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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난 참 나쁜 여자야

  • 데뷔 전, 진민준은 미술을 전공한 아티스트였다.
  • 열일곱 살 어린 나이에 의례적으로 미대에 합격한 진민준은 열아홉 살에 「해돋이」로 프라다 어워드 3위를 수상했고 이후 해외에서 유명세를 떨쳤다.
  • 진민준 이후 몇 년 동안 프라다 어워드에 선정된 국내 아티스트는 아무도 없었다.
  • 하늘이 내려준 재능이지만 진민준은 오직 취미로만 그림을 그렸다.
  • 그러다 스무 살 때 소율에게 스카우트되어 배우로 정식 데뷔를 했고 지난해 대학을 졸업할 막바지에 또 다른 그림 한 점이 프라다 어워드에 선정되어 연예계와 미술계를 놀라게 했다.
  • 따라서 방금 전 온지우의 그림에 대한 진민준의 평가는 정곡을 찌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 사실 온지우는 그동안 끈질기게 진민준에게 러브콜을 보냈었다.
  • 진민준의 인기를 빌려 자신의 명성을 높일 계획이었지만 진민준이 거절한 탓에 온지우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 외부에서는 온지우와의 콜라보를 거절한 이유가 진민준의 꽉 찬 일정 때문일 것이라 추측했지만 진민준이 직접 온지우의 그림이 별로라고 평가하자 라이브 방송을 보고 있던 시청자들, 특히 진민준의 팬들은 들끓어 올랐다.
  • 윤솔은 오늘의 결과에 아주 흡족했다. 라이브 방송에 뜬 댓글들을 훑어보던 윤솔은 만족스레 입꼬리를 올렸다.
  • 어느새 마세라티가 멈춰 선 것인지 진민준이 고개를 기울인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윤솔은 눈썹을 치켜뜬 채 안전벨트를 풀며 나지막이 한탄했다.
  • “난 참 나쁜 여자야.”
  • 그 말에 진민준은 씩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 “난 나쁜 여자가 좋아.”
  • “놀리지 마.”
  • 차에서 내린 윤솔은 진민준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 “자, 오늘 임무를 끝냈으니까 얼른 돌아가서 보고해!”
  • “밥 한 끼 정도는 사줘야 되는 거 아냐?”
  • 윤솔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꾸했다.
  • “난 요리에 젬병이야. 안녕. 잘 가.”
  • 그러고는 쾅 하고 현관문을 닫아 버렸다.
  • 닫힌 현관문을 한참 바라보던 진민준은 이내 차에 시동을 걸고 별장을 떠났다.
  • 온지우는 전시회에 허주원을 특별 게스트로 초대하고 언론에 연락해 현장을 생중계할 것을 부탁했다.
  • 원래는 댓글 알바를 고용해 허주원과의 케미를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여론몰이를 할 계획이었다.
  • 그러면 윤솔에게 물을 먹일 수도 있었고 나중에 허주원과 결혼하게 되었을 때 여우 같은 년이라고 욕먹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타산 때문이었다.
  • 어쩌면 그때 가서 언론을 매수해 윤솔이 얼마나 자기 분수를 모르는 여자인지 세상에 알릴 수도 있었다.
  • 하지만 윤솔과 진민준의 등장으로 온지우의 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고 그녀의 그림에 대한 진민준의 평가 때문에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온지우는 인터넷에서 뭇매를 맞게 되었다.
  • 그뿐만이 아니었다. 더욱 참을 수 없는 건 윤솔의 외모를 찬양하는 무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 허주원과 나란히 서 있으니 그림같이 어울린다는 댓글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라이브 방송에서 전남편 허주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윤솔과 달리 허주원은 내내 윤솔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며 지나간 인연에 연연하지 않는 자세가 너무 쿨하고 멋지다고 말하기도 했다.
  • 덕분에 윤솔에게 제대로 물 먹일 계획이었던 온지우는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 진민준의 논평 사건은 순식간에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배후에 추동자가 있는 것임이 분명했다.
  • 네티즌들의 추측이 난무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막장 삼각관계 드라마 한 편을 써내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 물론 네티즌들이 뇌피셜한 삼각관계에서 윤솔은 피해자였고 허주원과 온지우는 개 같은 연놈들이었다.
  • 이제 세 사람의 기사 아래에는 온통 허주원이 바람을 피웠다는 증거를 잡은 윤솔은 그 증거를 빌미로 거액의 보상금을 받고 쿨하게 퇴장해 전 남편과 내연녀의 사랑을 이뤄준 게 아니냐는 댓글들이 빗발쳤다.
