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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내가 좋다는데 어떡해

  • 갑자기 들려온 허주원의 목소리에 소율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움츠렸다.
  • 뒤에서는 ‘허주원 개자식’이라고 당당하게 욕할 때는 언제고 정작 당사자를 앞에 두고는 누구보다 빠르게 꽁무니를 뺐다.
  • “아, 경아 언니가 날 부르네? 두 사람 얘기 나눠!”
  • 그렇게 말하며 소율은 화를 참고 있는 듯한 허주원과 윤솔을 단둘만 남겨둔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놓았다.
  • 전장에서 멀어진 소율은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뒤돌아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허주원의 표정에 윤솔을 홀로 남겨두고 온 것이 미안해졌다.
  • 젠장, 설마 여자를 때리지는 않겠지?
  • 윤솔은 허주원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 “그래.”
  • 입꼬리를 올린 채 허주원을 따라 야누스 클럽을 나온 윤솔은 가로등 아래에 멈춰 섰다.
  • 방금 춤을 추고 내려온 터라 윤솔은 귀밑머리가 살짝 흐트러져 있었고 불그레한 홍조를 띤 채 미소를 머금은 요염한 눈동자로 허주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 허주원은 어스름한 가로등 불빛 사이로 윤솔을 관찰했다. 윤솔에게서 평소에는 없었던 아우라가 느껴졌다.
  • 지난 3 년 동안 허주원은 윤솔에게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돈을 밝히고 주제도 모르고 허황된 망상을 품은 여자를 쳐다보는 것조차 시간 낭비라고 느꼈었다.
  • 하지만 가끔씩 본가로 돌아갔을 때마다 스치듯 보았던 윤솔은 언제나 부드럽고 애정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곤 했었다.
  • 하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무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흩뿌려진 눈빛에는 은근한 노기마저 배어 있었다.
  •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허 대표님?”
  • 일부러 거리를 두는 듯한 말투에 괜히 더욱 짜증이 치밀어 오른 허주원은 저도 모르게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 “이미 이혼한 마당에 당신이 누구를 만나든 상관 안 해. 하지만 우리 이혼한 게 바로 오늘 오전 일이야. 너무 이르단 생각 안 들어? 당신이야 평판에 신경 쓰지 않을지 몰라도 난 아내가 바람났다는 소문에 시달리고 싶지 않아.”
  • 윤솔은 일순 또다시 마음에 찬물이 끼얹어지는 것 같았다. 윤솔은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 “내가 좋다는데 그럼 어떡해?”
  • 그렇게 말하며 윤솔은 가볍게 웃었다.
  • “고작 그 일 때문에 날 불러낸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 당신과 결혼한 3 년 동안 난 최선을 다해 시부모님을 모셨고 가정을 돌봤어. 내가 바람피웠다는 소문에 시달릴까 걱정할 게 아니라 허 씨 일가가 며느리를 괴롭힌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될까 걱정이나 해. 그러다 나중에 허 씨 가문에 시집오겠다는 아가씨가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 이미 3 년이라는 시간을 낭비한 마당에 윤솔은 이제 더 이상 허주원에게 단 1초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 “그날 양 비서님한테 들었을 텐데. 이혼한 이상 우린 이제 남남이야.”
  • 윤솔은 허주원을 힐끗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스스로를 향한 조소인 것 같기도, 허주원을 향한 조소인 것 같기도 한 웃음이었다.
  • 할 말을 마친 윤솔은 이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클럽으로 돌아갔다. 홀로 가로등 아래 남겨진 허주원의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음산했다.
  • 허주원은 눈살을 찌푸린 채 클럽 안으로 사라지는 윤솔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애써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다스렸다.
  • 분수를 모르고 무모하게 그의 인생에 뛰어든 건 그녀 자신이건만 이제 와서 억울하다는 듯 화를 내고 있는 모습이라니, 가소로웠다.
  • 윤솔도 가소로웠지만 허주원은 무엇보다 고작 저 꼴을 보려고 이 밤중에 여기까지 달려온 자신이 가장 가소롭게 느껴졌다.
  • 집에서 잠이나 잘걸. 뭐 하러 여기까지 와서 굴욕을 자초한단 말인가. 그동안 삶이 너무 무료했나.
  • 그때, 호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허주원은 미간을 좁힌 채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전화를 꺼냈다.
  • 발신인을 확인한 허주원의 검은 눈동자가 꿈틀거렸다.
  • “무슨 일이야?”
  • “주원아, 나 실수로 앞차랑 추돌 사고가 났는데 차 주인이 무섭게 막 욕을 해. 지금 나한테 와주면 안 돼? 나 너무 무서워!”
