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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내 앞에서 그 여자를 언급하지 마

  • “사, 윤솔 씨.”
  • 갑작스럽게 바뀐 호칭에 미처 적응하지 못한 양주호는 몇 번이고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윤솔은 그녀의 머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힘껏 잡아당겼다.
  • 진민준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올리자 어느새 이 난리통 속으로 뛰어든 허주원의 비서가 보였다.
  • “무슨 일이세요, 양 비서님?”
  • 기자들에게 이리저리 떠밀려 비틀거리던 양주호는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서 입을 열었다.
  • “윤솔 씨, 저희 대표님께서 잠시 보자고 하십니다.”
  • 그 말에 윤솔은 눈썹을 까딱이며 양주호를 넘어 10여 미터 떨어진 검은 세단을 바라보았다.
  • 특수 재질로 처리된 차창 때문에 차 안의 사람이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윤솔은 차 안의 사람이 그녀를 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윤솔은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
  • “죄송하지만 양 비서님, 대표님께 말 좀 전해주세요. 괜히 구설수에 오를 수 있으니 앞으로 마주친다고 해도 서로 낯선 사람으로 대하는 게 좋겠다고요.”
  • 둘러싸고 있던 기자들이 연이어 질문을 던지자 진민준은 팬들이 오면 더욱 일이 커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얼른 윤솔을 끌어당겼다.
  • “일단 타.”
  • 하고 싶은 말은 이미 다 했기에 윤솔은 군말 없이 진민준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
  • 안전벨트를 매자마자 진민준의 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 윤솔은 순순히 차에 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지금쯤 진민준의 팬들에게 갈기갈기 찢겼을 것이다.
  • 마세라티는 재빨리 팬들과 기자들을 뒤로한 채 서서히 난리통을 벗어났다.
  • “솔이 누나, 괜찮아? 다친 덴 없어?”
  • 윤솔은 진민준을 샐쭉 흘겨보았다.
  • “앞으로 소율이 하는 말은 대충 흘려들어.”
  • 깜짝 선물이라더니, 역시나 소율은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진민준의 스캔들 상대가 되어 매스컴을 장식하게 될 것을 생각하자 윤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 그러자 진민준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 “난 소율 누나 아이디어가 마음에 드는데.”
  • 그 말에 윤솔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가에 헛웃음을 띠였다.
  • “소율이랑 어울리더니 나쁜 것만 배웠네.”
  • “그렇게 말하면 내가 너무 억울하잖아. 난 그냥 솔이 누나가 괴롭힘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을 뿐이야. 설령 그 상대가 허주원이라고 해도 용서할 수 없어.”
  • 빨간 신호등으로 바뀌자 기어를 돌리고 차량을 멈춰 세운 진민준은 고개를 기울여 윤솔을 응시했다.
  • 한 점의 장난기도 없는 진지한 표정에 일순 가슴이 뭉클해진 윤솔은 피식 웃었다.
  • “나 그렇게 쉽게 당할 사람 아니야. 아무도 날 괴롭힐 수 없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 설령 허 씨 일가라도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 허 씨 일가가 그녀의 머리 꼭대기에서 제멋대로 활보하도록 내버려 두었던 건 언젠가 허주원이 그녀를 돌아봐줄지도 모른다는 헛된 기대 때문이었다.
  • 이제 현실을 깨달았으니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 한편, 양주호는 마세라티가 멀리 사라진 뒤에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그를 둘러싸고 있던 기자들도 우르르 마세라티를 쫓아갔다.
  • 양주호는 허주원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며 멀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는 검은색 승용차를 힐끗 바라보았다.
  • “대표님.”
  • 차로 돌아온 양주호는 조심스럽게 허주원의 눈치를 살폈다.
  • “윤솔 씨께서 거부하셨습니다.”
  • 허주원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 “나도 눈이 달렸어.”
  • 방금 차 안에서 윤솔이 그 남자 배우의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 양주호는 입술을 오므렸다.
  • “윤솔 씨께서 대표님께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 그 말에 허주원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 누그러졌다.
  • “뭐라고 하던?”
  • 그래도 양심은 있네. 양주호를 통해 말을 전해달라고 할 줄도 알고,
  • “윤솔 씨께서 괜히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으니 앞으로 마주친다고 해도 윤솔 씨를 낯선 사람으로 대해달라고 하셨습니다.”
  • 양주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허주원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허주원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콧방귀를 뀌었다.
  • “좋아, 앞으로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그 여자를 언급하지 마!”
  • “네, 대표님.”
  • 양주호는 순순히 대답했다.
  • 오랫동안 허주원을 옆에서 모신 베테랑 비서로서 양주호는 허주원이 지금 분노에 휩싸여 있는 상태라는 것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 “시동 걸어!”
  • 싸늘하고 매서운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운전사는 흠칫 몸을 떨며 얼른 사과했다.
