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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의뢰인 상담

  • 집으로 돌아온 임연아는 곧장 욕실로 들어가서 샤워를 했다.
  • 큰집에 혼자 있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었지만 그 주제도 모르는 남자 생각을 하지 않아서 기분이 무척 상쾌했다. 이제 그녀는 다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 왜 바보처럼 모든 정력과 시간을 남자 한 명에게 올인했는지 후회가 되었다.
  • 밤은 점점 깊어졌다. 박지헌의 아내로 살 때는 항상 불면증에 시달렸는데 그 집에서 나오고 잠이 저절로 쏟아졌다.
  • 물론 쉽사리 잠들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 본가에서 나온 박지헌은 회사로 돌아갔지만 도무지 일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찍 집으로 돌아왔는데 침대에 누우니 비웃음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던 임연아의 얼굴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 갑자기 눈을 번쩍 뜬 박지헌은 짜증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 그는 핸드폰을 들어 비서에게 화상회의를 열어야겠다고 재촉했다!
  • 야심한 밤에 잠을 설친 그는 분노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 화면으로 잡아먹을 듯이 자신들을 노려보는 상사의 얼굴에 사람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 저 악마의 심기를 건드린 사람이 도대체 누굴까?
  • 다음 날.
  • 집에서 관련 자료들을 읽어보던 임연아는 소현의 전화를 받았다.
  • “재인아, 한태준 대표가 너 한번 만나자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
  • 임연아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이 일을 다시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사람을 안 보고 살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약속시간을 정해 알려달라고 소현에게 부탁했다.
  • 30분 뒤, 소현이 그녀를 데리러 집으로 왔다.
  • 소현은 많이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 “정말 괜찮겠어?”
  • 조수석에 앉은 임연아는 느긋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이미 예상했던 일이잖아.”
  • “한태준이 너를 믿게 할 방법은 생각해 봤어? 저번에 그쪽 법무팀이랑 만났는데 네 신분을 가지고 뭐라고 하지는 않았어? 아니면 네가 누군지 모르는 건가?”
  • 임연아는 불안해하는 소현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였다.
  • “걱정하지 마. 이따가 내가 다 설명할게.”
  • 소현은 제발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지나가기를 속으로 기다렸다.
  •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준수한 얼굴의 한 남자가 예약석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깔끔한 수제 정장에 귀티 나는 얼굴, 온화해 보이는 눈빛.
  • 하지만 유순하게만 보이는 그가 사실은 냉철하고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대기업의 오너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 남자는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수시로 들려오는 게임 소리가 그의 분위기와는 사뭇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 그들이 다가오는 소리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 큰 키에 검은 생머리를 깔끔하게 묶고 앞머리로 이마를 살짝 가린 우아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몸에 꼭 맞는 화사한 톤의 정장 원피스가 그녀의 지적인 이미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 들어갈 데 들어가고 나올 데 나온 흠잡을 곳 하나 없는 완벽한 몸매였다.
  • 손바닥으로 가려질 것 같은 작은 얼굴과 매력적인 이목구비, 별을 머금은 듯 반짝이는 눈동자에서 총기가 흘러넘쳤다. 한 번만 스쳐도 넋을 잃고 쳐다보게 만드는 매력 있는 여자였다.
  • 하지만, 여자의 얼굴을 알아본 한태준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현성그룹 안주인이 이곳에는 어쩐 일이죠? 룸을 잘못 찾아오신 것 같은데요?”
  • 재인과의 면담을 기대하고 있던 한태준은 이런 곳에서 임연아를 만난 사실이 많이 불쾌한 듯 보였다.
  • 임연아는 다가가서 한태준의 앞에 살포시 앉으며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 “약속한 대로 잘 찾아온 것 같은데요. 저 보자고 부른 거 아니었나요?”
  • 한태준은 임연아와 함께 들어온 소현을 보고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 “그럼 당신이 바로 그 재인?”
  • 그의 눈빛에서 감탄이 스쳤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여자가 뛰어난 실력을 갖춘 변호사라니! 최대의 라이벌인 박지헌의 여자라서 더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 한태준은 소현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소현 씨가 이 상황 좀… 설명해 주시죠?”
  • 소현은 어색한 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 “한 대표님도 아시다시피 우리 재인 변호사님은 공판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우리와 계약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변호사님의 신분을 밝힐 수도 없어서 여태 숨겼지만 이제 정식으로 의뢰를 맡기로 했으니 미팅에 응한 겁니다.”
  • 한태준의 어깨가 흠칫 떨렸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이내 정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 “그러니까 내가 공을 들여 선임한 내 담당 변호사가 사실은 최대 라이벌의 여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