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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치명적인 이혼

이토록 치명적인 이혼

히아신스

Last update: 2024-05-11

제1화 역겨운 허 씨 일가

  • “어머, 새언니, 왜 그래요? 가출이라도 하시게요?”
  • 윤솔이 캐리어를 끌고 계단을 내려오려던 찰나, 허정아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곧바로 등 뒤에 따라붙었다.
  • 냉담한 눈빛으로 허정아를 힐끗 훑어보던 윤솔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 1층에 발을 내딛자마자 언제나 윤솔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시모 임청이 못마땅하다는 듯 눈을 흘겼다.
  • “아침 댓바람부터 여행 가방을 들고 어딜 가려는 게냐?”
  • 지난 3 년 동안 고부로 지내면서 저 모습이 곧 닥쳐올 비난의 전조라는 것을 윤솔은 이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예전 같았으면 임청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 얼른 사과하고 조심스럽게 달랬을 윤솔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 허주원도 떠날 마당에 이제 더 이상 이 성질 고약한 할망구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
  • “어딜 가든 허가에 다시 돌아올 일 없을 테니 안심하세요.”
  •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싸늘한 냉기가 흐르는 단호한 눈빛은 허 씨 일가의 눈치를 살피며 비위를 맞추던 조심스러운 평소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 자신의 앞에서는 고개를 들 엄두도 내지 못하던 비천한 며느리가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갑자기 말대꾸를 하자 임청의 안색이 급격히 딱딱해졌다.
  • “윤솔, 어른한테 이게 무슨 막돼먹은 태도야?”
  •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고운 법이죠.”
  • 그렇게 말하며 윤솔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왠지 모르게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고고한 아우라에 임청은 괜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 “이제 이 시어머니도 안중에 없다 이거야?”
  • 그 말에 임청을 힐끗 바라보던 윤솔은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씩 웃었다.
  • “죄송하지만, 사모님과 전 곧 남남이 될 사이라서요.”
  •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별장 밖에서 자동차 경적 소리가 울렸다.
  • 윤솔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 “저 갈게요, 사모님. 방 안에 두고 온 물건들은 필요 없으니 버리든 태우든 마음대로 하세요. 그리고 다시는 저한테 연락하지 마시고요.”
  • 그러고는 캐리어를 끌고 천천히 현관문을 나서며 한 마디 덧붙였다.
  • “역겨운 허 씨 일가와는 두 번 다시 상종도 하고 싶지 않으니까.”
  • ‘사모님과 전 곧 남남이 될 사이라서요’란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 임청은 ‘역겨운 허 씨 일가’라는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채 고래고래 악을 썼다.
  • “너 미쳤어? 지금 당장 주원이한테 연락해서—”
  • “엄마, 방금 봤어? 아침 댓바람부터 캐리어를 끌고 쇼를 하는 것 좀 봐. 정말 웃겨. 하하하. 일부러 내 앞을 지나간 건 내가 붙잡아 주길 바라고 한 행동은 아니겠지?”
  • 별장에서 걸어 나온 허정아는 꼼짝 않고 서 있는 임청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손을 들어 임청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 “엄마, 왜 그래?”
  • 임청은 대답 대신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입술을 오므렸다.
  • 평소였다면 허주원의 이름만 나와도 바로 고분고분 해지더니 오늘은 듣는 척도 하지 않는 윤솔이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 대문 밖으로 걸어 나간 임청은 쏜살같이 사라지는 스포츠카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응시했다.
  • “저, 정말 간 거야?”
  • 뒤따라 나온 허정아는 입을 삐죽거렸다.
  • “갈 테면 가라고 해. 지우 언니도 돌아온 마당에 지금 안 떠난다고 해도 어차피 오빠가 직접 내쫓았을 거 아냐!”
  • 그 말에 임청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온 씨 가문 막내딸이 돌아왔다면 말 다 한 셈이었다.
  • 내쫓기 전에 알아서 나가주다니, 윤솔이 한 행동 중에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행동이었다.
  • 그 시각, 포르쉐 조수석에 올라탄 윤솔은 이혼 합의서를 뒤적거렸다. 합의서 내용을 샅샅이 훑어보던 윤솔은 만족스레 입꼬리를 올리고 서명란에 이름을 적었다.
  • 그 모습에 옆에서 운전하던 소율이 가볍게 혀를 찼다.
