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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한 푼도 요구하지 않았어

  • 허주원의 하루는 더 이상 ‘언짢다’는 단어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불편해졌다.
  • 윤솔과 이혼한 것이 그에게 더없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혼 소식이 전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꿉친구들로부터 전화가 빗발쳤다.
  • 그리고 전화는 항상 ‘너 정말 윤솔과 이혼했어?’로 시작되었다.
  • 사실 어려운 질문도 아니었다. 애초에 윤솔과 이혼한 사실을 숨길 생각도 없었고 오늘 아침에 구청 앞에서 일어난 일은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 허주원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 “응, 이혼했어.”
  • 그러자 전화기 너머로 숨을 크게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 “세상에, 윤솔 그 멍청한 여자가 결국 널 포기한 거야? 널 축하해야 할지 동정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 바닥에서 윤솔처럼 오직 너만을 바라보는 여자를 눈에 불을 켜고 찾아도 없을 텐데. 조금 멍청하고 만만하고 가난하고 돈을 밝히지만 생각해 보면 나쁜 여자는 아니었잖아.”
  • 축하한다는 말을 할 줄 알았던 허주원은 순간 당혹스러웠다.
  • “???”
  • 이 자식, 친구 맞아? 허주원은 자신의 교우관계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 문제는 그런 친구가 한 명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비슷한 내용의 전화를 세 번이나 연속으로 받은 허주원의 얼굴은 폭풍우가 몰아치기 직전의 하늘처럼 어두워졌다.
  • 하지만 윤솔과의 이혼이 허주원에게 안겨준 골칫거리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 초상난 데 춤추던 친구들의 연락을 대충 때우자 양주호가 들어오더니 임청이 찾아왔다고 전했다.
  • 윤솔과의 이혼 사건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기에 임청이 뭣 때문에 찾아온 것인지는 너무 불 보듯 뻔했다.
  • 윤솔과 허주원이 정말로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임청은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실시간 검색어를 확인하고는 더 이상 기뻐할 수 없게 되었다.
  • 윤솔이 언제부터 진민준이라는 배우와 알고 지냈지?
  • 진민준은 심지어 오랫동안 윤솔을 짝사랑해왔다며 윤솔과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윤솔이 허 씨 가문이라는 불구덩이에서 뛰쳐나오기를 매일같이 바랐는데 이제 윤솔이 뛰쳐나왔으니 윤솔을 짝사랑하는 친구로서 아주 기쁘다고 했다.
  • 짧은 몇 마디였지만 임청에게는 다른 의미로 들렸다.
  • 이제 더 이상 윤솔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도 잠시,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분노에 임청은 곧장 허주원의 사무실로 쳐들어갔다.
  • “주원아, 사실대로 얘기해 봐. 윤솔 그년, 바람피워서 이혼한 거지?”
  • 비록 3 년간의 결혼생활은 유명무실했지만 아내가 바람피웠다는 사실을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내는 없었다.
  • 허주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 “다짜고짜 무슨 말씀이십니까?”
  • 며칠 전 윤솔의 말에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한 것도 수치스러웠는데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허 씨 가문에서 윤솔을 학대했다는 비난과 아들이 오쟁이를 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임청은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 “직접 봐! 이혼 수속을 밟고 구청에서 나오자마자 윤솔 그년의 추종자라며 웬 사내가 데리러 왔잖아! 언제부터 만났는지 알 게 뭐야! 우리 허 씨 가문을 뭐로 보고!”
  • 구청에서 돌아오자마자 회의하고 업무에 뛰어드느라 허주원은 인터넷에 뜬 기사를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 윤솔과의 이혼 소식이 세간에 알려질 것이라 짐작했지만 소문이 이런 식으로 퍼지게 될 줄은 몰랐다.
  • ‘윤솔을 오랫동안 짝사랑했다’는 문장을 본 순간, 허주원은 무언가에 가슴이 찔리는 듯했다.
  • 허주원도 잠시 윤솔이 갑자기 이혼을 제기한 이유가 이 사내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 허주원이 아무리 윤솔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허가에서 하루 종일 임청의 시중을 들던 윤솔이 바람을 피울 여력이 있을 리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윤솔과는 이미 이혼을 한 사이입니다. 합의 이혼이었고 위자료도 한 푼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냥 그런 사람이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 살면 됩니다. 그러니 그런 연예뉴스는 적당히 보세요.”
  • 임청이 이렇게 화가 난 이유는 물론 그 실시간 검색어 때문만이 아니었다.
