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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이건 또 무슨 수작이야

  • 허주원은 아무 말 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문서를 노려보았다. 숨이 막힐 듯한 적막이 흘렀다.
  • 윤솔은 어깨를 으쓱하며 정적을 깨뜨렸다.
  • “그럼 난 볼 일이 끝났으니 이만 가볼게. 월요일 오전 9 시, 구청에서 봐.”
  • 그러고는 손을 들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귀 뒤로 넘겼다.
  • “축하해. 당신은 이제 자유야. 마침내 나 같은 뻔뻔한 여자로부터 벗어났어.”
  • 그렇게 말하며 윤솔은 자조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 “이건 또 무슨 수작이지?”
  • 마침내 허주원이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지만 내뱉어진 말은 평소와 다름없이 윤솔의 가슴을 후벼파는 비수가 되어 날아왔다.
  • 윤솔은 싸늘해진 눈빛으로 허주원을 응시했다.
  • “이번엔 진짜이니까 안심해. 이번이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자 마지막 기회이니 소중하게 생각해.”
  •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허주원이 보는 앞에서 궁상맞게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 할 말을 마친 윤솔은 결연히 몸을 돌리고서 허주원의 사무실을 나섰다.
  • 윤솔이 모퉁이에서 사라지고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윤솔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허주원은 그제야 윤솔이 놓고 간 이혼 합의서를 집어 들었다.
  • 처음부터 끝까지 윤솔이 직접 작성한 이혼 합의서였지만 허주원의 재산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다. 빈털터리로 나가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 윤솔이 이혼을 제기한 건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지난 3 년 동안 윤솔을 아내로 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 하지만 위자료를 한 푼도 받지 않겠다는 건 솔직히 의외였다. 믿을 수도 없었고.
  • 그도 그럴 것이 허주원이 알고 있는 윤솔은 욕심이 많은 여자였다.
  • 몇 년 전 길가에 쓰러진 임청을 구해준 윤솔에게 보답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묻자 윤솔은 주저 없이 허주원과의 결혼을 원한다고 했었다.
  • 하지만 애석하게도 윤솔은 주판을 잘못 놓아도 한참 잘못 놓았다.
  • 언젠가 허주원이 결혼생활을 참지 못하고 이혼을 원하게 될 경우를 대비해 혼인신고를 하기 전에 미리 재산 공증을 마쳤다.
  • 애초부터 윤솔은 아무리 용을 써도 재산 분할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 보아하니 이번에도 그냥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한 수작질인 듯했다.
  • 허주원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이혼 합의서를 한쪽에 내팽개쳤다.
  • 비플라이 컴퍼니를 나선 윤솔은 온통 회색빛의 빌딩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소율의 스포츠카로 다가갔다.
  •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소율이 조수석 문을 열고서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 “어때? 사인했어?”
  • 윤솔은 몸을 낮추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 “아니.”
  • “왜? 온지우가 돌아왔으면 허주원도 서둘러야 되는 거 아냐?”
  • 윤솔은 안전벨트를 매며 소율을 힐끗 바라보았다.
  • “율아,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 입만 열면 이렇게 그녀의 심장을 찔러대니, 10년이 넘는 우정이 아니었다면 바로 뉴스 일면을 장식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 마음이 읽히자 소율은 멋쩍게 웃으며 코를 만지작거렸다.
  • “이혼한 사람이 이렇게 기를 펴고 다니는 걸 처음 봐서 그래. 정말 체념한 건지, 아니면 홧김에 지른 건지 궁금해서 그랬어.”
  • “제발 양심 챙겨, 소율아!”
  • 초상난 데 춤추고 있는 소율이 성가셔진 윤솔은 아예 눈을 감고 시끄러운 세상을 단절시켰다.
  • 그로부터 30 분이 지나고 스포츠카가 천천히 멈춰 서는 느낌에 윤솔은 스르르 눈을 뜨고서 안전벨트를 풀었다.
  • “고마워. 수고했어.”
  • 차에서 내린 윤솔은 곧장 캐리어를 내리기 위해 트렁크로 향했다.
  • 소율은 운전석에서 윤솔을 향해 손키스를 날리며 말했다.
  • “몰래 울지 마. 사랑해, 솔아!”