  • “정말 후회 안 해?”
  • 윤솔은 태연한 얼굴로 느릿하게 펜 뚜껑을 닫았다.
  • “그러면?”
  • 허주원의 첫사랑이 돌아왔는데 더 이상 헛된 망상을 품고 있는 건 그야말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 자그마치 3 년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윤솔은 아무리 단단한 얼음벽이라도 녹일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었다.
  • 하지만 애석하게도 허주원의 마음은 오로지 첫사랑에게만 향해 있었다.
  • 어떻게 보면 그녀도 참 뻔뻔스럽긴 했다. 은혜를 갚으라는 구실로 억지로 결혼을 강요하고 사모님 자리를 꿰차고 있었으니. 이제 온지우가 돌아왔으니 물러나야지.
  • 아니면 3 년 동안 온지우를 위해 순결을 지켜온 허주원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너무 미안하지 않은가.
  • 그렇다. 지난 3 년 동안 윤솔은 허주원과 한 번도 같이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얘기라 망정이지, 아니면 3 년 동안 분수에 맞지 않은 결혼을 했다고 조롱하던 사람들이 또 얼마나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해댔을까.
  • 자그마치 3 년이었다. 충분했다. 7 년간의 철없었던 짝사랑을 이제 미련 없이 떠나보내야 할 때였다.
  • 윤솔은 눈을 가리고서 눈가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었다.
  • 제아무리 소탈한 윤솔이라고 해도 사람인 이상 10 년간의 짝사랑이 이런 식으로 끝을 맺으면 마음이 괴롭기 마련이었다.
  •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하고 빨간 스포츠카가 길가에 멈춰 섰다. 소율은 핸들에서 손을 떼고서 선글라스를 밀어올렸다.
  • “도착했어. 솔이 넌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앞으로 나가. 이 율이가 언제나 뒤에서 따라갈 테니까!”
  • 그렇게 말하며 소율은 입술에 손을 대더니 손키스를 날렸다.
  • 그 모습에 윤솔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 “이제 전장으로 나갈 거야. 건투를 빌어줘.”
  • 지금 윤솔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패기 있게 허주원에게 이혼 합의서를 던질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들로 가득했다.
  • 윤솔은 서류를 들고서 차에서 내렸다. 3 년 동안 비플라이 컴퍼니에 온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물론 프런트 직원의 무례한 대접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 “윤솔 씨, 대표님과 약속을 잡지 않으셨다면 올라갈 수 없어요. 아시다시피 대표님은 바쁜 분이시잖아요. 모든 분들이 예약도 하지 않고 저한테 한마디 언질도 없이 올라갈 수 있다면 프런트 데스크를 세워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안 그래요?”
  • 허주원이 그녀를 얼마나 안중에 두지 않았으면 일개 프런트 데스크 직원조차 그녀를 멸시했다. 심지어 지난 3 년 동안 한 번도 사모님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 윤솔은 눈을 내리깔고 피식 웃었다.
  • “비플라이 직원 교육이 참 별로네요. 내가 허주원의 아내인데 만나려면 약속을 잡아야 한다니. 비플라이 사모님이라고 해도 별거 없네요. 재미없어.”
  • 그렇게 말하며 싸늘한 눈빛으로 프런트 직원을 훑어보던 윤솔은 이내 프런트 직원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 평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윤솔의 모습에 프런트 직원은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건가.
  • 프런트 직원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괜히 애꿎은 그녀한테 불통이 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얼른 대표 사무실에 연락을 넣었다.
  • 덕분에 윤솔이 도착하기도 전에 윤솔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허주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서늘하게 명령했다.
  • “돌려보내.”
  • 5 분 뒤에 회의가 열릴 예정이었기에 윤솔을 만나줄 여유가 없었다.
  • 비서는 짧게 응수하고서 사무실을 나섰다. 사무실에서 나오자마자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다가오는 윤솔이 보였다.
  • 잔꽃 무늬 A 라인 스커트를 입은 윤솔은 분명 단아하고 아름다웠지만 시선이 마주친 찰나, 비서는 오늘따라 윤솔이 어딘가 달라졌다고 느껴졌다.
  • “안녕하세요, 양 비서님.”
  • 비서에게 인사를 건넨 윤솔은 비서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다짜고짜 허주원의 사무실 문을 열었다.
  • “실례 좀 할게. 허 대표가 사인해 줘야 할 서류가 있어서 말이야.”
  • 그렇게 말하며 싸늘한 시선을 받으며 허주원의 테이블로 다가간 윤솔은 들고 있던 이혼 합의서를 내밀었다.
  • “사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