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서는 ‘허주원 개자식’이라고 당당하게 욕할 때는 언제고 정작 당사자를 앞에 두고는 누구보다 빠르게 꽁무니를 뺐다.
“아, 경아 언니가 날 부르네? 두 사람 얘기 나눠!”
그렇게 말하며 소율은 화를 참고 있는 듯한 허주원과 윤솔을 단둘만 남겨둔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놓았다.
전장에서 멀어진 소율은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뒤돌아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허주원의 표정에 윤솔을 홀로 남겨두고 온 것이 미안해졌다.
젠장, 설마 여자를 때리지는 않겠지?
윤솔은 허주원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입꼬리를 올린 채 허주원을 따라 야누스 클럽을 나온 윤솔은 가로등 아래에 멈춰 섰다.
방금 춤을 추고 내려온 터라 윤솔은 귀밑머리가 살짝 흐트러져 있었고 불그레한 홍조를 띤 채 미소를 머금은 요염한 눈동자로 허주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허주원은 어스름한 가로등 불빛 사이로 윤솔을 관찰했다. 윤솔에게서 평소에는 없었던 아우라가 느껴졌다.
지난 3 년 동안 허주원은 윤솔에게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돈을 밝히고 주제도 모르고 허황된 망상을 품은 여자를 쳐다보는 것조차 시간 낭비라고 느꼈었다.
하지만 가끔씩 본가로 돌아갔을 때마다 스치듯 보았던 윤솔은 언제나 부드럽고 애정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무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흩뿌려진 눈빛에는 은근한 노기마저 배어 있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허 대표님?”
일부러 거리를 두는 듯한 말투에 괜히 더욱 짜증이 치밀어 오른 허주원은 저도 모르게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미 이혼한 마당에 당신이 누구를 만나든 상관 안 해. 하지만 우리 이혼한 게 바로 오늘 오전 일이야. 너무 이르단 생각 안 들어? 당신이야 평판에 신경 쓰지 않을지 몰라도 난 아내가 바람났다는 소문에 시달리고 싶지 않아.”
윤솔은 일순 또다시 마음에 찬물이 끼얹어지는 것 같았다. 윤솔은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좋다는데 그럼 어떡해?”
그렇게 말하며 윤솔은 가볍게 웃었다.
“고작 그 일 때문에 날 불러낸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 당신과 결혼한 3 년 동안 난 최선을 다해 시부모님을 모셨고 가정을 돌봤어. 내가 바람피웠다는 소문에 시달릴까 걱정할 게 아니라 허 씨 일가가 며느리를 괴롭힌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될까 걱정이나 해. 그러다 나중에 허 씨 가문에 시집오겠다는 아가씨가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이미 3 년이라는 시간을 낭비한 마당에 윤솔은 이제 더 이상 허주원에게 단 1초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양 비서님한테 들었을 텐데. 이혼한 이상 우린 이제 남남이야.”
윤솔은 허주원을 힐끗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스스로를 향한 조소인 것 같기도, 허주원을 향한 조소인 것 같기도 한 웃음이었다.
할 말을 마친 윤솔은 이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클럽으로 돌아갔다. 홀로 가로등 아래 남겨진 허주원의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음산했다.
허주원은 눈살을 찌푸린 채 클럽 안으로 사라지는 윤솔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애써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다스렸다.
분수를 모르고 무모하게 그의 인생에 뛰어든 건 그녀 자신이건만 이제 와서 억울하다는 듯 화를 내고 있는 모습이라니, 가소로웠다.
윤솔도 가소로웠지만 허주원은 무엇보다 고작 저 꼴을 보려고 이 밤중에 여기까지 달려온 자신이 가장 가소롭게 느껴졌다.
집에서 잠이나 잘걸. 뭐 하러 여기까지 와서 굴욕을 자초한단 말인가. 그동안 삶이 너무 무료했나.
그때, 호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허주원은 미간을 좁힌 채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전화를 꺼냈다.
발신인을 확인한 허주원의 검은 눈동자가 꿈틀거렸다.
“무슨 일이야?”
“주원아, 나 실수로 앞차랑 추돌 사고가 났는데 차 주인이 무섭게 막 욕을 해. 지금 나한테 와주면 안 돼? 나 너무 무서워!”