  • 물론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뒤에서 추동한 조종자는 다름 아닌 소율이었다.
  • 실시간으로 떠오르는 검색어들을 보며 윤솔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너무한 거 아냐?”
  • 그러자 소파에 누워 있던 소율이 발딱 몸을 일으키고서 반박했다.
  • “뭐가 너무해? 지난 3 년 동안 허주원이 널 몇 번 만났고 온지우를 몇 번 만났는데?”
  • 그 말에 윤솔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떠올리니 가슴이 욱신거렸다.
  • 지난 3 년 동안 윤솔이 허주원을 만난 횟수는 열 손가락으로 꼽으려면 꼽을 수도 있었다. 그중 3 번은 허 씨 가문 가족 모임에서였다.
  • 그에 반해 허정아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보고’를 했던 허주원의 행적에 따르면, 허주원은 18 번의 출장을 간 것 중에 8 번이나 온지우와 은밀한 만남을 가졌었다.
  • 온 씨 가문 어른들의 생신 연회나 회사 창립 기념일 같은 날은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 눈을 내리깐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윤솔의 모습에 소율은 자신이 정곡을 찔렀음을 눈치챘다.
  • “게다가 이혼하기 전에도 호텔에서 단둘이 오붓하게 하룻밤을 보냈잖아. 넌 이미 초탈했을진 몰라도 난 그 울분을 참을 수 없어. 우리가 먼저 공격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인터넷에서 욕을 먹고 있는 사람은 네가 되었을 거야. 온지우 그 불여시가 널 가만히 내버려 두었을 것 같아? 적에게 자비를 베풀면 네가 당해!”
  • 그래도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윤솔의 모습에 소율은 짜증이 치밀었다.
  • “솔아, 내가 이렇게 말했는데도 아직도 죄책감이 들어? 내 막타가 깊게 들어가지 못한 거야, 아니면 애초에 상처가 그만큼 크지 않았던 거야?”
  • 그제야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린 윤솔은 눈썹을 씰룩거리며 소율을 바라보았다.
  • “그 연놈들이 방 잡은 사진을 찾고 있었어.”
  • 그렇게 말하며 윤솔은 마침 알림음이 울리는 소율의 휴대전화를 가리켰다.
  • “너한테 보냈어. 절묘한 타이밍에 사람을 시켜 뿌려.”
  • “잘했어!”
  • 사진을 확인한 소율의 눈동자가 화르르 불타올랐다.
  • “이거 언제야?”
  • “7개월 전쯤이었을걸.”
  • 사진은 그다지 야하진 않았지만 사진 속의 온지우와 허주원 두 사람 모두 가운 차림이었다.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 그리고 그 사진들은 전부 온지우가 직접 윤솔에게 보낸 것이다.
  • 윤솔은 허주원에게 최소한의 양심은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고작 내연녀 주제에 그녀 앞에서 기고만장했던 온지우를 떠올리자 확실히 이대로 넘어가 줄 수 없었다.
  • 그렇게 내연녀가 되는 것이 꿈이라면 꿈을 이루게 해주지.
  • 소율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 “지금 당장 사람을 준비시킬게! 허주원 이 개자식, 정말 바람을 피웠어! 똥 묻은 돈은 역겨우니까 줍지 마. 너, 허주원과의 이혼을 후회하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 “… 내가 돈이 궁한 것도 아니고 그딴 걸 왜 주워?”
  • 그 말에 소율은 대뜸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 “내가 궁해서 그런다, 됐냐? 돈이 궁한 친구한테 좀 베풀어 줄 생각은 없어?”
  • 윤솔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소율을 샐쭉 흘겨보았다.
  • “네 옷방 안에 있는 가방이랑 구두를 팔면 돈이 궁하지 않을 거야.”
  • “이 나쁜 년!”
  •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숙인 윤솔은 눈매를 접으며 요염하게 웃었다.
  • “응, 난 나쁜 년이야. 그러니까 나한테 빠지지 마. 우린 이루어질 수 없어.”
  • “…”
  • 윤솔의 눈웃음에 소율은 심장이 덜컥했다. 어쩐지 윤솔이 이혼한 뒤로 더욱 매력적으로 변한 것 같았다.
  • 이러다 이혼한 친구한테 홀딱 반해버리면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