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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성의

  • 오후 1시, 왕숙희가 음침한 얼굴로 집 안에 들어섰다.
  • 한창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던 부경림이 물었다.
  • “엄마, 무슨 일인데 이렇게 화를 내?”
  • 왕숙희는 핸드백을 소파에 힘껏 던지며 말했다.
  • “이게 다 현영 그년 때문이야!”
  • “누구?”
  • 부경림이 휴대폰을 놓고 다가와서 물었다.
  • “엄마, 그 여자 만났어?”
  • “내가 그년을 왜 만나? 저번에 명품 샵에서 그년이 애인들을 앞세워 날 괴롭히더니 그 뒤로 매장에 무슨 얘기를 지껄였는지 오늘 친구랑 쇼핑을 나갔는데 글쎄 경비원이 나를 안 들여보내지 뭐야? 내가 블랙리스트에 올랐대!”
  • 화가 머리끝까지 난 왕숙희가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 “오늘 사모님 다섯 명이랑 갔는데 다른 사람은 다 들여보내고 나는 안 들여보내더라고! 정말 어이가 없어서! 다른 사모님들이 나를 무슨 천한 것 보듯이 쳐다보는데, 내 현영 이년을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었어!”
  • 왕숙희가 고래고래 소리친 덕분에 위층에 있던 부태정과 고민희까지 아래층으로 달려왔다.
  • “무슨 일인데 그래요?”
  • 파란색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부태정은 오늘 유난히 준수하고 깔끔해 보였다.
  • 순백의 원피스를 입은 고민희 역시 신경 써서 꾸미고 나온 티가 역력했다.
  • 왕숙희는 아까 있었던 일들을 부태정에게 설명했다.
  • 부태정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 “그 여자랑 저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까 자꾸 그 여자를 찾아가서 말썽 일으키지 말아요.”
  • 부태정은 현영이 겉보기와 다르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모친인 왕숙희를 걱정해서 한 말이었다.
  • 기분이 언짢아진 왕숙희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 “그년이 날 먼저 건드린 거야.”
  • 잠시 멈칫하던 왕숙희가 다급히 고민희를 향해 웃으며 물었다.
  • “민희야, 어디 나가는 거야?”
  • 고민희가 웃으며 대답했다.
  • “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다고 해서 병문안 가는 길이에요.”
  • 왕숙희가 눈을 흘기며 대꾸했다.
  •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너희가 거기 가서 뭐 해?”
  • “엄마.”
  • 부태정이 굳은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
  • “그분은 제 할머니세요.”
  • 아들이 노부인의 험담을 가장 싫어하는 것을 아는 왕숙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그럼 갔다가 일찍 와. 아까 아줌마 시켜서 민희가 가장 좋아하는 갈비찜 준비하라고 했어. 몸보신해야지.”
  • 고민희는 왕숙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부태정을 따라 집을 나섰다.
  • 현영은 오랜 시간 노부인의 곁을 지키며 살뜰히 보살핀 사람이었다. 그래서 노부인은 현영을 아꼈다.
  • 아무리 고민희가 손자가 좋아하는 여자라지만 절대 현영의 위치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 그래서 부태정은 노부인이 고민희를 멀리한다고 느꼈다.
  • 원인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는 고민희를 노부인께 인사시키고 싶었다.
  • 두 사람 사이의 벽을 조금이라도 허물고 싶어서였다. 어쨌든 고민희는 장차 그의 아내가 될 사람이었으니까.
  • “할머니, 이건 제가 준비한 선물이에요. 몸에 좋은 것들만 준비했으니 받아 주세요.”
  • 현모양처처럼 부드럽고 싹싹한 고민희의 태도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 노부인은 소파에 기댄 채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벌써 할머니라고 부르는 건 좀 이른 것 같고 나중에 두 사람이 결혼하면 그때 불러. 그리고 내가 늙어서 그런지 다른 사람이 주는 건 잘 못 먹어. 그러니 도로 가져가.”
  • 고민희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남자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 부태정이 조모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 “할머니, 민희 성의를 봐서라도 받아 주세요.”
  • 하지만 인생 선배인 노부인이 고민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 “그래, 성의는 알겠는데… 그 성의가 지나쳐서 내 손자며느리를 내 집에서 내쫓아 버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