  • 허주원은 아무 말 없이 음산한 얼굴로 차창 밖으로 아직 완전히 흩어지지 않은 사람들을 응시했다.
  • 파란색 마세라티는 유일한 주차 공간에 멈춰 섰다. 윤솔은 차창 밖을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 “여기도 소율이 시켜서 온 거야?”
  • 그 말에 안전벨트를 풀던 진민준은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 “소율 누나도 누나가 걱정되어서 그런 거야.”
  • 복숭아꽃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에 윤솔은 일순 할 말을 잃었다.
  • “너 이 자식, 방금 이혼한 누나 앞에서 그렇게 예쁘게 웃지 마. 내가 영계한테는 손을 대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친한 사이라 방심하는 거야?”
  • 그러자 진민준이 가볍게 혀를 찼다.
  • “솔이 누나가 원한다면 깨끗이 씻고 누나 침대에 누워있어줄 수 있어.”
  • “…”
  • 괜히 건드렸네.
  •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곧장 빌딩으로 들어갔다.
  • 윤율엔터테인먼트는 설립된 지 5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난 2 년 동안 수많은 라이징 스타를 배출했다.
  • 진민준도 그중 한 명이었다.
  • 지난달에 영화 촬영을 마치고 공백기에 접어든 소율은 너무 한가한 탓인지 윤솔이 고해를 벗어나자마자 바로 이따위 짓을 계획했다.
  • 회사에 거의 얼굴을 비춘 적 없었던 탓에 직원들은 윤솔이 오너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진민준이 직접 모시고 들어오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저마다 공손히 대했다.
  • 소율의 사무실에 도착하자 진민준이 우뚝 멈춰 섰다.
  • “소율 누나가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난 먹을 것 좀 갖다 드리라고 할게.”
  • 그 말에 윤솔은 피식 웃으며 진민준을 샐쭉 흘겼다.
  • “왜? 사고는 있는 대로 쳐놓고 이제 와서 겁이라도 나나 보지?”
  • 소율과 진민준이 합세해서 이런 난장판을 만들어 준 덕분에 윤솔은 졸지에 유명해지지 않는 게 더욱 어려워졌다.
  • 진민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사무실 문을 열어주었다.
  • “복수를 하려면 원수를 찾아야 하고 빚을 받으려면 빚쟁이를 찾아야 하는 법. 이번 건 소율 누나가 직접 꾸민 일이야.”
  • 윤솔은 헛웃음을 삼켰다.
  • “됐어. 이제 들어가서 쉬어. 모처럼 쉬는 날에 뭐 하러 사서 고생을 해. 그런다고 회사에서 상을 주는 것도 아닌데.”
  • “누나가 날 탓하지 않으면 됐어.”
  • 말을 마치고 윤솔의 눈치를 살피던 진민준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 사무실로 들어선 윤솔은 문을 닫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퉁이를 돌자 고급스러운 소파에 축 늘어져 있는 소율의 모습이 보였다.
  • “네 팬들은 네가 사석에서 이러고 있는 거 알아?”
  • 소율은 윤솔의 조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블릿을 든 채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 “얼른 와, 솔아. 너 실검에 올랐어!”
  • “그거 네가 주도한 일 아니야?”
  • 소율은 얼른 윤솔을 끌어당겨 옆에 앉혔다.
  • “이것 좀 봐. 어때? 이래도 그 사람들이 네가 허주원에게 목을 맨다고 비웃을 수 있는지 두고 볼 거야!”
  • 그렇게 말하며 소율은 들고 있던 태블릿을 윤솔의 손에 쥐여주었다.
  • “내가 다 준비했으니까 넌 아무 걱정 하지 마. 오늘은 진민준이지만 며칠 뒤에 현우가 광고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면 현우를 보낼 거야!”
  • ‘진민준의 오랜 짝사랑 상대’라는 새로운 역할에서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이어진 소율의 말에 윤솔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 당황스러워하는 윤솔과 달리 소율은 아직 부족하다고 느끼는 눈치였다.
  • 소율은 윤솔이 지난 3 년 동안 허 씨 가문에서 당한 것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났다.
  • 이제 그 고통에서 벗어났으니 당연히 기를 펼 수 있게 힘을 잔뜩 실어주어 윤솔을 멸시했던 사람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 “이제 다시 싱글로 돌아왔으니 싱글 파티를 열어야지! 내가 생각해 둔 게 있는데, 야누스 클럽을 대관해서 우리 솔이의 호탕한 씀씀이를 자랑하는 거야. 어때?”
  • “… 돈은 네가 낼 거야?”
  • 그 말에 소율의 입가에 머물렀던 미소가 딱딱하게 굳었다.
  • “그게, 저기, 내가 내면 너무 성의 없어 보이잖아!”
  • 윤솔은 가소롭다는 듯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 “돈도 없으면서 어디서 부자 행세야?”
  • “난 없지만 넌 많잖아!”
  • “…”
  • 이런 것도 친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