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솔과 이혼한 것이 그에게 더없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혼 소식이 전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꿉친구들로부터 전화가 빗발쳤다.
그리고 전화는 항상 ‘너 정말 윤솔과 이혼했어?’로 시작되었다.
사실 어려운 질문도 아니었다. 애초에 윤솔과 이혼한 사실을 숨길 생각도 없었고 오늘 아침에 구청 앞에서 일어난 일은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허주원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응, 이혼했어.”
그러자 전화기 너머로 숨을 크게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윤솔 그 멍청한 여자가 결국 널 포기한 거야? 널 축하해야 할지 동정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 바닥에서 윤솔처럼 오직 너만을 바라보는 여자를 눈에 불을 켜고 찾아도 없을 텐데. 조금 멍청하고 만만하고 가난하고 돈을 밝히지만 생각해 보면 나쁜 여자는 아니었잖아.”
축하한다는 말을 할 줄 알았던 허주원은 순간 당혹스러웠다.
“???”
이 자식, 친구 맞아? 허주원은 자신의 교우관계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런 친구가 한 명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비슷한 내용의 전화를 세 번이나 연속으로 받은 허주원의 얼굴은 폭풍우가 몰아치기 직전의 하늘처럼 어두워졌다.
하지만 윤솔과의 이혼이 허주원에게 안겨준 골칫거리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초상난 데 춤추던 친구들의 연락을 대충 때우자 양주호가 들어오더니 임청이 찾아왔다고 전했다.
윤솔과의 이혼 사건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기에 임청이 뭣 때문에 찾아온 것인지는 너무 불 보듯 뻔했다.
윤솔과 허주원이 정말로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임청은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실시간 검색어를 확인하고는 더 이상 기뻐할 수 없게 되었다.
윤솔이 언제부터 진민준이라는 배우와 알고 지냈지?
진민준은 심지어 오랫동안 윤솔을 짝사랑해왔다며 윤솔과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윤솔이 허 씨 가문이라는 불구덩이에서 뛰쳐나오기를 매일같이 바랐는데 이제 윤솔이 뛰쳐나왔으니 윤솔을 짝사랑하는 친구로서 아주 기쁘다고 했다.
짧은 몇 마디였지만 임청에게는 다른 의미로 들렸다.
이제 더 이상 윤솔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도 잠시,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분노에 임청은 곧장 허주원의 사무실로 쳐들어갔다.
“주원아, 사실대로 얘기해 봐. 윤솔 그년, 바람피워서 이혼한 거지?”
비록 3 년간의 결혼생활은 유명무실했지만 아내가 바람피웠다는 사실을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내는 없었다.
허주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다짜고짜 무슨 말씀이십니까?”
며칠 전 윤솔의 말에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한 것도 수치스러웠는데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허 씨 가문에서 윤솔을 학대했다는 비난과 아들이 오쟁이를 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임청은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직접 봐! 이혼 수속을 밟고 구청에서 나오자마자 윤솔 그년의 추종자라며 웬 사내가 데리러 왔잖아! 언제부터 만났는지 알 게 뭐야! 우리 허 씨 가문을 뭐로 보고!”
구청에서 돌아오자마자 회의하고 업무에 뛰어드느라 허주원은 인터넷에 뜬 기사를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윤솔과의 이혼 소식이 세간에 알려질 것이라 짐작했지만 소문이 이런 식으로 퍼지게 될 줄은 몰랐다.
‘윤솔을 오랫동안 짝사랑했다’는 문장을 본 순간, 허주원은 무언가에 가슴이 찔리는 듯했다.
허주원도 잠시 윤솔이 갑자기 이혼을 제기한 이유가 이 사내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허주원이 아무리 윤솔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허가에서 하루 종일 임청의 시중을 들던 윤솔이 바람을 피울 여력이 있을 리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윤솔과는 이미 이혼을 한 사이입니다. 합의 이혼이었고 위자료도 한 푼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냥 그런 사람이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 살면 됩니다. 그러니 그런 연예뉴스는 적당히 보세요.”
임청이 이렇게 화가 난 이유는 물론 그 실시간 검색어 때문만이 아니었다.
윤솔이 순순히 이혼에 동의하면서 당연히 허 씨 가문에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는 허주원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위자료를 요구하지 않았다고? 우리 집에 시집온 것부터가 돈 때문이 아니었어? 그런 여자가 너랑 이혼하면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게 말이 돼?”
