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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네가 버린 똥차

  • 어젯밤 늦게 잠자리에 든 데다 숙취로 괴로운 와중에 아침 댓바람부터 소율에게서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윤솔은 시끄러워서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었다.
  • “또 무슨 일인데?”
  • 원래도 한 모닝 성깔을 했던 윤솔이었지만 허 씨 가문에서 누르고 눌렀던 것의 봉인을 풀자 방금 우리에서 나온 맹수처럼 사나웠다.
  • 소율은 지금 윤솔 옆에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 “나 때문에 깬 거야?”
  • 윤솔은 눈을 희번덕거리고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 “용건이 뭐야? 빨리 말해.”
  • “… 네 전 남편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어. 그것도 그 첫사랑이라는 년과 나란히. 지금 네티즌들이 너희 두 사람 서로 맞바람을 피워서 합의이혼을 한 건 아닌지 수군거리고 있어.”
  • 그 말에 윤솔은 일순 멈칫했다. 잠기운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 “너도 방금 내 전 남편이라고 했잖아. 앞으로 고작 허주원의 일 때문에 목숨 걸고 날 깨울 필요 없어.”
  • 전화기 너머의 소율은 괜히 목덜미를 문질렀다.
  • “미안해, 솔아. 계속 자, 더 자. 방해하지 않을게!”
  • 그러고는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 윤솔은 휴대전화를 침대 위로 던지고서 다시 침대에 풀썩 누웠다.
  • 하지만 방금 전 소율과의 통화가 내내 머릿속에서 맴도는 통에 도저히 잠들 수 없었다.
  • 윤솔은 괜히 짜증이 치밀었다.
  • “리리야, 물 끓여줘.”
  • “네, 주인님.”
  • 윤솔은 슬리퍼를 끌며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에 비친 여인은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고 숙취 때문에 피부 상태가 좋지 못하고 초췌해 보였다.
  • 윤솔은 거울 속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고작 이혼일 뿐이잖아. 이럴 것까진 없잖아, 윤솔아.
  • 그로부터 30 분 뒤.
  • 윤솔은 휴대전화로 소율이 얘기했던 가십 뉴스를 읽고 있었다. 아무 느낌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 사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예감하고 있었지만 정작 허주원과 온지우의 이름이 나란히 오른 뉴스를 확인하자 그저 가소롭기만 했다.
  • 윤솔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트위터를 종료했다. 이미 이혼까지 한 마당에 허주원과 온지우가 한밤중에 데이트를 하든 말든 이제 그녀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 아침 식사를 마친 윤솔은 화장을 하고 파란색 원피스로 갈아입은 뒤 차고 안에서 뽀얗게 먼지가 쌓인 페라리를 몰고서 윤율엔터테인먼트로 향했다.
  • 어제 왔을 때 진민준이 직접 에스코트하고 떠날 때에도 소율이 직접 에스코트하는 모습을 보인 탓인지 프런트 데스크 직원들 모두 윤솔을 정중하게 대했다.
  • “안녕하세요, 윤솔 씨, 저희 대표님을 만나러 오셨나요?”
  • 윤솔은 싱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 “네, 출근했어요?”
  • “네, 방금 막 도착하셨습니다. 엘리베이터를 눌러드릴게요.”
  • 윤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 “고마워요.”
  • 깍듯한 프런트 직원의 모습을 보며 며칠 전 비플라이 컴퍼니에서 마주쳤던 프런트 직원들을 떠올린 윤솔은 저도 모르게 입을 삐죽거렸다.
  • 허주원이 얼마나 그녀를 무시했으면 일개 프런트 직원조차 그녀를 안중에 두지 않을까.
  • 생각해 보면 참 당해도 쌌다. 뭐가 부족해서 자존심도 버리고 허주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등바등했단 말인가. 결국 이혼 증명서 외에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을.
  •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 재빨리 생각을 정리한 윤솔은 은색 스틸레토 힐을 밟으며 엘리베이터를 나와 곧바로 소율의 사무실로 향했다.
  • 장경아가 윤솔을 발견하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윤솔 씨, 여긴 어쩐 일이세요?”
  • “잠깐 둘러보러 왔어요.”
  • 그렇게 말하며 싱긋 미소 지은 윤솔은 닫혀 있는 사무실 문을 가리켰다.
  • “들어가도 되죠?”
  • “그럼요. 안에 소율이 혼자 있어요. 마침 오신 김에 당분간 조용히 있어달라고 설득 좀 해 주세요. 요즘 파파라치들이 엄청 따라다니는데 제 얘기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아요. 어젯밤 일도 덮느라 정말 진땀을 뺐어요.”
  • 윤솔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고생하셨어요. 제가 소율이한테 단단히 주의시킬게요.”
  • 장경아는 윤솔이 윤율엔터테인먼트의 대주주라는 사실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고 소율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 생각이 없고 제멋대로인 소율은 윤솔이나 임승민만이 통제할 수 있었고 매니저인 그녀는 그저 따라다니면서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었다.
  •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망아지 같은 소율을 윤솔이 기꺼이 책임져주겠다고 하니 그동안 많이 시달렸던 장경아는 다시 살아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얼른 들어가세요.”
  • 윤솔은 문을 열고서 소율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대중 앞에서 언제나 반짝이던 소율은 지금 흥미진진한 얼굴로 태블릿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거야?”
