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안로 사고 영상은 이미 오래전에 지워졌대요. 6년 전 영상이라 복구하기도 쉽지 않았고요. 그런데 자칭 컴퓨터 전문가라는 사람이 와서 자기한테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6년 전 교통사고가 워낙 떠들썩했던 사건이라 영상을 보존하고 있었는데 마침 제가 찾고 있다니까 영상을 가지고 저를 찾아왔더라고요.”
말을 마친 장 비서는 조심스럽게 상사의 눈치를 살폈다.
“영상 속 고민희 씨의 차는 확실히 파란색 승용차와 충돌했습니다. 확인해 보실 건가요?”
그때 당시 현영이 운전하고 다니던 차가 파란색 아우디였다.
“됐어.”
부태정이 담담한 말투로 지시를 내렸다.
“파일은 나 주고 그 사람 밖에서 이상한 소문 내고 다니지 않게 잘 처리해.”
“알겠습니다.”
오랜 시간 부태정과 함께한 장 비서는 상사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부태정은 이 일을 공론화시킬 마음이 없어 보였다. 아마도 현영이 감옥에 가는 일만큼은 막고 싶은 것 같았다.
장 비서가 다녀간 뒤, 부태정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는 외투를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문 앞에 도착하니 거실에서 유쾌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왕숙희와 고민희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환하게 웃고 있었고 평소 장난기 많던 부경림도 조용히 옆에서 휴대폰을 하고 있었다.
부태정을 본 왕숙희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정이 왔구나.”
고민희도 덩달아 일어서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부태정은 고개를 끄덕인 뒤, 외투를 고용인에게 건네며 물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기에 분위기가 이렇게 즐거워요?”
고민희가 왕숙희의 눈치를 살피더니 생긋 웃었다.
“아줌마가 태정 씨 어릴 적 얘기를 들려줬어.”
왕숙희가 짐짓 화난 척 너스레를 떨었다.
“민희야, 아줌마라니? 곧 있으면 우리 집안 며느리가 될 텐데 이제 어머님이라고 불러야지.”
고민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쑥스러운 표정으로 남자를 보며 말했다.
“아직 일러요.”
“가족끼리 쑥스러움을 타기는. 엄마 말이 틀렸어? 태정아?”
왕숙희의 장난에 옆에 있던 부경림도 맞장구를 쳤다.
“그럼 저도 앞으로 민희 누나가 아니라 형수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고민희의 얼굴이 더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부태정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엄마, 장난은 이쯤 하시죠. 민희 쑥스러움을 많이 타잖아요.”
왕숙희가 웃으며 대꾸했다.
“얘 좀 봐?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벌써 마누라 편을 드네? 됐어, 두 사람 얘기 나누게 나는 빠져야겠다.”
부경림도 눈치는 있는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눈을 깜빡했다.
“형, 나도 두 분 사이 방해하지 않을게.”
두 사람이 나가고 집 안에는 부태정과 고민희 둘만 남았다.
고민희가 다가가서 남자의 손을 잡고 머뭇거렸다.
“태정 씨, 아빠가 최근에 자꾸 교통사고 얘기를 꺼내시던데, 혹시 태정 씨가 아빠한테 뭐라고 한 거야?”
부태정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 일도 아니야.”
“현영이 사고랑 연관 있다는 사실을 아빠가 아신 것 같았어. 그런데 난 아무 얘기도 안 했거든? 정말 이상하네.”
말을 마친 고민희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난 이미 다 용서했어. 사건이 더 커지는 걸 바라지도 않고.”
“그 여자가 밉지도 않아?”
“안 미워. 불쌍하잖아. 분명 태정 씨를 너무 사랑해서 그런 미친 짓을 한 걸 거야.”
고민희의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태도에 부태정의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
그가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민희야, 넌 항상 너무 착해서 탈이야. 대학교 때도 그랬었지. 네가 편지에서 그랬잖아. 어릴 때 다친 쥐 한 마리가 가엽다고 침대 머리에서 키웠었다고. 그래서 아버님이 그 일로 혈압 올라서 쓰러지실 뻔했다고.”
말을 마친 그가 빙그레 웃었다.
“참 재밌었어.”
고민희의 미소가 잠시 굳었다. 하지만 이내 굳은 표정을 뒤로하고 밝게 웃으며 말했다.
“옛날 일은 왜 또 꺼내? 그거 다 흑역사야. 참, 경림이가 그러는데 요즘 할머니가 좀 편찮으시다며? 나 할머니 만나 뵙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