전화기 너머로 바들바들 떨리는 온지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목소리였다.
허주원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양주호를 보낼게.”
“양 비서님이 오셔도 괜찮지만 오늘 우리 오빠한테서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받았어. 너만 괜찮다면 그 자료도 같이 주고 싶은데. 안 될까, 주원아?”
야누스 클럽의 화려한 간판을 힐끗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리던 허주원은 이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야?”
“지운길 갈림길에 있어.”
“알겠어.”
통화를 마치고 허주원은 바로 지운길로 가는 대신 야누스 클럽으로 돌아갔다.
갑자기 나타난 허주원의 모습에 심현준과 이문성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물들더니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주원아, 여긴 어쩐 일이야?”
허주원은 대답 대신 서슬 퍼런 눈으로 심현준과 이문성을 노려보았다.
“윤솔은 어딨어?”
그러자 이문성이 어색하게 웃으며 코를 만지작거렸다.
“갔지. 눈 돌아가게 잘생긴 남자가 데려갔어.”
그 말에 허주원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허주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성큼성큼 야누스 클럽을 떠났다.
“쯧.”
허주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심현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혼까지 한 마당에 자기가 무슨 상관이라고 윤솔이 뭘 하는지 신경 써?”
그 말에 이문성은 어깨를 으쓱했다.
“남자들의 이상한 소유욕?”
“누가 알겠어.”
이혼까지 한 마당에 허주원에게는 이제 더 이상 윤솔의 일에 왈가왈부할 권리가 없는 법이거늘.
한편, 검은색 밴 안.
윤솔은 지친 얼굴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소율이 건넨 칵테일 두 잔을 연거푸 들이켰더니 이제야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뒷좌석에서 메추라기처럼 임승민에게 꽉 붙잡힌 소율은 꿈쩍도 하지 못했다.
적막이 감도는 차 안으로 창밖의 네온사인이 어른어른 새어 들어왔다.
10분 전에 허주원이 했던 말들이 윤솔의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재생되었다. 누군가 가시로 가슴을 찌르는 것처럼 쿡쿡 쑤셔왔다.
아내가 바람피울까 걱정도 하는 사람이었구나. 허주원이라면 윤솔이 무슨 짓을 하든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다.
검은색 밴이 윤솔의 별장 앞에 멈춰 서고 안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임승민에게 윤솔은 손을 휘저었다.
“됐어. 난 신경 쓰지 말고 소율이나 좀 단속해. 이젠 날 골탕 먹이기까지 하잖아.”
그 말에 임승민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묵인하지 않았다면 소율이가 감히 그러겠어?”
윤솔은 짜증 난다는 듯 부릅 뜬 눈으로 임승민을 노려보았다.
“됐어, 됐어. 얼른 내 눈앞에서 꺼져. 오늘 막 이혼한 친구 앞에서 꼭 그렇게 연인 티를 내야겠어? 쌍으로 된 걸 보기만 해도 짜증 나.”
“그럼 방해하지 않을게.”
20년 넘게 친구로 지내온 세 사람이라 더 이상 ‘친구’라는 단어로 서로에 대한 감정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했다.
오랫동안 서로를 알고 지냈기에 소율과 임승민은 윤솔이 다른 사람들의 동정과 연민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고작 이혼일 뿐, 소율과 임승민은 며칠 지나면 다시 예전의 윤솔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별장에 들어서자마자 윤솔은 꿀물을 탔다. 하지만 소파에 앉아 탁자 위에 놓인 꿀물을 우두커니 응시하기만 했다.
그 순간, 촉촉이 젖은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음이 괴롭지 않을 리 없었다. 어릴 적부터 하늘의 총아였던 윤솔은 외모면 외모, 공부면 공부, 항상 최고 중의 최고였다.
집안은 평범했지만 어른이 되어 허주원과 결혼하지 전까지 윤솔은 누구보다 돋보이는 존재였다.
그녀의 인생에 허주원이 없었다면 그녀 또한 소율과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빛을 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만약은 없었다. 열다섯 살 무렵에 허주원의 도움으로 악의 무리에서 탈출했을 때, 그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또 다른 심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