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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공주님이 입을 열다

  • 박시우는 박진아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여자와 헤어진 후 박진아의 얼굴에는 서러움이 잔뜩 서려 있었다. 기분이 별로인지 평소에 가장 즐겨 먹던 아이스크림을 보고도 고개를 젓더니 눈이 토끼처럼 빨개져서 곧장 침실로 뛰어갔다.
  • ‘이렇게 가여운 모습을 하고 있으면 형이 날 가만두지 않을 텐데!’
  • 박시우는 슬그머니 돌아서서 소파에 앉아있는 박시현을 쳐다보았다.
  • 검은색 셔츠와 반듯하게 다림질한 정장 바지는 박시현의 넓은 어깨와 가는 허리, 쭉 뻗은 다리를 완벽하게 그려냈다. 그의 이목구비는 그림처럼 정교했고, 그의 눈매는 먼 옛날 은하수처럼 그윽하고 샘물처럼 차가워서 두려움에 떨게 했다.
  • “말해, 너 진아한테 무슨 짓했어?”
  • “형, 하늘에 맹세하는데, 공주님이 나를 괴롭히지 않으면 감지덕지할 판에 내가 감히 무슨 짓하겠어?”
  • 명색이 박씨 가문 둘째 도련님인 박시우는 5년 전 박시현이 박진봉, 박진아를 데려온 후부터 그 지위가 가정부로 추락했다. 그들 둘한테 무슨 일이 생기기만 하면 나중에 죄를 뒤집어쓰는 사람은 꼭 그였다!
  • 박시우는 죄를 뒤집어쓰기 전에 그래도 요점은 말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 “형, 빅 뉴스야. 진아가 말을 했어.”
  • 박시현의 눈에 희색이 감돌았다. 그는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 “이번에 네가 진아를 데리고 프랑스로 가서 제임스 교수를 만난 게 효과를 본 거야?”
  • “아니야, 그건 절대 아니야.”
  • 박시우는 고개를 저었다.
  • “진아 치료 과정에 내가 쭉 참여했잖아. 제임스 교수도 이번에는 그냥 통상적인 치료만 했어. 예전과 별 다를 바 없었다고.”
  • “그럼 뭐야?”
  • “형, 오늘 공항에서 진아가 스물몇 살쯤 되는 여자를 만났거든. 진아가 그 여자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몇 번씩이나 엄마라고 부르더라고. 그 여자와 헤어질 때 형이 못 봐서 그렇지, 아이고,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더라니까!”
  • 오늘 오후에 일어난 일을 박시우는 지금 생각해봐도 믿을 수 없었다.
  • 박시현이 그 해에 쌍둥이 남매를 데려왔을 때 그들의 엄마가 누구라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박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엄마가 남씨 가문 딸 남수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우리 공주님이 친엄마한테는 한마디도 하지 않더니 전혀 모르는 여자한테는 왜 엄마라고 했을까?’
  • 박시현도 눈을 찌푸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그 여자는 어떤 사람인데?”
  • “아주 못생기지는 않았는데 주근깨투성이고, 아무튼 생긴 건 진짜 별로였어.”
  • 박시우는 열심히 기억을 더듬었다.
  • “이목구비도 평범해서 기억에 남는 게 없네.”
  • “박시우, 누가 너한테 예쁜지 못생겼는지를 물었어?”
  • “…”
  • 박시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박시우, 그 여자가 진아한테 특별한 존재라고 여겼으면 왜 사람을 보내 그녀에 대해 알아보라고 하지 않았어?”
  • 생긴 게 평범한 이 여자가 박진아의 실어증을 치료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걸 박시현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박시현의 말을 들은 박시우는 후회스러워 자신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 “젠장! 이렇게 중요한 일을 내가 까먹었네! 지금 바로 가서 그 사람을 조사할게.”
  • 2층 침실에서 박씨 가문 왕자님 박진봉이 박진아한테 색연필을 깎아주고 있었다.
  • 장손인 박진봉은 박씨 가문에서 박진아에 비해 더 존재감이 있었다. 하지만 박진봉은 남들한테만 틀을 차렸지, 동생 박진아를 끔찍이도 아꼈다.
  • 박진아는 박진봉이 깎아준 색연필로 종이에 여자를 그렸다.
  • 그 여자는 가냘픈 몸매에 납작한 코, 두툼한 입술, 온 얼굴에 주근깨가 널려 있었다. 하지만 박진아는 이 여자를 그릴 때 줄곧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 다 그리고 나서 박진아는 또 그 못생긴 여자의 머리 꼭대기에 비뚤비뚤하게 ‘엄마’라는 두 글자를 써 놓았다.
  • “엄마?”
  • 박진봉이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박진아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네가 그린 사람이 아빠가 우리한테 알려준 그 여자야?”
  • 박진봉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거부했다.
  • 그와 그의 여동생은 모두 남수아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남수아가 예쁜 건 부인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주근깨 같은 잡티가 아예 없었다.
  • 남수아의 말이 나오자 박진아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자그마한 머리를 땡땡이처럼 흔들었다.
  • ‘남수아를 어찌 내가 그린 엄마와 비교할 수 있단 말이야?’
  • “그녀가 아니면 누구야?”
  • 박진아는 엄마를 만났던 느낌을 오빠한테 말해주고 싶어 입을 벌렸지만, 소리를 낼 수 없었다. 기가 죽은 박진아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잘 말아서 보물처럼 품에 껴안았다.
  • 동생이 주근깨투성이인 여자를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본 박진봉도 그 여자가 도대체 무슨 매력으로 동생을 반하게 했는지 궁금해졌다.
  • 이와 동시에 남연아는 가죽 가면을 벗으며 심하게 재채기했다.
  • “누가 또 내 생각을 하는 거야?”
  • 컴퓨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던 남은파가 메일 내용을 확인하더니 말했다.
  • “엄마를 찾는 사람이 확실히 있어요! 2백억을 내놓을 테니 구해달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