  • 그러고는 얼른 차에 시동을 걸었다. 붕 하는 소리와 함께 어느새 저만치 나아간 빨간색 스포츠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윤솔은 피식 웃었다.
  • 저런 것도 친구라고!
  • 별장은 오기 전에 미리 이모님께 부탁해 청소를 마친 상황이었다.
  • 윤솔의 음성, 지문, 얼굴을 전부 인식할 수 있는 도어록에 대고 ‘리리, 문 열어’라고 외치자 단향목으로 만든 문이 저절로 안으로 열렸다.
  • “어서 오세요, 주인님.”
  • “리리, 물 끓여줘.”
  • 윤솔은 캐리어를 끌고 2층 안방으로 올라갔다. 캐리어 안에는 허 씨 가문에 시집갈 때 윤솔이 가져간 혼수가 들어있었다.
  • 짐을 풀고 나니 물도 막 끓었다. 머그컵에 냉수를 조금 섞어서 머그컵에 가득 부은 윤솔은 홈바에 기댄 채 벌컥벌컥 들이켰다.
  • 그때, 눈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에 윤솔은 일순 멈칫했다.
  • 소율이 떠나기 전 남긴 말을 떠올린 윤솔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 소율이 앞에서는 멋있었는데.
  • 그나마 다행이었다. 혼자 있을 때 눈물이 쏟아져서.
  • 오전 내내 삼키고 삼켰던 눈물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윤솔은 결국 컵을 내려놓고서 홈바에 엎드린 채 울음을 터뜨렸다.
  • 허주원을 10 년 동안 사랑했지만 3 년간의 굴욕적인 결혼 생활을 제외하고 그녀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 억울하고 분하고 마음이 찢어질 것 같지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허주원은 널 사랑하지 않아, 윤솔아.
  • 허가를 나오고 이틀 동안 윤솔은 종일 잠만 잤다. 자는 내내 이상한 꿈을 꿨다.
  • 꿈속에서 윤솔은 열다섯 살, 허주원을 처음 만났던 날로 돌아갔다. 그때 윤솔은 순진하게도 그 할머니가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정작 상대의 눈에 윤솔은 사냥감이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 눈 깜짝할 사이에 사방에서 튀어나온 사내들은 윤솔을 짐짝처럼 들어 차에 실었다.
  • 윤솔은 겁에 질린 채 몸을 바들바들 떨며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좁고 어두운 골목은 윤솔의 처절한 외침 외에 절망적인 적막만 감돌았다.
  • 그녀를 구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곧 다가올 운명을 직감하고 체념했을 즈음, 한 소년이 윤솔을 붙잡고 있던 사내를 걷어차고서 그녀의 손을 잡고 그 절망적인 골목을 뛰쳐나갔다.
  • 그렇게 소년이 멈춰 설 때까지 한참을 달렸다.
  • 소년이 멈춰 서자 덩달아 멈춰 선 윤솔은 그제야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닮은 소년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 소용돌이가 일렁이는 듯한 어둡고 짙은 눈동자는 바라보기만 해도 빠져들 것 같았다.
  • “이름이 뭐야?”
  • 안전해졌다는 것을 확인한 윤솔은 긴장하면서도 기대에 찬 목소리로 소년의 이름을 물었다.
  • “허주원.”
  • 소년의 목소리는 그의 눈동자만큼이나 매혹적이었다. 윤솔은 자신의 심장이 그렇게 빨리 뛸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 “구해줘서 고마워.”
  • “이제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 난 갈게.”
  • 소년은 윤솔을 잡고 있던 손을 놓더니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 윤솔은 본능적으로 소년을 쫓아갔다.
  • “허주원, 우리—”
  • 하지만 다음 순간, 소년 허주원의 얼굴은 장성한 허주원의 얼굴로 바뀌었고 허주원은 싸늘한 눈빛으로 혐오스럽게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 “윤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
  • 윤솔은 잠에서 번쩍 눈을 떴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옆에서 울리는 알람 소리에 윤솔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들어 촉촉하게 젖은 눈가를 쓸었다.
  • “리리, 알람 꺼줘.”
  • 시끄럽게 울려대던 알람이 뚝 그치고 방안은 이내 다시 고요한 적막감에 휩싸였다.
  • 윤솔은 협탁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30분 전에 소율에게서 힘내라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 오늘은 월요일, 허주원과 이혼하기로 했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