  • 전화기 너머로 바들바들 떨리는 온지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목소리였다.
  • 허주원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 “양주호를 보낼게.”
  • “양 비서님이 오셔도 괜찮지만 오늘 우리 오빠한테서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받았어. 너만 괜찮다면 그 자료도 같이 주고 싶은데. 안 될까, 주원아?”
  • 야누스 클럽의 화려한 간판을 힐끗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리던 허주원은 이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 “어디야?”
  • “지운길 갈림길에 있어.”
  • “알겠어.”
  • 통화를 마치고 허주원은 바로 지운길로 가는 대신 야누스 클럽으로 돌아갔다.
  • 갑자기 나타난 허주원의 모습에 심현준과 이문성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물들더니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 “주원아, 여긴 어쩐 일이야?”
  • 허주원은 대답 대신 서슬 퍼런 눈으로 심현준과 이문성을 노려보았다.
  • “윤솔은 어딨어?”
  • 그러자 이문성이 어색하게 웃으며 코를 만지작거렸다.
  • “갔지. 눈 돌아가게 잘생긴 남자가 데려갔어.”
  • 그 말에 허주원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허주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성큼성큼 야누스 클럽을 떠났다.
  • “쯧.”
  • 허주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심현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 “이혼까지 한 마당에 자기가 무슨 상관이라고 윤솔이 뭘 하는지 신경 써?”
  • 그 말에 이문성은 어깨를 으쓱했다.
  • “남자들의 이상한 소유욕?”
  • “누가 알겠어.”
  • 이혼까지 한 마당에 허주원에게는 이제 더 이상 윤솔의 일에 왈가왈부할 권리가 없는 법이거늘.
  • 한편, 검은색 밴 안.
  • 윤솔은 지친 얼굴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소율이 건넨 칵테일 두 잔을 연거푸 들이켰더니 이제야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 뒷좌석에서 메추라기처럼 임승민에게 꽉 붙잡힌 소율은 꿈쩍도 하지 못했다.
  • 적막이 감도는 차 안으로 창밖의 네온사인이 어른어른 새어 들어왔다.
  • 10분 전에 허주원이 했던 말들이 윤솔의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재생되었다. 누군가 가시로 가슴을 찌르는 것처럼 쿡쿡 쑤셔왔다.
  • 아내가 바람피울까 걱정도 하는 사람이었구나. 허주원이라면 윤솔이 무슨 짓을 하든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다.
  • 검은색 밴이 윤솔의 별장 앞에 멈춰 서고 안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임승민에게 윤솔은 손을 휘저었다.
  • “됐어. 난 신경 쓰지 말고 소율이나 좀 단속해. 이젠 날 골탕 먹이기까지 하잖아.”
  • 그 말에 임승민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 “네가 묵인하지 않았다면 소율이가 감히 그러겠어?”
  • 윤솔은 짜증 난다는 듯 부릅 뜬 눈으로 임승민을 노려보았다.
  • “됐어, 됐어. 얼른 내 눈앞에서 꺼져. 오늘 막 이혼한 친구 앞에서 꼭 그렇게 연인 티를 내야겠어? 쌍으로 된 걸 보기만 해도 짜증 나.”
  • “그럼 방해하지 않을게.”
  • 20년 넘게 친구로 지내온 세 사람이라 더 이상 ‘친구’라는 단어로 서로에 대한 감정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했다.
  • 오랫동안 서로를 알고 지냈기에 소율과 임승민은 윤솔이 다른 사람들의 동정과 연민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고작 이혼일 뿐, 소율과 임승민은 며칠 지나면 다시 예전의 윤솔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별장에 들어서자마자 윤솔은 꿀물을 탔다. 하지만 소파에 앉아 탁자 위에 놓인 꿀물을 우두커니 응시하기만 했다.
  • 그 순간, 촉촉이 젖은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 마음이 괴롭지 않을 리 없었다. 어릴 적부터 하늘의 총아였던 윤솔은 외모면 외모, 공부면 공부, 항상 최고 중의 최고였다.
  • 집안은 평범했지만 어른이 되어 허주원과 결혼하지 전까지 윤솔은 누구보다 돋보이는 존재였다.
  • 그녀의 인생에 허주원이 없었다면 그녀 또한 소율과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빛을 발했을 것이다.
  • 하지만 이 세상에 만약은 없었다. 열다섯 살 무렵에 허주원의 도움으로 악의 무리에서 탈출했을 때, 그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또 다른 심연이었다.
  • 이제 겨우 빠져나왔으니 두 번 다시 그 심연에 뛰어들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