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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얘기 좀 해

  •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는 빨간 드레스 차림의 윤솔을 보며 심현준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 옆에 있던 이문성이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
  • “왜?”
  • “윤솔이 위자료를 한 푼도 요구하지 않았대.”
  • 그러자 이문성이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들은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 “그 말, 누구한테 들었어? 허주원한테서 위자료를 받은 게 아니라면 무슨 돈으로 골든벨을 울려? 오늘 술값만 해도 6억은 훨씬 넘었을 텐데 윤솔이 자기 돈으로 6억을 낼 수 있는 사람처럼 보여?”
  • 심현준도 긴가민가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 “허주원이 직접 나한테 얘기한 거야.”
  • 그 말에 이문성은 일순 멈칫했다.
  •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 같은 시각, 윤솔의 기분도 심현준과 이문성 못지않았다. 오랜만에 놀러 온 술집에서 허주원의 친구, 그것도 그냥 친구가 아닌, 죽마고우들을 마주치다니.
  • 똥 씹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윤솔의 모습에 소율은 칵테일 한 잔을 건네주었다.
  • “왜 그런 표정이야? 설마 이제 와서 허주원과 이혼한 걸 후회하는 건 아니지?”
  • 그 말에 윤솔은 바로 눈을 희번덕거렸다.
  • “네 봉이 되어주기로 한 걸 후회하고 있어!”
  • 그녀가 돈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이렇게 흥청망청 탕진하는 건 제아무리 세계 최고 갑부라고 해도 가슴 아플 것이다.
  • 이혼을 한 번밖에 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두 번 했다가는 재산을 전부 거덜 내고 말 것이다.
  • 윤솔의 말에 쯧 하고 혀를 차며 윤솔의 옆자리에 앉은 소율은 어깨로 윤솔을 부딪쳤다.
  • “그럼 뭐가 문젠데? 쓰라린 과거를 회상하기라도 했어?”
  • 윤솔은 대답 대신 칵테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달짝지근하니 생각보다 맛있었다. 참지 못하고 한 모금 더 들이켠 윤솔은 그제야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 “8시 방향 부스에 누가 있나 봐.”
  •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소율은 부스에 앉은 사내들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들고 있던 술잔을 놓칠 뻔했다.
  • “무슨 재수가 이래? 너 이 정도면 굿을 해야 되는 거 아냐?”
  • 윤솔은 어깨를 으쓱했다.
  • “정말 네 말대로 굿이라도 할까 봐.”
  • 분명 이혼하고 다시 태어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자리이건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 구석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윤솔의 모습은 여러모로 보아도 실연을 당한 여인의 모습일 것이다.
  • 허주원의 소꿉친구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자 이대로 궁상맞은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 칵테일을 단숨에 들이켠 윤솔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 “춤출까?”
  • 그 말에 소율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 “우리 정말 오랜만이지 않아?”
  • 윤솔은 싱긋 미소 지었다.
  • “그러고 보니 그러네.”
  • “가자. 무대를 찢으러!”
  • 윤솔의 손을 잡아끌고서 기세등등하게 DJ에게 다가간 소율은 DJ의 손에서 다짜고짜 마이크를 낚아챘다.
  • “안녕하세요, 여러분, 즐거우셨나요! 제 친구 윤솔을 소개할게요. 오늘 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의 술값을 이 친구가 계산해 줄 테니 마음껏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오늘 제 친구가 다시 태어난 걸 축하하기 위해 여러분에게 평생 잊지 못할 공연을 선사할 예정이니 기대해 주세요! 오늘 여러분들은 눈이 아주 즐거우실 겁니다! 유후, 같이 즐겨주세요!”
  • 처음에는 창피해하던 윤솔도 대배우인 소율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모습에 결국 자포자기했다.
  • 소율이 DJ와 무어라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이내 무대 위 조명이 바뀌었다.
  • 방금 전까지 무대에서 신나게 몸을 흔들어대던 사람들도 눈치 있게 물러나고 이윽고 무대 위에는 윤솔과 소율 단둘뿐이었다.
  • 곧이어 천장에서 댄스봉이 천천히 내려왔다.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무대 위에 선 윤솔은 설렘으로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 허주원과 결혼하고 고분고분하고 온화한 조강지처 모습을 연기를 하느라 성질을 전부 죽인 덕분에 원래 자신의 모습을 잊고 살았다.
  • 윤솔은 다른 사람들의 동정과 연민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오로지 복종일 뿐, 그녀는 여왕이 될 것이다!
