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늦게 잠자리에 든 데다 숙취로 괴로운 와중에 아침 댓바람부터 소율에게서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윤솔은 시끄러워서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또 무슨 일인데?”
원래도 한 모닝 성깔을 했던 윤솔이었지만 허 씨 가문에서 누르고 눌렀던 것의 봉인을 풀자 방금 우리에서 나온 맹수처럼 사나웠다.
소율은 지금 윤솔 옆에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나 때문에 깬 거야?”
윤솔은 눈을 희번덕거리고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용건이 뭐야? 빨리 말해.”
“… 네 전 남편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어. 그것도 그 첫사랑이라는 년과 나란히. 지금 네티즌들이 너희 두 사람 서로 맞바람을 피워서 합의이혼을 한 건 아닌지 수군거리고 있어.”
그 말에 윤솔은 일순 멈칫했다. 잠기운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너도 방금 내 전 남편이라고 했잖아. 앞으로 고작 허주원의 일 때문에 목숨 걸고 날 깨울 필요 없어.”
전화기 너머의 소율은 괜히 목덜미를 문질렀다.
“미안해, 솔아. 계속 자, 더 자. 방해하지 않을게!”
그러고는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윤솔은 휴대전화를 침대 위로 던지고서 다시 침대에 풀썩 누웠다.
하지만 방금 전 소율과의 통화가 내내 머릿속에서 맴도는 통에 도저히 잠들 수 없었다.
윤솔은 괜히 짜증이 치밀었다.
“리리야, 물 끓여줘.”
“네, 주인님.”
윤솔은 슬리퍼를 끌며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에 비친 여인은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고 숙취 때문에 피부 상태가 좋지 못하고 초췌해 보였다.
윤솔은 거울 속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작 이혼일 뿐이잖아. 이럴 것까진 없잖아, 윤솔아.
그로부터 30 분 뒤.
윤솔은 휴대전화로 소율이 얘기했던 가십 뉴스를 읽고 있었다. 아무 느낌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사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예감하고 있었지만 정작 허주원과 온지우의 이름이 나란히 오른 뉴스를 확인하자 그저 가소롭기만 했다.
윤솔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트위터를 종료했다. 이미 이혼까지 한 마당에 허주원과 온지우가 한밤중에 데이트를 하든 말든 이제 그녀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윤솔은 화장을 하고 파란색 원피스로 갈아입은 뒤 차고 안에서 뽀얗게 먼지가 쌓인 페라리를 몰고서 윤율엔터테인먼트로 향했다.
어제 왔을 때 진민준이 직접 에스코트하고 떠날 때에도 소율이 직접 에스코트하는 모습을 보인 탓인지 프런트 데스크 직원들 모두 윤솔을 정중하게 대했다.
“안녕하세요, 윤솔 씨, 저희 대표님을 만나러 오셨나요?”
윤솔은 싱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네, 출근했어요?”
“네, 방금 막 도착하셨습니다. 엘리베이터를 눌러드릴게요.”
윤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깍듯한 프런트 직원의 모습을 보며 며칠 전 비플라이 컴퍼니에서 마주쳤던 프런트 직원들을 떠올린 윤솔은 저도 모르게 입을 삐죽거렸다.
허주원이 얼마나 그녀를 무시했으면 일개 프런트 직원조차 그녀를 안중에 두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참 당해도 쌌다. 뭐가 부족해서 자존심도 버리고 허주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등바등했단 말인가. 결국 이혼 증명서 외에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을.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재빨리 생각을 정리한 윤솔은 은색 스틸레토 힐을 밟으며 엘리베이터를 나와 곧바로 소율의 사무실로 향했다.
장경아가 윤솔을 발견하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윤솔 씨, 여긴 어쩐 일이세요?”
“잠깐 둘러보러 왔어요.”
그렇게 말하며 싱긋 미소 지은 윤솔은 닫혀 있는 사무실 문을 가리켰다.
“들어가도 되죠?”
“그럼요. 안에 소율이 혼자 있어요. 마침 오신 김에 당분간 조용히 있어달라고 설득 좀 해 주세요. 요즘 파파라치들이 엄청 따라다니는데 제 얘기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아요. 어젯밤 일도 덮느라 정말 진땀을 뺐어요.”
윤솔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생하셨어요. 제가 소율이한테 단단히 주의시킬게요.”
장경아는 윤솔이 윤율엔터테인먼트의 대주주라는 사실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고 소율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생각이 없고 제멋대로인 소율은 윤솔이나 임승민만이 통제할 수 있었고 매니저인 그녀는 그저 따라다니면서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망아지 같은 소율을 윤솔이 기꺼이 책임져주겠다고 하니 그동안 많이 시달렸던 장경아는 다시 살아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얼른 들어가세요.”
윤솔은 문을 열고서 소율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대중 앞에서 언제나 반짝이던 소율은 지금 흥미진진한 얼굴로 태블릿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거야?”
소율의 옆자리에 걸터앉은 윤솔은 양반다리를 하고 있는 소율의 다리를 찰싹 때렸다.
