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3화 진심이야?

  • 윤솔은 특별히 옷장에서 프릴이 달린 오프숄더와 빨간 세미 스커트를 골랐다.
  • 허리까지 오는 밤색 긴 생머리는 볼륨을 넣어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서 1 시간 동안 공들여 화장을 했다.
  • 빨간 세미 스커트와 같은 계열의 강렬한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은 고혹적인 카리스마를 풍겼다.
  • “리리야, 이혼하고 올게.”
  • “주인님, 잘못된 사람과 작별을 해야지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 그 말에 윤솔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 “고마워, 다녀올게.”
  • “다녀오세요, 주인님.”
  • 윤솔이 구청 입구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8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문을 열 시간은 아니었다.
  • 윤솔이 구청에 도착하자마자 귀신같은 타이밍에 소율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 “솔아, 구청에 도착했어?”
  • “방금 도착했어.”
  • “그 쓰레기 같은 놈한테서 벗어나고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미리 행운을 빌어줄게!”
  • 그때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익숙한 검은색 차량이 멈춰 서는 모습이 보였다.
  • “허주원 왔어. 나중에 다시 얘기해.”
  • “그래, 그래! 이혼 잘 하고. 허주원 앞에서 기를 펼 수 있도록 깜짝 선물을 준비했으니까 기대해!”
  • “깜짝만 있고 선물은 아닌 거 아냐?”
  • 통화를 마친 윤솔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허주원을 바라보며 냉소를 흘렸다.
  • “좋은 아침. 귀찮게 해서 미안해.”
  • 그렇게 말하며 윤솔은 들고 있던 이혼 서류를 허주원에게 내밀었다.
  • “내 말 안 믿는 거 알아. 그래서 다시 준비했어. 자, 일전에 내가 준 건 읽어봤겠지? 지난번과 똑같은 양식이니까 사인해. 구청에서 문을 열면 바로 수속을 밟자. 그러면 당신은 나한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어.”
  • 그 말에 내내 무표정이던 허주원의 얼굴에 드디어 살짝 균열이 생겼다.
  • “진심이야?”
  • 대답 대신 말없이 허주원을 응시하던 윤솔은 대뜸 웃음을 터뜨렸다.
  • “난 당신한테 한 번도 진심이 아니었던 적 없어.”
  • 하지만 허주원은 그녀를 믿지 않았지.
  • 허주원은 윤솔이 자신을 이렇게 쳐다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에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 “문 열었어.”
  • 그렇게 이혼을 원한다면 기꺼이 들어줄 생각이었다. 덕분에 허주원도 불필요한 수고를 던 셈이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 그 순간, 윤솔은 쨍그랑하고 마음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귓전에 울리는 것 같았다.
  • 허주원이 진심이냐고 물었을 때 윤솔은 순진하게도 허주원이 이혼을 거부하고 그녀를 말려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었었다.
  • 하지만 허주원의 입에서 나온 말은 고작 문이 열렸다는 말이었다.
  • 참 대단한 사람이야.
  • 윤솔은 웃음기를 거두고서 구청으로 발을 내디뎠다.
  • 혼인신고를 하러 온 커플들은 많았지만 아침 댓바람부터 이혼을 하러 온 사람은 윤솔과 허주원 단둘뿐이었다.
  • 이혼하러 온 사람답지 않은 화려한 윤솔의 복장에 직원이 의아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 “합의이혼이세요?”
  • “네.”
  • 윤솔은 망설임 없이 대답하며 미리 준비한 서류들을 접수창구로 밀어 넣었다.
  • 이혼 절차는 결혼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었다. 서류에 미리 사인도 마친 상태였기에 구청에서 도장을 찍기만 하면 되었다.
  • 그로부터 불과 5분 만에 두 사람은 구청에서 나왔다.
  • 허주원은 이혼 증명서를 발급받은 이후로 그녀에게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 윤솔은 걸음을 멈추고서 서서히 멀어지는 허주원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 그 순간, 마세라티 한 대가 돌연 길가에 멈춰 섰다. 눈에 띄는 승용차 덕분에 슬픈 감정이 어느 정도 옅어진 윤솔은 저도 모르게 마세라티에 시선을 고정했다.
