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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있을 때 잘했어야지!

  • 임연아는 처음 시계를 선물할 때 그의 표정이 떠올랐다. 잔뜩 경멸에 찬 표정으로 시계를 바닥에 집어 던지던 모습. 그가 짜증스럽게 문을 박차고 나간 뒤, 임연아는 접착제로 산산이 부서진 시계를 한 땀 한 땀 다시 붙였었다.
  • 망가져서 다시 쓸 수도 없는 물건이었지만 그녀는 버리지 않았다.
  • 한참 뒤에야 시선을 느낀 박지헌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친 그는 차가운 비웃음을 흘리며 시계를 화장대에 던졌다.
  • “당신은 쓰레기를 수집하는 게 취미인가 봐? 내 집이 쓰레기장이야?”
  • 임연아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 “그럼 버리면 되잖아요.”
  • 말을 마친 그녀는 그를 지나쳐 목걸이를 찾았다.
  • 박지헌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 시계를 들고 선물이라며 환하게 웃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나는데 지금은 아무 상관 없는 듯이 버리라고 말한다!
  • ‘그래! 변했어!’
  • 그는 임연아가 변심했다고 확신했다.
  •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지금 같은 시기에 다른 남자와 웃고 떠들 수 있을까?
  • 그는 잔뜩 인상을 구기며 으르렁거렸다.
  • “임연아! 흔쾌히 이혼에 동의한 게, 이미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서였어?”
  • 임연아는 어이없어서 웃음만 나왔다.
  • “당신 마음대로 생각해요.”
  • 말을 마친 그녀는 화장대로 다가가서 액세서리 박스를 열었다. 두 사람은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지만 그녀는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 목걸이를 챙긴 임연아는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 푸르뎅뎅해진 박지헌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 “여기가 당신 놀이터야?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게?!”
  • 임연아는 아무리 뿌리쳐도 상대가 끄떡도 하지 않자, 짜증스럽게 되물었다.
  • “나한테 원하는 게 뭐예요?”
  • ‘성질 나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 박지헌은 바둥거리는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차갑게 말했다.
  • “할머니가 당신 만나고 싶어 해. 저녁에 나랑 본가로 좀 가줘야겠어!”
  • 임연아는 미간을 확 찌푸리며 무슨 이런 황당한 놈을 봤냐는 눈빛으로 박지헌을 쏘아보았다.
  • “박지헌 씨,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죠? 할머니가 손자며느리가 보고 싶다고 하셨으면 임채연을 데리고 가야 하는 게 도리 아닌가요?”
  • 속을 살살 긁는 그녀의 말투에 박지현은 점점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 “내가 말했잖아. 할머니가 당신 만나고 싶다는 걸 어떡해! 나라고 당신이랑 거기 가고 싶겠어?”
  • 박지헌은 비웃음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 “임연아, 우리 할머니가 평소에 당신한테 어떻게 했는지 벌써 잊었어?”
  • 그 말에 임연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박씨 가문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가족으로 대해준 사람이 그의 할머니였다. 어린 그녀가 속상할까 봐, 항상 위로해 주고 그녀의 속을 썩이는 박지헌 때문에 미안하다며 이것저것 챙겨주던 노인이었다.
  • 박지헌의 할머니 심화연 여사는 임연아를 친손녀처럼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 그런 노인이 보고 싶다는데…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 “예전에는 할머니 앞에서 온갖 아양을 다 떨더니 이제 이혼한다고 모른 척하겠다는 거야? 임연아, 당신 이 정도로 매정한 여자였어? 이제 아무 쓸모도 없어졌으니까 미련 없이 버린다는 거야?”
  • “나 그런 사람 아니야!”
  • 드디어 폭발한 임연아가 인상을 쓰고 그를 노려보았다.
  • 박지헌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 “그럼 같이 가든가.”
  • 박지헌의 차에 오른 임연아는 머리가 복잡하기만 했다. 실패한 결혼생활 때문에 할머니한테 걱정만 끼쳤다는 죄책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 ‘내가 그때 고집만 부리지 않았어도….’
  • 박지헌의 본가.
  • 집 안으로 들어서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우리 손자며느리 왔구나! 연아야, 어서 이리 와서 앉아!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 임연아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복잡한 표정을 감춘 뒤, 억지로 미소를 쥐어짰다.
  • “할머니, 죄송해요. 요즘 많이 바빠서….”
  •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심화연 여사가 그녀의 손을 다독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 “설명할 필요 없어. 네 입장 난처한 거 이 할미도 알아. 나도 다 알아.”
  • 임연아는 고개를 들고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심화연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다… 알고 계셨어요?”
  • 그들이 이혼 절차를 밟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펄쩍 뛸 양반인데 오늘 보인 반응은 너무 이상했다.
  • 박지헌도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심화연을 바라보았다.
  • 심화연은 그런 손자를 짜증스럽게 쏘아보고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임연아의 손을 잡았다.
  • “그래. 뒷방 늙은이도 듣는 귀가 있어. 다 알아. 지헌이 저 자식이 멍청해서 그래. 내가 직접 고른 손자며느리인데 이렇게 귀한 아이를 소중한 줄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