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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가면 없이 외출하다

  • “남연아요?”
  • 이 세 글자는 벼락처럼 남수아를 내리쳤다. 아름답던 그녀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 ‘그 여자는 5년 전에 이미 죽었잖아? 내 손으로 만든 불바다 속에서 뼈도 남지 않았잖아? 어떻게 살았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 공포가 조수처럼 밀려오면서 남수아는 질식할 것 같았다. 그녀는 겨우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았지만, 조금 전의 달콤했던 목소리는 아니었다.
  • “아저씨… 진봉이, 진아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너무 궁금해요. 그 아가씨가 어떻게 생겼는지… 저한테 말씀해주시겠어요?”
  • 안씨 아저씨는 생각해보다가 사실대로 말했다.
  • “그 남연아 씨는 보통 인물에 스물네다섯쯤 돼 보였어요. 키는 한 165센티미터 정도 되고요. 두 눈이 예쁜 것 빼고 이목구비는 평범했어요… 평소에 햇볕을 자주 쬐는지, 얼굴에 주근깨가 많더라고요…”
  • 남수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홀가분하게 웃음을 지었다.
  • 그녀와 쌍둥이인 남연아는 생긴 게 그녀와 거의 똑같았고, 전반적으로 볼 때 남연아가 그녀보다 조금 더 예뻤다. 하지만 안씨 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오늘 손님으로 온 남연아는 주근깨투성이라고 하니까 백 퍼센트 그녀의 친언니가 아니었다.
  • 전화를 끊고 남수아는 손에 든 와인잔을 돌렸다. 그녀의 눈에는 매서운 빛이 번쩍였다.
  • ‘내 손으로 직접 불에 태워 죽였는데 살아서 돌아올 수 없잖아? 그 못생긴 여자가 우연히도 남연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괜히 놀랐잖아.’
  • 박씨 가문 기사는 남연아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 자신이 임대한 40평 남짓한 스위트룸을 보면서 널찍한 박씨 저택을 떠올린 남연아는 새집이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게 느껴졌다.
  • 남연아가 돌아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은 남은석은 자신의 방에서 걸어 나왔다.
  • “엄마, 내가 가서 국 좀 덥힐게요.”
  • 얼마 지나지 않아 남은석은 따뜻해진 삼계탕을 남연아 앞에 놓았다.
  • “엄마, 이번 삼계탕에 내가 동충하초와 황기, 구기자, 대추까지 넣었어요. 전부 엄마 몸에 좋은 약재들이에요.”
  • 한 숟가락 떠서 먹자 남연아는 몸과 마음이 모두 따뜻해졌다.
  • 남은석의 솜씨가 박씨 가문 요리사에 비할 수는 없었지만, 남연아는 자신의 아들이 직접 끓인 음식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녀석이 끓여준 삼계탕을 소홀히 하지 않고 전부 다 먹었다.
  • 남은석은 설거지부터 서두르지 않고 휴대폰을 꺼내 남연아한테 건네주었다.
  • “엄마, 형이 요즘 새로운 연극팀에 들어갔는데, 여주인공의 아들 역을 맡았대요. 그런데 그 웹 드라마 여주인공을 맡은 배우를 보고 깜짝 놀랐대요. 그 배우가 글쎄 엄마보다 카리스마가 약간 부족한 것 빼고는 생긴 게 거의 똑같더라니까요. 형은 그 배우가 엄마랑 똑같이 생겼다고 말하지는 않았는데 나 보고 엄마랑 그 배우 사이에 무슨 인연이 있는지 물어보라고 했어요.”
  • 남은석은 크랭크 인 때 사진을 확대해서 한 여자의 얼굴을 보여 주었다.
  • 남연아는 사진 속의 여자를 첫눈에 알아보았다.
  • 남수아였다.