  • 음악이 시작되자 윤솔은 소율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 폴 댄스는 오디션을 준비하던 소율 덕분에 입문하게 되었다.
  • 소율이 오디션을 볼 때에는 함께 무대에 서기도 했고 그러다 나중에 폴 댄스의 매력에 흠뻑 빠져 소율을 따라 학원을 끊기도 했다.
  • 20년간의 우정과 7, 8년간의 춤 교감을 쌓아온 두 사람은 미리 리허설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환상적인 호흡을 자랑했다.
  •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진 가운데 윤솔과 소율은 한 손으로 댄스 봉을 살짝 잡은 채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았다. 내딛는 걸음마다 요염함이 넘쳐흘렀다.
  •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서로의 손과 팔을 부드럽게 쓸어내리자 무대 아래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 검은색과 빨간색의 대조되는 드레스를 입은 두 사람이 한 몸처럼 얽혀 있는 모습에 방금 막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장경아는 기절할 뻔했다.
  • 어찌 된 게 소율은 연예인으로서의 자각이 이리도 없단 말인가!
  • 장경아는 황급히 무대 옆으로 달려갔다.
  • “소율, 너 미쳤어?”
  • 술이 몇 잔 들어가자 자신의 신분을 망각했던 소율은 매니저의 호통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목을 움츠린 채 옆에서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고 있는 윤솔을 힐끗 바라보았다.
  • 입을 헤벌쭉 벌리고 댄스 봉에 감긴 길고 뽀얀 다리를 바라보던 소율은 언뜻 무대 아래에서 불청객이 다가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 눈썹을 치켜올리고 윤솔과 무대 아래를 번갈아 바라보던 소율은 잠자코 입을 다문 채 윤솔을 무대 위에 홀로 남겨두고 슬그머니 무대에서 내려왔다.
  • 원래도 눈에 띄는 외모였지만 빨간 드레스를 입고 조명 아래에 선 윤솔은 탐스러운 모란처럼 화려했다.
  • 덕분에 무대에서 내려오는 소율의 모습에 의아해하던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윤솔에게 쏠렸다.
  • 그 시각, 클럽으로 막 들어선 허주원은 평소 고분고분하고 순한 양 같던 여인이 똬리를 튼 뱀처럼 댄스 봉에 찰싹 달라붙은 채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우뚝 멈춰 섰다.
  • 긴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빛 사이로 흩날리며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 고양이처럼 요염한 눈매를 반짝이며 나른하게 댄스 봉을 타고 올라가는 윤솔은 가시 달린 장미처럼 고고하게 빛났다.
  • 빨간 드레스 아래로 길게 뻗은 희고 가는 다리가 댄스 봉에 감긴 모습이 유독 시선을 끌었다.
  •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댄스 봉을 타고 내려온 윤솔은 사뿐하게 바닥을 내딛고서 뼈 없는 연체동물처럼 유연하게 댄스 봉에 기댄 채 마무리 동작을 했다.
  •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댄스 봉에서 손을 뗀 윤솔은 무대를 내려가려던 찰나, 무대 아래에서 그녀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는 허주원과 시선이 얽혔다.
  • 3미터가 넘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도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과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진 검은 눈동자가 똑똑히 보였다.
  • 윤솔은 얼른 시선을 거두어들이고서 무대를 내려갔다.
  • “짱짱짱! 너무 멋있었어! 우리 예쁜 언니 다리를 마사지해 줄까요?”
  • 소율이 건네준 주스를 받아든 윤솔은 손가락을 들어 올리고서 소율의 이마를 튕겼다.
  • “이런다고 날 무대 위에 버리고 비겁하게 혼자 내려온 걸 용서할 줄 알아?”
  • “잘못했어, 잘못했어, 잘못했어!”
  • 이렇게나 코미디언의 기질이 농후한 사람에게 장경아는 하필이면 도도하고 새침한 콘셉트를 정해주다니.
  • 윤솔은 소율이 여태 콘셉트가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도 참 재주라고 생각했다.
  • “떨어져!”
  • 윤솔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엉겨 붙는 소율을 매정하게 밀어냈다. 그래도 단념하지 않고 계속 안기려는 소율의 모습에 윤솔은 체념하듯 피식 웃었다.
  • “나 지금 땀투성이야. 그만 안겨!”
  • 그 말에 소율이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윤솔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 “허주원 왔어. 봤어?”
  • “응.”
  • 윤솔은 고개를 숙인 채 주스를 움켜쥐었다.
  • “언제 알았어?”
  • 윤솔은 대답 대신 싱긋 미소를 지었다. 소율의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던 찰나,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와. 얘기 좀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