  • 소율의 옆자리에 걸터앉은 윤솔은 양반다리를 하고 있는 소율의 다리를 찰싹 때렸다.
  • 허주원과 온지우의 스캔들에 집중하고 있던 소율은 어느새 나타난 윤솔의 모습에 돌연 눈을 반짝였다.
  • “네 전 남편과 그 첫사랑 스캔들을 보고 있었어! 꽤 감동적인 스토리였어.”
  • 그 말에 윤솔은 소율을 샐쭉 흘겨보았다.
  • “방금 뭐라고 했어?”
  • 일순 등골이 오싹해진 소율은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하고서 비분에 찬 목소리로 분개했다.
  • “내 말은, 그 개 같은 연놈들 참 뻔뻔스럽지 않아? 이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꼭 붙어 다니는 꼴 좀 보라지. 서로가 진정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해 안달이 났나 봐.”
  • 윤솔은 찻잔에 차를 따르며 대꾸했다.
  • “아주 신난 얼굴인데?”
  •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소율은 그제야 겁이 나기 시작했다.
  • “잘못했어, 정말 잘못했어! 내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 그 불여시 전시회 티켓을 두 장 구해왔으니까 진민준이랑 같이 다녀와. 아주 깜짝 놀랄걸! 허주원이 뭐가 그렇게 대단해? 결국엔 네가 버린 똥차잖아. 그런 쓰레기 같은 자식보다 진민준이 백 배, 천 배는 나아.”
  • 윤솔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 “배짱 있으면 허주원 앞에서 그렇게 얘기해!”
  • 그 말에 소율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 “우리 모두 사회적으로 얼굴이 팔린 사람들인데 대놓고 싸우면 얼마나 꼴사나워 보여. 하려면 안 보이는 곳에서 은밀하게 골탕 먹여야지! 날 믿고 그날 진민준이랑 같이 나가 봐. 여론이 바로 네 쪽으로 기울어지게 될 거야!”
  • “됐어! 진민준도 그만 좀 괴롭혀. 요즘 진민준의 여자친구 팬들이 남긴 댓글들을 확인이나 하고 그런 짓을 벌이는 거야?”
  • “그건 네가 뭘 몰라서 하는 소리야. 진민준은 이제 실력파로 전향할 건데 여자친구 팬은 차라리 없는 게 나아.”
  • 윤솔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 “말해 봐.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야?”
  • “콜록콜록… 온지우가 전시회에 특별 게스트로 허주원을 초대했다는 얘기를 들었어.”
  • 그 말에 일순 멈칫하던 윤솔은 소율을 돌아보았다.
  • “그러니까 지금 날 구경거리로 삼으시겠다?”
  • 뭔가 찔리는 것이 있는지 윤솔의 눈을 피하던 소율은 윤솔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 “말은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솔아, 지난 3 년 동안 허 씨 가문에서 네가 당한 걸 생각해 봐! 결국 허주원이 보고도 못 본 척 외면해서 그런 거 아냐? 온지우는 허주원만 초대한 게 아니야. 임청과 허주원의 여동생도 같이 초대했어. 너 지금 사람들이 너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알아? 허가에서 3 년이나 있었으면서 온지우의 초대장보다 쓸모없다고 널 욕하고 있어.”
  • 소율의 타박에 윤솔은 저도 모르게 2년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날은 윤솔의 스물다섯 번째 생일이었고 소율이 조촐한 생일 파티를 준비해 주었었다.
  • 그날 파티에서 윤솔은 그동안 숨겨왔던 비밀을 허주원에게 밝힐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이 지나도록 허주원과 허 씨 일가는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 그뿐만이 아니었다. 더욱 심한 건 그 일이 있은 뒤에 허정아가 윤솔에게 보낸 스크린숏이었다.
  • 허정아는 윤솔의 초대를 받은 사람들을 전부 단체 채팅방에 초대하고서 윤솔의 생일 파티에 갈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하나같이 안 간다는 대답뿐이었다.
  • 그 스크린숏을 외부에 퍼뜨린 사람도 허정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 일로 윤솔은 또다시 비웃음거리로 전락했고 사람들은 부잣집에 시집 갔다고 꿩이 봉황이 되는 줄 아냐며, 주제도 모르고 생일 파티를 열었다며 윤솔을 실컷 조롱했다.
  • 가슴을 파고드는 지난 기억들에 윤솔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 “재미없어.”
  • 그러자 소율이 가볍게 혀를 찼다.
  • “뭐가 재미없어? 그 허정아인지 뭔지 하는 걔, 진민준의 극성팬이란 말이야. 얼마 전에 온지우네 회사에서 진민준과 콜라보로 전시회를 열고 싶다고 진민준의 매니저한테 연락 왔었어. 2 년 전에 허 씨 일가들이 네 초대를 무시했던 것처럼 이번엔 진민준이 그년들의 초대에 응하지 않을 차례야. 으— 생각만 해도 짜릿해!”
  • 윤솔은 웃는 것 같기도, 웃지 않은 것 같기도 한 표정으로 소율을 힐끗 바라보았다.
  • “대단해. 이젠 날 골탕 먹일 줄도 알고.”
  • “내가 어찌 감히 널 골탕 먹이겠어.”
  • 잠시 침묵하던 소율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 윤솔은 국화차를 한 모금 들이켜고서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 “가야지. 왜 안 가?”
  • 윤솔은 자신의 우상이 그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허정아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벌써부터 기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