  • 윤솔이 순순히 이혼에 동의하면서 당연히 허 씨 가문에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 그러니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는 허주원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 “위자료를 요구하지 않았다고? 우리 집에 시집온 것부터가 돈 때문이 아니었어? 그런 여자가 너랑 이혼하면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게 말이 돼?”
  • 꼬치꼬치 캐묻는 임청이 성가셔진 허주원은 인터폰으로 양주호를 불러들였다.
  • “이혼 합의서를 어머니께 보여드려.”
  • 그러고는 한쪽에 걸어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고서 사무실을 나갔다.
  • 임청은 멀어지는 허주원의 등에 대고 외쳤다.
  • “주원아, 엄마랑 저녁 먹으러 집에 돌아가는 거 아니었어?”
  • “선약 있어요.”
  • 허주원은 허가 별장에 거의 돌아가지 않았다.
  • 하나는 허가에 있는 윤솔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허주원과 임청의 사이가 외부에 알려진 것만큼 돈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아파트로 돌아오자 마침내 귓가가 조용해졌다.
  • 하루 종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탓에 허주원은 윤솔과의 이혼에 대해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 오늘 아침에 구청에 갔던 것도 윤솔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 허주원은 윤솔이 이혼해 줄 것이란 말을 믿지 않았다. 심현준의 말처럼 윤솔은 돈을 밝히긴 했지만 허주원을 정말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 사랑도, 재물도 모두 손에 쥐려는 욕심 많은 여자가 그렇게 쉽게 이혼할 리 없었다.
  • 그래서 그날 윤솔이 가져다준 이혼 합의서도 챙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를 보자마자 윤솔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똑같은 이혼 합의서를 건네는 것일 줄 몰랐다.
  • 솔직히 그때 좀 많이 당황했던 것 같았다. 윤솔이 시키는 대로 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이혼 증명서가 손에 들려 있었다.
  • 아, 지금은 주머니 속에 있었지.
  • 허주원은 주머니에서 이혼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똑같은 종이였지만 ‘혼인 신고서’ 대신 ‘이혼 증명서’라고 쓰여 있었다.
  • 그게 괜히 눈에 거슬렸다. 허주원은 이혼 증명서를 와락 구겨 휴지통에 버렸다.
  • 그때, 옆에 치워두었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허주원은 고개를 기울여 휴대전화를 힐끗 바라보기만 할 뿐 받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 하지만 상대는 단념하지 않고 끊임없이 전화를 해댔다.
  • 음침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휴대전화를 집어 든 허주원은 발신인을 확인하고 표정이 더욱 굳었다.
  • “왜?”
  • 전화는 심현준에게서 걸려온 것이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할 때는 언제고 그로부터 불과 두 시간 만에 다시 전화를 걸어온 심현준의 의도야 불 보듯 뻔했다.
  • “이혼까지 한 마당에 싱글 파티를 열어야 되는 거 아냐?”
  • “꺼져.”
  • 더 이상 심현준과 대화하고 싶지 않았던 허주원은 바로 전화를 끊으려 했다.
  • 하지만 이내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얘기에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손가락이 우뚝 멈추었다.
  • “그건 그렇고, 난 지금 윤솔의 싱글 파티에 있어. 네 전처 씀씀이가 참 시원시원하더라. 오늘 야누스 클럽 1 층에서 나오는 모든 술값을 자기가 계산한대. 거기에 네가 피땀 흘려 번 돈도 적지 않을 것 같은데?”
  • 그 말에 허주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 “윤솔은 위자료를 한 푼도 요구하지 않았어.”
  • “…”
  • 이번에는 심현준이 할 말을 잃었다. 서울에서 윤솔이 얼마나 돈을 밝히는 여자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 몇 년 전, 임청이 저혈당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 때, 우연히 지나가던 윤솔이 발견하고서 병원에 데려다준 덕분에 더한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
  • 허주원이 보답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묻자 윤솔은 망설임 없이 20억을 요구했고 허주원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금액을 200억으로 늘였다.
  • 그때 누군가 그 모습을 영상으로 찍었고 그 영상은 곧 인터넷에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영상 속에서 허주원의 안색이 급격히 굳는 것이 보였다.
  • 하지만 윤솔은 그에 그치지 않고 돌연 폭탄 발언을 했다.
  • “저와 결혼해 주세요.”
  • 윤솔은 200억으로도 만족하지 못했고 급기야 허주원의 몸값에 눈독을 들였다.
  • 지난 3 년 동안 두 사람은 유명무실한 부부라는 사실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고 다들 그런 윤솔을 비웃었다.
  • 언젠가 이혼하게 된다면 허주원에게서 몇 백억은 뜯을 줄 알았는데 윤솔이 위자료를 한 푼도 요구하지 않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