  • 그때, 마세라티의 문이 열리고 선글라스를 낀 사내가 차에서 내려왔다.
  • 어쩐지 낯익은 얼굴이었다. 윤솔이 눈을 가늘게 뜨고서 사내의 정체를 파악하려던 찰나, 사내가 입을 열었다.
  • “윤솔아.”
  • 사내는 다름 아닌, 작년에 사극 웹드라마로 인기를 끌었던 라이징 스타, 진민준이었다.
  • 진민준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윤솔에게 다가왔다.
  • “자유의 몸이 된 걸 축하해. 소율 누나가 데리러 오라고 보냈어.”
  • 윤솔은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 “소율이 미쳤다고 너도 같이 미친 거야? 새 영화 촬영을 이제 막 끝내지 않았어? 대체 무슨 배짱으로 여기 온 거야? 스캔들이 두렵지도 않아?”
  • “화내지 마, 솔이 누나. 소율 누나가 그랬단 말이야. 방금 허주원과 이혼했으니 허 씨 가문에서 두 사람 이혼 소식을 먼저 발표할 거라고. 그러니까 우리가 먼저 여론의 유리한 위치를 차지해야지. 아니면 재벌 가문에서 쫓겨난 불쌍한 여자로 몰릴 거란 말이야!”
  • 의분이 가득 찬 진민준의 표정에 윤솔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 “거기까지 신경 써 주다니, 너무 고마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
  •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파파라치 무리가 우르르 몰려들었다.
  • 진민준이 재빨리 윤솔을 보호하기 위해 품에 안았지만 너무 형식적으로 보호한 탓에 윤솔의 얼굴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 그때, 누군가 윤솔을 뒤에서 밀치고 지나가는 통에 윤솔은 그만 진민준의 품에 고개를 박았다.
  • 진민준은 수많은 소녀들의 이상형답게 얼굴만큼은 끝내주게 잘생겼다. 윤솔은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으면 저 얼굴에 죄책감이 들 것 같았다.
  • 허주원과 결혼한 지 3년이 지났지만 허주원과는 한 번도 이렇게 온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진민준의 품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향수 냄새가 그의 존재를 상기시켰다.
  • 윤솔은 괜히 얼굴이 뜨거워졌다. 진민준의 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버둥거리자 진민준이 그녀의 머리를 감싸고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 귓가를 파고드는 사내의 힘찬 심장 박동 소리와 집요하게 질문을 퍼붓고 사진을 찍어대는 시끄러운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머리가 어질거렸다.
  • 윤솔은 넋이 나간 얼굴로 진민준한테 안긴 채 진민준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 같은 시각,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세워진 검은색 승용차 안에서 허주원은 차창 밖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조수석에 앉은 양주호가 주저하며 물었다.
  • “대표님, 사, 아니, 윤솔 씨를 도와드릴까요?”
  • 그제야 시선을 거두어들인 허주원은 냉랭한 표정으로 양주호를 힐끗 바라보았다.
  • “양 비서, 오지랖이 취미야?”
  • 그 말에 양주호는 흠칫 몸을 떨었다.
  •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 할 말을 잃은 양주호는 황급히 운전기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 “장 기사님, 가시죠.”
  •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허주원의 안색이 어두워진 것 같았다.
  • 확실히 허주원은 지금 기분이 많이 더러웠다.
  • 그의 아내, 아니, 전처는 그와 이혼한 지 10 분도 채 되지 않아 구청 앞에서 다른 사내와 부둥켜안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 리 만무했다.
  •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아내가 바람 나서 이혼한 줄로 알 거 아냐?
  • “차 세워!”
  • 그것만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 “가서 저 여자를 데려와!”
  • 서슬 퍼런 어조에 양주호는 일순 멈칫했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 하지만 고개를 돌린 순간, 음산하게 번뜩이는 허주원의 눈빛을 발견한 양주호는 얼른 차에서 내려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두 사람을 향해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