꼬치꼬치 캐묻는 임청이 성가셔진 허주원은 인터폰으로 양주호를 불러들였다.
“이혼 합의서를 어머니께 보여드려.”
그러고는 한쪽에 걸어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고서 사무실을 나갔다.
임청은 멀어지는 허주원의 등에 대고 외쳤다.
“주원아, 엄마랑 저녁 먹으러 집에 돌아가는 거 아니었어?”
“선약 있어요.”
허주원은 허가 별장에 거의 돌아가지 않았다.
하나는 허가에 있는 윤솔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허주원과 임청의 사이가 외부에 알려진 것만큼 돈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파트로 돌아오자 마침내 귓가가 조용해졌다.
하루 종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탓에 허주원은 윤솔과의 이혼에 대해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오늘 아침에 구청에 갔던 것도 윤솔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허주원은 윤솔이 이혼해 줄 것이란 말을 믿지 않았다. 심현준의 말처럼 윤솔은 돈을 밝히긴 했지만 허주원을 정말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사랑도, 재물도 모두 손에 쥐려는 욕심 많은 여자가 그렇게 쉽게 이혼할 리 없었다.
그래서 그날 윤솔이 가져다준 이혼 합의서도 챙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를 보자마자 윤솔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똑같은 이혼 합의서를 건네는 것일 줄 몰랐다.
솔직히 그때 좀 많이 당황했던 것 같았다. 윤솔이 시키는 대로 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이혼 증명서가 손에 들려 있었다.
아, 지금은 주머니 속에 있었지.
허주원은 주머니에서 이혼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똑같은 종이였지만 ‘혼인 신고서’ 대신 ‘이혼 증명서’라고 쓰여 있었다.
그게 괜히 눈에 거슬렸다. 허주원은 이혼 증명서를 와락 구겨 휴지통에 버렸다.
그때, 옆에 치워두었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허주원은 고개를 기울여 휴대전화를 힐끗 바라보기만 할 뿐 받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상대는 단념하지 않고 끊임없이 전화를 해댔다.
음침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휴대전화를 집어 든 허주원은 발신인을 확인하고 표정이 더욱 굳었다.
“왜?”
전화는 심현준에게서 걸려온 것이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할 때는 언제고 그로부터 불과 두 시간 만에 다시 전화를 걸어온 심현준의 의도야 불 보듯 뻔했다.
“이혼까지 한 마당에 싱글 파티를 열어야 되는 거 아냐?”
“꺼져.”
더 이상 심현준과 대화하고 싶지 않았던 허주원은 바로 전화를 끊으려 했다.
하지만 이내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얘기에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손가락이 우뚝 멈추었다.
“그건 그렇고, 난 지금 윤솔의 싱글 파티에 있어. 네 전처 씀씀이가 참 시원시원하더라. 오늘 야누스 클럽 1 층에서 나오는 모든 술값을 자기가 계산한대. 거기에 네가 피땀 흘려 번 돈도 적지 않을 것 같은데?”
그 말에 허주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윤솔은 위자료를 한 푼도 요구하지 않았어.”
“…”
이번에는 심현준이 할 말을 잃었다. 서울에서 윤솔이 얼마나 돈을 밝히는 여자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몇 년 전, 임청이 저혈당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 때, 우연히 지나가던 윤솔이 발견하고서 병원에 데려다준 덕분에 더한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
허주원이 보답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묻자 윤솔은 망설임 없이 20억을 요구했고 허주원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금액을 200억으로 늘였다.
그때 누군가 그 모습을 영상으로 찍었고 그 영상은 곧 인터넷에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영상 속에서 허주원의 안색이 급격히 굳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윤솔은 그에 그치지 않고 돌연 폭탄 발언을 했다.
“저와 결혼해 주세요.”
윤솔은 200억으로도 만족하지 못했고 급기야 허주원의 몸값에 눈독을 들였다.
지난 3 년 동안 두 사람은 유명무실한 부부라는 사실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고 다들 그런 윤솔을 비웃었다.
언젠가 이혼하게 된다면 허주원에게서 몇 백억은 뜯을 줄 알았는데 윤솔이 위자료를 한 푼도 요구하지 않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