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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명의 아닌 법의관

  • 최근 3년 동안 여자 명의 하나가 국내외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녀는 5천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한의학 약리로 많은 난치병을 치료했다.
  • 사람들은 그녀의 외모로 신분을 알아내려고 했지만, 그녀는 매번 치료할 때마다 다른 얼굴로 나타나고는 해서 그녀의 이름과 신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치료를 받으려면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그녀한테 메일을 보내고 얌전히 순서를 대기해야 했다.
  • 치료해줄지 말지는… 여 명의한테 달렸다.
  • 이 명의는 다름 아닌 지금 이렇게 가죽 가면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남연아였다.
  • “우리 아들, 2백억이면 큰돈인데, 누군지 말해줄래? 어떤 난치병을 치료하고 싶대?”
  • “엄마, 구해달라고 하는 사람은 만흥 그룹 대표 장경천인데 3개월 전에 뇌출혈로 쓰러졌고, 그 합병증으로 하반신이 마비되고 언어 신경까지 망가져 지금은 말하기조차 힘들다고 해요.”
  • 장경천이라는 세 글자를 들은 남연아는 코웃음 쳤다.
  • “거절해.”
  • “엄마, 2백억이나 내놓았는데 이렇게 망설이지도 않고 거절해도 돼요?”
  • “2백억으로 내 양심을 사겠다고? 그동안 장경천이 암암리에 긁어모은 검은돈이 얼마겠어! 이 세상에는 인면수심인 부자들이 죽는 걸 더 두려워하거든!”
  • 남연아의 눈에는 경멸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리고 가죽 가면을 테이블 위에 던졌다.
  • “그래서 엄마는 명의가 되지 않고 법의관이 되려고 돌아온 거예요?”
  • 남연아는 부인하지 않았다.
  • “인심은 탐욕스러워. 의사들도 만능은 아니거든. 어떤 사람들은 돈 좀 있다고 의사한테 불가능한 일을 시키고는 해. 그래서 난 차라리 죽은 사람을 대신해 말하면 말했지, 살아있는 사람의 병은 보고 싶지 않아.”
  • “엄마, 난 엄마의 이런 정의감이 좋아!”
  • 남은석의 통통한 얼굴에는 남연아에 대한 존경심이 담겨 있었다.
  • 남연아는 한 손으로 턱을 받치며 미소를 지었다.
  • “그건 그래. 누가 날 좋아하지 않겠어?”
  • 가죽 가면을 벗은 엄마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남은석은 저도 모르게 공항에서 만났던, 엄마한테 집착하던 그 꼬마가 떠올랐다.
  • “엄마, 오늘 공항에서 엄마한테 달라붙던 그 여자애, 엄마랑 닮았어요…”
  • “그래?”
  • 여자애 말이 나오자 남연아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딸이 생각났다.
  • 5년 전에 남수아가, 그녀가 낳은 쌍둥이 남매를 데려갔다.
  • ‘나를 미워하는 남수아 손에 들어갔으니 살아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겠지?’
  • 여기까지 생각한 남연아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 ‘우리 딸이 살아있다면 오늘 공항에서 만났던 꼬마와 비슷하지 않을까?’
  • 이튿날 다섯 시가 좀 넘어서 남연아는 전화벨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
  • 잠이 덜 깬 상태에서 그녀는 휴대폰을 받아 귓가에 가져갔다. 전화 너머로 나이가 지긋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 “연아야, 정식으로 출근하기도 전에 임무를 맡겨서 미안해. 송강에서 오늘 아침에 여러 개 주머니에 담긴 시신 조각들을 건졌는데 물속에 있었던 시간이 꽤 길어서 시간도 빠듯하고 임무가 막중해. 그래서 너의 지원이 필요해.”
  • “영감님, 위치 보내주세요. 15분 이내에 도착할게요.
  • 남연아는 게슴츠레한 눈을 비비며 작은아들이 차버린 이불을 다시 잘 덮어준 후 침대에서 기어 일어났다. 재빨리 세수를 마친 그녀는 거울을 보며 다시 주근깨투성이 가죽 가면을 뒤집어썼다. 거울 속에 있던 절세미인은 순식간에 다시 못생긴 여자로 변했지만, 한 쌍의 맑은 눈에서는 여전히 교활하고 기민한 눈빛을 내뿜었다.
  • 약속한 대로 그녀는 15분 이내에 현장에 도착했다.
  • 현장은 이미 남색과 흰색이 뒤섞인 경계선으로 막혀 있었다. 제복을 입은 한 젊은 경찰이 그녀를 막았다.
  • “여사님, 이곳은 이미 막혔습니다. 관계자 외에는 출입 금지예요.”
  • “서울 강력계 특별 초빙 법의 고문관 남연아입니다.”
  • 남연아는 주머니에서 출입증을 꺼내 경찰 앞에 놓았다.
  • 출입증을 본 경찰이 남연아를 바라보는 눈빛마저 변했다.
  • 특별 초빙 법의 고문관이면 강력계의 어느 부서에도 소속되지 않았고 경찰 서장의 지시에만 따른다. 게다가 아무도 그녀한테 일을 시킬 권한이 없었고, 반대로 사람들은 그녀의 배정에 따라야 했다. 멍해 있는 경찰을 보며 남연아는 눈썹을 찌푸렸다.
  •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 젊은 경찰은 다급히 남연아에게 경례하고 들어가라고 했다.
  • 강기슭으로 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땅에 뱀 가죽 무늬의 주머니 여러 개가 놓여 있었는데, 열린 주머니 사이로 분쇄된 시신 조각이 보였고 핏물이 땅에 뚝뚝 떨어져 있었다.
  • 흰 가운을 입은 법의관 두 명이 시신을 사진 찍은 후 주머니에 담아 경찰서로 가져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시신 조각이 시각적으로 주는 충격이 큰데다, 그 냄새가 또한 비리고 역겨워서 한 여 법의관은 몇 번이고 포기하려고 했다. 두 법의관의 일 진행 속도는 너무 느렸다.
  • 눈앞의 상황을 훑어보고서야 남연아는 강 영감님이 왜 이른 아침부터 그녀한테 일을 시켰는지 알아차렸다.
  • 그녀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웅크리고 앉아 땅에 있는 부검 상자를 열었다.
  • “그렇게 꾸물거리다가 해가 다 지겠어요.”
  • 황빈과 강아란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 특히 강아란은 시신 조각 때문에 위에서 경련이 일어날 지경인데 자기 말만 주장하는 못생긴 여자한테 한 소리 듣자 화가 치밀었다.
  • “당신이 법의예요, 아니면 우리가 법의예요? 어디서 불쑥 튀어나와서 우리한테 왈가왈부 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