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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지프에 앉히다

  • 이튿날 오후 회의실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사람들은 전부 속수무책이었다.
  • 이 사건의 총책임자인 정서준 형사는 앞에 있던 서류들을 한데 모았다.
  • “더 보충할 내용이 없으면 회의를 이만 마치죠. 오늘 밤 계속해서 최근 실종된 여성들 명단을 추적해서 신분을 꼭 알아내도록 하세요.”
  • 다들 하품하면서 회의실에서 나가려고 할 때 구석에 있던 한 사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질문 있습니다.”
  • 흰 가운을 입고 한 손을 주머니에 찌른 남연아는 여유 있고 침착해 보였다.
  • 옆에 있던 동료들은 분분히 남연아 쪽으로 시선을 향하고 수군거렸다.
  • “못 보던 얼굴인데, 새로 온 법의관인가?”
  • “요즘 졸업한 애들은 다 저렇게 버릇이 없어? 경험 많은 선배들도 가만히 있는데 새파랗게 젊은 여자애가 뭘 더 보충하겠다는 건데?”
  •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고!”
  • 강아란과 황빈은 마주 보면서 서로의 마음을 읽었다.
  • ‘쯧쯧, 우리 대장을 신인으로 보는 거야? 조금만 있으면 코가 납작해질 테니까 두고 봐!’
  • 남연아는 사람들의 말소리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정 형사 앞으로 가더니 허리를 구부려 원고지 하나를 주워들었다. 원고지 위에는 밟힌 자국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 “부검 결과 말고도 제가 직접 손으로 쓴 자료도 있는데 이렇게 파지 취급을 받네요.”
  • 그녀의 목소리는 높지는 않았지만, 글자마다 쟁쟁하게 들렸고 눈빛은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 사람들 앞이라 정 형사는 약간 난감해졌지만, 곧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 “내가 볼 테니까 자료 이리 주세요.”
  • “한 번 파지로 여겼으면 두 번째도 마찬가지겠죠.”
  • 남연아는 손으로 원고지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 “부검은 사망 시간만 측정하고 DNA 검출만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제가 이미 두 여성의 시신을 전부 봉합해봤는데 얼굴이 완전히 훼손되어 생김새를 알 수는 없으나, 몸의 특징으로 볼 때 그녀들은 기혼 여성으로서 가정 형편이 넉넉하여 고급 미용실 같은 곳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로 추정됩니다. 실종자 명단에서 이 조건에 부합되는 사람은 세 명뿐입니다. 그리고 사망자의 나이에 부합되는 사람은 윤해월, 문은하 두 명이고요. 이 두 여성의 가족들을 모셔다 DNA를 확인해보세요.
  • 수사팀에서는 전력을 다해 세 번째 실종 여성을 찾아서 그 여성이 살해되기 전에 구해야 합니다. 살인범의 칼질이 과단성 있고 깔끔한 걸 보면 동정심이라고는 전혀 없고, 연쇄 범행일 가능성이 커요. 전형적인 소시오패스예요. 서둘러 그를 검거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피해자가 나올 수 있습니다.”
  • 말을 마친 남연아는 태연자약하게 그 자료를 정서준 앞에 놓았다.
  • 정서준이 빠른 속도로 읽어보니 남연아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녀는 진짜로 수백 명이나 되는 수색 명단을 두 명으로 줄였다.
  • “오자마자 이런 토막 살인 사건을 맡게 되어 인사할 겨를이 없었어요.”
  • 남연아의 눈빛은 고인 물처럼 고요했다.
  • “강력계 특별 초빙 법의 고문관 남연아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 남연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 “마흔이 넘는 아줌마일 줄 알았는데 저렇게 젊다니!”
  • “조금 전에 분석한 것만 있으면 우린 나머지 백몇 명은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잖아?”
  • “세상에! 완전히 우리를 밤샘 작업으로부터 구해준 은인이잖아!”
  • “…”
  • 남연아는 그들의 질문도, 칭찬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 “법의 분야는 이미 할 말을 다 했으니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제가 당분간 잔업을 줄일 수 있도록 여러분이 더욱 힘내시길 바랍니다.”
  • 남연아의 입꼬리는 알릴 듯 말 듯 위로 올라갔고 또렷한 눈매는 호수처럼 맑고 투명했다.
  • 단호하게 떠나가는 남연아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방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 ‘와, 대단한데! 스물 몇이면 어때?’
  • 사건 해결은 원래 일분일초를 다투어야 하는데, 전체 강력계에서 그녀처럼 수많은 낮과 밤을 줄일 수 있을 만큼 예리한 사람은 없었다.
  •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자마자 남연아는 작은아들의 전화를 받았다.
  • “엄마, 일하느라 바빠서 또 나까지 잊어버리셨죠?”
  • 남은석은 남연아한테 바가지를 긁었지만, 나무라는 뜻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따뜻한 문안뿐이었다.
  • “날 잊어도 괜찮은데 끼니를 거르지 말고 휴식을 제대로 하세요. 내가 삼계탕을 끓였으니까 오면 바로 드실 수 있어요.”
  • 작은아들의 음식 솜씨를 떠올리며 남연아는 휴대폰에 대고 키스했다.
  • “우리 귀염둥이, 사랑해.”
  • “엄마, 나도 사랑해요.”
  • 남은석은 몇 마디 더 당부한 후에야 아쉬운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 “대장, 조금 전에 전화에서 ‘귀염둥이’라고 한 사람이 혹시 남자친구세요?”
  • 강아란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 ‘남자친구?’
  • 남연아는 낮은 소리로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 “아란아, 나에게 귀염둥이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란다.”
  • 강아란은 넋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다.
  • ‘세상에! 음식을 보내주는 박시현에, 젊은 남자친구들까지, 대장 역시 멋있어.’
  • 남연아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강력계 빌딩 대문을 나섰다.
  •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번쩍번쩍 광이 나는 지프 한 대가 그녀 옆에 서더니 문이 열리면서 누군지 확인하기도 전에 그녀를 뒷좌석으로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