허주원과 온지우의 스캔들에 집중하고 있던 소율은 어느새 나타난 윤솔의 모습에 돌연 눈을 반짝였다.
“네 전 남편과 그 첫사랑 스캔들을 보고 있었어! 꽤 감동적인 스토리였어.”
그 말에 윤솔은 소율을 샐쭉 흘겨보았다.
“방금 뭐라고 했어?”
일순 등골이 오싹해진 소율은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하고서 비분에 찬 목소리로 분개했다.
“내 말은, 그 개 같은 연놈들 참 뻔뻔스럽지 않아? 이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꼭 붙어 다니는 꼴 좀 보라지. 서로가 진정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해 안달이 났나 봐.”
윤솔은 찻잔에 차를 따르며 대꾸했다.
“아주 신난 얼굴인데?”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소율은 그제야 겁이 나기 시작했다.
“잘못했어, 정말 잘못했어! 내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 그 불여시 전시회 티켓을 두 장 구해왔으니까 진민준이랑 같이 다녀와. 아주 깜짝 놀랄걸! 허주원이 뭐가 그렇게 대단해? 결국엔 네가 버린 똥차잖아. 그런 쓰레기 같은 자식보다 진민준이 백 배, 천 배는 나아.”
윤솔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배짱 있으면 허주원 앞에서 그렇게 얘기해!”
그 말에 소율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우리 모두 사회적으로 얼굴이 팔린 사람들인데 대놓고 싸우면 얼마나 꼴사나워 보여. 하려면 안 보이는 곳에서 은밀하게 골탕 먹여야지! 날 믿고 그날 진민준이랑 같이 나가 봐. 여론이 바로 네 쪽으로 기울어지게 될 거야!”
“됐어! 진민준도 그만 좀 괴롭혀. 요즘 진민준의 여자친구 팬들이 남긴 댓글들을 확인이나 하고 그런 짓을 벌이는 거야?”
“그건 네가 뭘 몰라서 하는 소리야. 진민준은 이제 실력파로 전향할 건데 여자친구 팬은 차라리 없는 게 나아.”
윤솔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말해 봐.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야?”
“콜록콜록… 온지우가 전시회에 특별 게스트로 허주원을 초대했다는 얘기를 들었어.”
그 말에 일순 멈칫하던 윤솔은 소율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날 구경거리로 삼으시겠다?”
뭔가 찔리는 것이 있는지 윤솔의 눈을 피하던 소율은 윤솔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솔아, 지난 3 년 동안 허 씨 가문에서 네가 당한 걸 생각해 봐! 결국 허주원이 보고도 못 본 척 외면해서 그런 거 아냐? 온지우는 허주원만 초대한 게 아니야. 임청과 허주원의 여동생도 같이 초대했어. 너 지금 사람들이 너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알아? 허가에서 3 년이나 있었으면서 온지우의 초대장보다 쓸모없다고 널 욕하고 있어.”
소율의 타박에 윤솔은 저도 모르게 2년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날은 윤솔의 스물다섯 번째 생일이었고 소율이 조촐한 생일 파티를 준비해 주었었다.
그날 파티에서 윤솔은 그동안 숨겨왔던 비밀을 허주원에게 밝힐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이 지나도록 허주원과 허 씨 일가는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더욱 심한 건 그 일이 있은 뒤에 허정아가 윤솔에게 보낸 스크린숏이었다.
허정아는 윤솔의 초대를 받은 사람들을 전부 단체 채팅방에 초대하고서 윤솔의 생일 파티에 갈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하나같이 안 간다는 대답뿐이었다.
그 스크린숏을 외부에 퍼뜨린 사람도 허정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 일로 윤솔은 또다시 비웃음거리로 전락했고 사람들은 부잣집에 시집 갔다고 꿩이 봉황이 되는 줄 아냐며, 주제도 모르고 생일 파티를 열었다며 윤솔을 실컷 조롱했다.
가슴을 파고드는 지난 기억들에 윤솔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재미없어.”
그러자 소율이 가볍게 혀를 찼다.
“뭐가 재미없어? 그 허정아인지 뭔지 하는 걔, 진민준의 극성팬이란 말이야. 얼마 전에 온지우네 회사에서 진민준과 콜라보로 전시회를 열고 싶다고 진민준의 매니저한테 연락 왔었어. 2 년 전에 허 씨 일가들이 네 초대를 무시했던 것처럼 이번엔 진민준이 그년들의 초대에 응하지 않을 차례야. 으— 생각만 해도 짜릿해!”
윤솔은 웃는 것 같기도, 웃지 않은 것 같기도 한 표정으로 소율을 힐끗 바라보았다.
“대단해. 이젠 날 골탕 먹일 줄도 알고.”
“내가 어찌 감히 널 골탕 먹이겠어.”
잠시 침묵하던 소율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윤솔은 국화차를 한 모금 들이켜고서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가야지. 왜 안 가?”
윤솔은 자신의 우상이 그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허정아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벌써부터 기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