  • 몇 년 동안 남연아는 줄곧 원한을 깊숙이 감추고 즐겁게 살려고 노력했다. 아무도 그녀 마음속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했다. 깊은 밤이 되면 아기를 빼앗고 불을 지르던 장면들이 영화처럼 그녀의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고는 했다. 남연아는 테이블보가 찢어질 정도로 힘껏 비틀었다.
  • “엄마, 왜 그러세요?”
  • “은석아, 이 사람은 엄마의 친여동생이지만, 가장 심하게 엄마를 다치게 한 사람이야.”
  • 남연아는 아리송한 눈빛으로 말했다.
  • “은파한테 전해. 내 신분을 들켜서도 안 되고 나와 은파가 모자 관계라는 것도 말해서는 안 된다고.”
  • 속이 깊은 남은석은 남연아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엄마, 알겠어요.”
  • 남연아는 아들들한테 설명할 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 그녀의 두 아들은 지능 지수, 감성 지수가 모두 높았다. 하지만 그들의 ‘이모’가 예전에 자신을 불에 태워 죽이려고 했고, 그들의 형과 누나를 들고양이 죽이듯 죽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그들한테 말해주랴?
  • 이 복수를 그녀는 언젠가는 해야 했다.
  • 눈 깜짝할 사이에 엄마의 기일이 되었다.
  • 5년 동안 줄곧 국외에 있다 보니 남연아는 엄마의 묘소에 가서 제사를 지내본 적이 없었다. 이번 기일에 그녀는 일찍 일어나서 아래위 검은색 옷을 입은 후 못생긴 가죽 가면을 쓰지 않고 옅은 화장만 했다.
  • 욕실 문 어귀에 엎드려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남은석은 입을 삐죽거렸다.
  • “엄마, 이번에 외할머니 보러 진짜로 나를 데리고 가지 않을 건가요?”
  • “밖에 비도 오고 외할머니 무덤이 산꼭대기에 있어서 올라가기 힘들어. 그러니까 넌 얌전히 집에 있어.”
  • 남씨 가문 정실부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엄마는 교외에 이름도 없는 산에 묻혔다. 그녀가 그동안 한국에 없었으니 엄마의 무덤은 아마도 풀이 무성할 것이다.
  • “그럼 다음에는 꼭 나랑 형을 데리고 가야 해요.”
  • 남은석은 호박전을 잘 포장해서 남연아한테 건네주었다.
  • “엄마, 이건 내가 외할머니 드리려고 직접 만든 거예요. 외할머니한테 가져다드리세요.”
  • 남연아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환하게 웃었다.
  • “그래.”
  • 문을 나선 후 남연아는 택시를 타고 교외의 천우산으로 갔다.
  • 그곳에 도착해 보니 역시 그녀가 생각했던 대로였다. 비가 내린 후의 산은 오르기 여간 힘들지 않았다. 겨우 산꼭대기에 오른 그녀는 비석 위에 진흙을 닦은 후 백합과 호박전을 무덤 앞에 놓았다.
  • 비는 그치지 않았다. 남연아는 비석에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그녀는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났다.
  • 성묘를 마치고 남연아는 시내 중심으로 돌아왔다.
  • 몸이 빗물에 젖어 약간 추위를 느낀 그녀는 서점 겸 커피숍을 보자 문을 열고 들어갔다.
  • 최근 몇 년 남수아는 연예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불필요한 일이 생기는 걸 막기 위해 남연아는 오늘 나올 때 가면을 쓰지는 않았지만, 선글라스와 얼굴 절반을 막을 수 있는 커다란 마스크를 하고 나왔다.
  • “아메리카노 한잔 주세요.”
  • “아메리카노 한잔 주세요.”
  • 남연아가 커피를 주문하기 바쁘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 남연아는 소리를 따라 바라보다가 뜻밖에도 고인 물처럼 깊고 고요한 남자의 눈빛을 보게 되었다. 이 시각 그녀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바로 이거였다!
  • 그녀는 우연히 이곳에서 박시현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