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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멍청한 놈

  • 부태정의 차에 탄 현영은 가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 잠시 후, 차가 부씨 가문 본가에 도착했다.
  •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부씨 노부인은 평소 절을 찾는 일이 잦았으며 절에서 돌아온 날은 교외에 있는 본가에서 생활한다.
  • 멀리서 노부인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 “넌 밖에 서 있어.”
  •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노부인이 부태정을 향해 차갑게 말한 뒤, 현영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 “내가 며칠 나가 있는 사이에 집안에 이렇게 큰일이 벌어졌더구나. 현영아, 너답지 않게 너무 섣부른 결정이었어.”
  • 그 말을 들은 현영은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노부인의 손을 잡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 “노부인, 저한테는 더 좋은 일 아닌가요? 드디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됐잖아요.”
  • 노부인은 원망 섞인 눈빛으로 문밖에 서 있는 부태정을 쏘아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 “태정이 저 녀석이 멍청해서 그래. 너처럼 참한 색시를 놔두고…. 이제 네가 나한테 할머니라고 부를 일도 없게 됐구나.”
  • 현영이 눈시울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 “할머니.”
  • 노부인은 그녀의 손을 가볍게 다독이며 말했다.
  • “현영아, 여태 네가 태정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는지 내가 다 아는데 너 정말 다 포기한 거냐?”
  • “포기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어요.”
  • 현영이 씁쓸하게 말했다. 그녀에게 포기 말고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 노부인은 그녀를 와락 껴안으며 그녀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 “태정이랑 이혼한 거, 네 탓이 아니란 거 다 알아.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다 태정이 저놈이 멍청해서 그래.”
  • 현영은 그렇게 한참을 노부인의 품에 안겨 있었다.
  • 부씨 가문에 시집온 뒤, 노부인은 그녀에게 선의를 베풀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 노부인이 계실 때는 왕숙희와 부경림도 감히 그녀를 구박하지 못했다. 현영에게 노부인은 유일한 가족이었다.
  • 현영은 이혼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노부인의 곁에서 효도를 다 하지 못하게 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 “현영아, 태정이 이 녀석은 내가 어릴 때부터 봐서 잘 알아. 만약에라도 나중에 태정이가 널 잡으면 그때 다시 돌아와 줄 수 있어?”
  • 노부인은 현영처럼 착한 손주며느리를 놓치기 너무 아쉬웠고 두 사람이 언젠가는 다시 함께하기를 바랐다.
  • 하지만 현영은 이제 순진한 여고생이 아니었다. 부태정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고민희였다.
  • 현영이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하지만 할머니, 그 사람은 저를 사랑하지 않아요. 사실 6년 전부터 깨달았어야 했어요.”
  • 무언가 생각난 건지, 노부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 “할머니, 이제 할머니의 손주며느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할머니는 제가 존경하는 분이세요.”
  • 현영이 손을 내밀어 노부인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부드럽게 웃었다.
  • “할머니는 스트레스 받지 말고 건강 관리만 신경 쓰시면 돼요. 다른 일로 마음 쓰지 마세요.”
  • 한편 부태정은 문밖에 서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 현영과 노부인 사이가 끈끈한 건 그도 알고 있었다.
  • 결혼 생활이 유지되는 동안 그는 비록 현영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현영은 노부인께 친할머니를 대하듯 정성을 다했다.
  • 왕숙희와 부경림이 시도 때도 없이 그녀를 괴롭혔지만 그녀는 그래도 그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집안일을 착실히 했다.
  • 고민희의 교통사고 가해자가 현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부태정은 그녀가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그녀가 노부인께 진심으로 잘해줬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 이건 그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관용이었다.
  • 한참이 지나서야 방 안에 있던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 “현영아, 앞으로 시간 나면 이 늙은이 보러 자주 와. 내가 살날이 얼마 남은 것 같지 않아서 그래.”
  • “할머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할머니는 백 세까지 건강하게 사실 거예요. 자주 뵈러 올게요.”
  • 부태정이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 “데려다줄게.”
  • 현영이 차갑게 거절했다.
  • “필요 없어. 데리러 온 사람이 있어.”
  • 말을 마친 그녀는 아까부터 대기하고 있던 검은색 마이바흐로 다가갔다.
  • 부태정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유준수와 그 남자 모델이었다.
  • 무엇이 그리 신이 났는지 밝은 미소를 짓는 세 사람을 보자 부태정은 가슴이 쓰렸다.
  • 노부인이 연거푸 기침을 하더니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 “나는 이제 나이가 들어서 너희 일에 관여할 기력도 없어. 하지만 태정아… 언젠가 후회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 부태정을 아끼고 사랑하던 노부인이었지만 이번 일로 그에 대한 실망도 컸다. 말을 마친 노부인은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고용인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 문 앞에 선 부태정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 ‘후회? 절대 그럴 일 없을 거예요,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