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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신사의 품격

  • 임연아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 ‘다 알고 계셨다고?’
  • 심화연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 “걱정하지 마! 지헌이 저 녀석이 또 외박하면 내 다리를 분질러 버릴 거야! 이 할미 아직 그럴 힘은 있어!”
  • 임연아는 눈을 깜빡이며 노인을 바라보았다. 다 안다는 말이 이혼한 사실을 안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녀의 힘든 사정을 다 안다는 얘기였다.
  • 심화연은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박지헌을 쏘아보며 으름장을 놓았다.
  • “그게 무슨 표정이야! 뒷방 늙은이가 너희랑 밥 좀 먹자고 했다고 그게 그렇게 짜증 낼 일이야? 내가 밥 먹는 것까지 네 눈치를 봐야겠어?”
  • 박지헌은 그제야 표정을 풀고 고개를 저었다.
  •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할머니한테 감히 불만을 품겠어요.”
  • “흥! 말은 잘하지! 너도 나이가 적지 않아! 이제 아이 가질 준비도 해야 할 거 아니야! 나는 언제쯤 귀여운 증손주 안아보냐고!”
  •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임연아는 다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 박지헌은 그런 그녀를 불만스럽게 흘겨보았다.
  • 주방에서는 고용인들이 바쁘게 요리들을 식탁에 올리고 있었다.
  • 심화연은 임연아의 손을 끌고 식탁으로 갔다.
  • “자, 밥 먹자! 지헌이 너는 먹기 싫으면 관둬! 앞으로 다시 여기 올 생각하지 마!”
  • 박지헌의 표정은 점점 더 구겨졌다. 그는 말없이 그들의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 심화연은 임연아에게 반찬을 챙겨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친손녀처럼 극진히 아끼는 모습에 박지헌은 자신이 진짜 손자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 임연아는 자연스럽게 심화연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노인과 유쾌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 소외감을 느낀 박지헌은 슬며시 수저를 내려놓으며 심화연에게 물었다.
  • “왜 갑자기 본가로 오라고 하신 겁니까?”
  • “너희가 본가에 발을 들이지 않은 게 얼마나 됐지?”
  • 심화연은 눈앞의 행복을 두고 소중함을 모르는 손자가 못마땅하기만 했다.
  • “할미랑 밥 한 끼 먹는 게 그렇게 불편해? 네 할아버지는 출장 때문에 집에 들어오는 일이 손에 꼽을 정도고 나 혼자 이 큰 저택에서 얼마나 외로운지 알아? 손자라는 녀석이 할미 마음도 몰라주고. 쯧쯧.”
  • 말문이 막힌 박지헌은 고개를 숙이고 다시 수저를 들었다.
  • 심화연은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수저를 탁하고 내려놓으며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 “무슨 일이 있어도 연아는 네 아내야! 아내 힘들어하는 것도 모르고 매일 병원에 들락거리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너 때문에 우리 가문 체면이 말이 아니야!”
  • 박지헌은 임채연 얘기가 나오자 인상을 쓰며 반박했다.
  • “채연이는 제 생명의 은인입니다.”
  • “생명의 은인 좋아하네! 눈깔 달린 놈이면 그게 고년 수작인 거 뻔히 알 일을!”
  • 박지헌은 인상을 구기고 임연아를 쏘아보았다.
  • 임연아의 얼굴에 자조적인 미소가 피어올랐다. 박지헌은 그녀가 할머니에게 고자질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 과거의 그녀였다면 그가 오해할까 봐 눈치를 봤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 없었다.
  • 그가 오해한다고 그녀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갈 일도 없었다.
  • “연아는 왜 째려봐! 유치하게 연아가 고자질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매일 대놓고 병원을 들락거리고 외박을 밥 먹듯이 하는데 내가 모를 리가 있나! 이 할미가 그 정도로 무능해 보여?”
  • 박지헌은 말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 식사가 진행되는 내내 심화연은 박지헌을 타박했다.
  • 곁에서 듣고만 있던 임연아는 왠지 모를 통쾌함을 느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 식사 후 노인과 다과를 즐긴 뒤에야 그녀는 박지헌과 함께 돌아갈 채비를 했다.
  • 밖으로 나온 임연아는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생각 같아서는 택시를 타고 각자 돌아가고 싶은데 할머니가 그들의 이혼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박지헌의 차를 타야 했다.
  • 그녀는 이 남자와 한시도 더 붙어 있고 싶지 않았다. 이미 오는 길에 짜증이 날 대로 나버린 그녀였다.
  • 박지헌은 똥 씹은 표정으로 임연아를 쏘아보고 있었다. 마중을 나온 심화연은 그 모습을 보고 손을 들어 그를 밀쳤다.
  • “어서 차 문 안 열어주고 뭐 해? 어떻게 신사다운 모습이 하나도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