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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아빠는 철이 없어요

  • 박진봉은 흠칫 놀라며 몸을 돌리고 식탁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박시현을 바라보았다.
  • 박시현은 아직도 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검은색 셔츠 단추 두 개를 풀어 헤치고 타이트한 허리 라인에 슬림한 두 다리의 그는 먹물처럼 짙은 눈동자에 노기가 서려 있었다.
  • 꼬맹이는 입을 내밀면서 통통한 얼굴을 쳐들고 억지로 말했다.
  • “아빠.”
  • 점점 더 깊이를 알 수 없는 박시현의 눈빛과 마주친 남연아는 속으로 흠칫 놀랐다.
  • ‘뱀을 가지고 노는 요 녀석이 박시현의 아들이라고? 그럼 박시현은 자식이 박진아만 있는 게 아니라 쌍둥이 남매가 있었던 거야?’
  • 박시현은 냉담한 눈빛으로 박진봉을 힐끗 보았다.
  • “겨우 다섯 살밖에 안 되는 너의 머리에는 도대체 뭐가 담겼어? 무슨 자격으로 너의 여자가 되라고 하는 거야?”
  • 박진봉은 박시현이 두려웠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연아를 지켜주겠다고 맹세했던지라 너무 비겁하게 보일 수는 없어서 염치 불고하고 말했다.
  • “아빠, 제가 이 여자를 좋아해요. 그래서 남으라고 했어요.”
  • 박시현은 미간을 심하게 찌푸렸다.
  • “좋아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는 알아?”
  • “당연히 알죠!”
  • 박진봉은 손으로 귀를 만지작거렸다. 그의 볼에 발그스레한 홍조가 떠올랐다.
  • “아빠, 선입견을 품고 저를 보지 마세요. 저도 이제 컸으니까 좋아하는 여자한테 적극적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것쯤은 안다고요.”
  • “이런 말들은 누가 너한테 가르친 거야?”
  • 박시현은 차가운 어투로 따졌다.
  • “제…”
  • 박시현의 눈빛에 박진봉은 약간 겁을 먹었다.
  • “박진봉, 누가 가르쳤냐고?”
  • 박진봉은 까만 눈동자를 몇 번 굴리더니 박시우한테 떠밀었다.
  • “작은삼촌이요. 삼촌이 어떤 아줌마한테 이렇게 말하니까 그 아줌마가 매우 즐거워하셨어요. 그래서 저도 이렇게 말하면 이 여자가 좋아하면서 남을 줄 알았어요…”
  • 꼬맹이의 말을 들은 박시현은 마음속으로 박시우를 벼르고 있었다.
  • “넌 침실로 돌아가. 난 남연아 씨와 아직 할 말이 있어.”
  • 박시현은 담담하게 꼬맹이를 흘끗 보았다.
  • 박진봉은 조금이라도 더 남연아와 함께 있고 싶었다. 하지만 박시현은 그를 얼른 쫓아버리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 ‘아빠가 이 여자를 좋아하니까 혼자 독차지하고 싶어서 친아들도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거야?’
  • 꼬맹이는 입을 삐죽 내밀고 얼버무렸다.
  • “아빠 혼자 가지고 싶으니까… 아빠라는 신분으로 날 누르고… 두고 봐…”
  • “박진봉,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 박진봉은 얼른 얌전히 고개를 저었다.
  • “저… 위층으로 올라갈게요.”
  • 가면서 꼬맹이는 남연아한테 친절하게 설명까지 했다.
  • “아빠가 저를 여기 있지 말라고 하니까 당신과 헤어질 수밖에 없어요.”
  •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눈빛으로 아빠가 나이가 많아서 철이 없으니 이해해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 남연아는 웅크리고 앉아 꼬맹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잘 가.”
  • 박진봉이 떠나가는 모습을 보다가 돌아선 남연아는 조용히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박시현을 발견했다. 그윽한 그의 눈빛에 그녀는 가슴이 약간 두근거렸다.
  • “남연아 씨, 애들을 잘 돌보는 것 같은데요?”
  • “그런가요?”
  • 남연아는 자신이 애들을 잘 보살피는 좋은 엄마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녀도 예전에는 집에 있는 녀석들을 잘 돌보고 싶었지만, 그들이 크면서 오히려 그녀가 그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 식사가 끝난 후 남연아는 박시현을 따라 2층 서재로 갔다.
  • 서재 안에서 남연아는 사무용 가구들 외에 벽 한 면을 차지한, 기세가 웅장한 책장을 보았다. 5미터 가까이 되는 맨 위층에 있는 책을 꺼내려면 사다리까지 필요했다. 크고 높은 책장 덕분에 서재의 분위기는 한층 더 엄숙하고 장엄했다.
  • 박시현의 차가운 눈빛이 남연아한테 쏠렸다.
  • “남연아 씨, 확실히 당신과 함께해야 할 비즈니스가 있어요. 저를 도와 한 사람을 치료해주세요.”
  • 남연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 ‘명의 신분을 줄곧 잘 감춰 왔는데 이 사람은 어떻게 알았지? 안다면 또 얼마나 아는 걸까? 그럼 이 남자가 가죽 가면 속의 내 진짜 얼굴을 알고 있단 말인가?’
  • 이 남자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남연아는 알아야 했다.
  • “박시현 씨, 저를 조사해봤으면 알겠지만, 저는 의사가 아니라 법의예요. 한 글자 차이지만, 전혀 다른 분야죠.”
  • 박시현은 남연아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한 걸음씩 다가갔다. 그의 눈빛에 남연아는 마치 발가벗은 몸으로 박시현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속이 켕겼다.
  • “진아는 어려서 실어증에 걸렸어요. 그래서 저는 진아를 데리고 수많은 명의를 찾아다녔고요. 진아는 몸의 어느 기관이나 조직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마음에서 온 질병이에요.”
  • 박시현은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 “진아가 소리를 내어 ‘엄마’라고 부르게 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 “제가 진아를 입을 열게 했다고요?”
  • “거짓말 아닙니다.”
  • 박시현의 시선이 남연아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면서 차갑게 말했다.
  • “저는 당신이 진아의 마음을 열어주기만을 바랄 뿐이에요.”
  • 그의 말을 듣고서야 남연아는 자신의 신분이 노출된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진아의 실어증만 치료해준다면 당신의 어떠한 요구도 들어드리죠.”
  • “필요 없어요.”
  • 남연아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네요.”
  • 박시현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박씨 가문의 실력으로도 만족시키지 못할 요구인가요?”
  • “욕심이 끝이 없는 사람은 당신 같은데요?”
  • 남연아는 그한테 눈을 흘겼다.
  • “필요 없다는 뜻이에요. 박씨 가문에서 내 요구를 들어줄 필요가 없다고요.”
  • 박시현의 차가운 눈빛에 남연아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 “박시현 씨, 제가 아무 조건도 없이 진아의 실어증 치료에 협조할게요.”
  • “조건 없이요?”
  • 남연아의 눈빛은 귀여운 새끼여우처럼 간사했다.
  • “제가 진아를 예뻐하니까 자주 만나려는 것뿐이에요. 당신과 박씨 가문에 저는 관심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