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보충할 내용이 없으면 회의를 이만 마치죠. 오늘 밤 계속해서 최근 실종된 여성들 명단을 추적해서 신분을 꼭 알아내도록 하세요.”
다들 하품하면서 회의실에서 나가려고 할 때 구석에 있던 한 사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질문 있습니다.”
흰 가운을 입고 한 손을 주머니에 찌른 남연아는 여유 있고 침착해 보였다.
옆에 있던 동료들은 분분히 남연아 쪽으로 시선을 향하고 수군거렸다.
“못 보던 얼굴인데, 새로 온 법의관인가?”
“요즘 졸업한 애들은 다 저렇게 버릇이 없어? 경험 많은 선배들도 가만히 있는데 새파랗게 젊은 여자애가 뭘 더 보충하겠다는 건데?”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고!”
강아란과 황빈은 마주 보면서 서로의 마음을 읽었다.
‘쯧쯧, 우리 대장을 신인으로 보는 거야? 조금만 있으면 코가 납작해질 테니까 두고 봐!’
남연아는 사람들의 말소리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정 형사 앞으로 가더니 허리를 구부려 원고지 하나를 주워들었다. 원고지 위에는 밟힌 자국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부검 결과 말고도 제가 직접 손으로 쓴 자료도 있는데 이렇게 파지 취급을 받네요.”
그녀의 목소리는 높지는 않았지만, 글자마다 쟁쟁하게 들렸고 눈빛은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사람들 앞이라 정 형사는 약간 난감해졌지만, 곧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내가 볼 테니까 자료 이리 주세요.”
“한 번 파지로 여겼으면 두 번째도 마찬가지겠죠.”
남연아는 손으로 원고지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부검은 사망 시간만 측정하고 DNA 검출만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제가 이미 두 여성의 시신을 전부 봉합해봤는데 얼굴이 완전히 훼손되어 생김새를 알 수는 없으나, 몸의 특징으로 볼 때 그녀들은 기혼 여성으로서 가정 형편이 넉넉하여 고급 미용실 같은 곳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로 추정됩니다. 실종자 명단에서 이 조건에 부합되는 사람은 세 명뿐입니다. 그리고 사망자의 나이에 부합되는 사람은 윤해월, 문은하 두 명이고요. 이 두 여성의 가족들을 모셔다 DNA를 확인해보세요.
수사팀에서는 전력을 다해 세 번째 실종 여성을 찾아서 그 여성이 살해되기 전에 구해야 합니다. 살인범의 칼질이 과단성 있고 깔끔한 걸 보면 동정심이라고는 전혀 없고, 연쇄 범행일 가능성이 커요. 전형적인 소시오패스예요. 서둘러 그를 검거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피해자가 나올 수 있습니다.”
말을 마친 남연아는 태연자약하게 그 자료를 정서준 앞에 놓았다.
정서준이 빠른 속도로 읽어보니 남연아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녀는 진짜로 수백 명이나 되는 수색 명단을 두 명으로 줄였다.
“오자마자 이런 토막 살인 사건을 맡게 되어 인사할 겨를이 없었어요.”
남연아의 눈빛은 고인 물처럼 고요했다.
“강력계 특별 초빙 법의 고문관 남연아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남연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마흔이 넘는 아줌마일 줄 알았는데 저렇게 젊다니!”
“조금 전에 분석한 것만 있으면 우린 나머지 백몇 명은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잖아?”
“세상에! 완전히 우리를 밤샘 작업으로부터 구해준 은인이잖아!”
“…”
남연아는 그들의 질문도, 칭찬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법의 분야는 이미 할 말을 다 했으니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제가 당분간 잔업을 줄일 수 있도록 여러분이 더욱 힘내시길 바랍니다.”
남연아의 입꼬리는 알릴 듯 말 듯 위로 올라갔고 또렷한 눈매는 호수처럼 맑고 투명했다.
단호하게 떠나가는 남연아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방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와, 대단한데! 스물 몇이면 어때?’
사건 해결은 원래 일분일초를 다투어야 하는데, 전체 강력계에서 그녀처럼 수많은 낮과 밤을 줄일 수 있을 만큼 예리한 사람은 없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자마자 남연아는 작은아들의 전화를 받았다.
“엄마, 일하느라 바빠서 또 나까지 잊어버리셨죠?”
남은석은 남연아한테 바가지를 긁었지만, 나무라는 뜻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따뜻한 문안뿐이었다.
“날 잊어도 괜찮은데 끼니를 거르지 말고 휴식을 제대로 하세요. 내가 삼계탕을 끓였으니까 오면 바로 드실 수 있어요.”
작은아들의 음식 솜씨를 떠올리며 남연아는 휴대폰에 대고 키스했다.
“우리 귀염둥이, 사랑해.”
“엄마, 나도 사랑해요.”
남은석은 몇 마디 더 당부한 후에야 아쉬운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대장, 조금 전에 전화에서 ‘귀염둥이’라고 한 사람이 혹시 남자친구세요?”
강아란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남자친구?’
남연아는 낮은 소리로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아란아, 나에게 귀염둥이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란다.”
강아란은 넋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다.
‘세상에! 음식을 보내주는 박시현에, 젊은 남자친구들까지, 대장 역시 멋있어.’
남연아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강력계 빌딩 대문을 나섰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번쩍번쩍 광이 나는 지프 한 대가 그녀 옆에 서더니 문이 열리면서 누군지 확인하기도 전에 그녀를 뒷좌석으로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