”
허정아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진민준을 바라보았다.
윤솔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마구 날뛰어대는 어릿광대를 보듯 허정아를 바라보았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고 감상을 마친 윤솔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가자.”
일전에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들을 보면서도 파파라치들이 일부로 각도를 어긋나게 찍은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진민준과 윤솔은 아무 사이 아닐 것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던 허정아였다.
하지만 오늘 자신의 우상이 윤솔 같은 여자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자 허정아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
그 여자가 뭔데! 윤솔이 뭔데!
“거기 서!”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윤솔은 진작에 갤러리로 다시 들어갔고 진민준은 그 뒤를 바짝 따라가고 있었다.
선글라스 아래로 보이는 얇은 입술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가 있었고 고개를 숙인 채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행복에 젖은 얼굴이었다.
허정아는 분노로 눈앞이 벌겋게 물드는 것 같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허정아는 얼른 두 사람의 뒤를 쫓아갔다.
몇 발자국 내딛기도 전에 윤솔과 진민준은 등 뒤에 카메라를 든 기자들을 줄줄이 단 채 나란히 걸어오고 있는 온지우와 허주원을 맞닥뜨렸다.
네 사람 사이에 일순 어색한 적막이 감돌았다. 온지우가 맨 먼저 경직된 분위기를 깨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에요, 윤솔 씨.”
윤솔은 고개를 살짝 까닥여 보였다.
“한가하던 참에 구경하러 와봤어요. 꽤 흥미롭네요.”
그 말에 온지우는 놀란 듯 외마디 감탄을 내뱉었다.
“윤솔 씨도 제 그림을 좋아해 주실 줄 몰랐어요. 영광이에요.”
참 여우 같은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전시회가 흥미로웠다는 칭찬 한마디에 온지우는 당연히 자신의 그림을 좋아해 줄 줄 알았다며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다.
윤솔이 모르면서 아는 척한다며 에둘러 조롱한 거나 다름없었다.
윤솔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저는 예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여기 있는 진민준은 데뷔하기 전에 미술 전공이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잠시 뜸을 들이던 윤솔은 이내 진민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온지우 씨 그림, 어떤 것 같아?”
“별론데.”
그 말에 윤솔은 짐짓 나무라는 투로 속삭였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온지우 씨가 우리를 내쫓을지도 몰라.”
진민준의 신랄한 평가에 안색이 어두워졌던 온지우는 윤솔의 말을 듣고는 억지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전공자라 그런지 날카로우시네요. 진민준 씨에 비하면 변변찮은 수준이죠.”
진민준은 조금도 겸손을 떨지 않았다.
“네, 그래서 일전에 콜라보를 제안하셨을 때 매니저한테 거절해 달라고 부탁한 거니까 너무 마음에 두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 그럼요.”
온지우는 분한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이 정도면 충분한 듯싶어 윤솔은 진민준의 팔을 살짝 잡았다.
“됐어, 그만해. 네가 이렇게 싫어할 줄 알았으면 오지 말걸 그랬어. 온지우 씨를 방해하지 말고 우린 이만 가자. ”
“솔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두 사람은 곧장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 처음부터 끝까지 윤솔은 온지우의 옆에 있는 사내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에 반해 허주원의 어둡고 짙은 시선은 윤솔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솔이’라는 호칭이 거슬리는지 미간을 찌푸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