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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내키지 않아도 참아

  • 흰 가운으로 갈아입고 의료용 고무장갑을 낀 남연아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 “난 오늘부터 근무하게 된 특별 초빙 법의 고문관 남연아야.”
  • 남연아는 악취가 진동하는 시체 조각을 손수 들고 살펴보면서 미간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 “공교롭게도 내가 당신들한테 왈가왈부할 자격이 있어. 내키지 않아? 그래도 참아.”
  • 강아란과 황빈도 오늘 본서에서 중요한 인물이 온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중요한 인물이 눈앞에 있는, 스물몇 살 되는 여자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 두 사람은 당황한 표정으로 남연아를 쳐다보면서 반나절 멍해 있었다.
  • 일도 하지 않고 서 있는 두 사람한테 남연아는 눈을 찌푸렸다.
  • “왜 나만 쳐다봐? 내 얼굴에 실마리라도 있어?”
  • 가죽 가면 탓에 생김새는 엉망이었지만, 날카로운 눈빛과 여유 있고 침착한 기세에 눌린 강아란과 황빈 두 사람은 무의식중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정신을 가다듬고 남연아를 도와 주머니에 있는 시신 조각에 표기한 후 표본 주머니에 넣었다. 모든 것을 다 마무리하고 시신 주머니를 차에 실은 후 그들은 경찰서로 돌아갔다.
  • 차가 경찰서 대문에 서자 남연아가 차에서 내려 시신 주머니를 따라 부검실로 가려는데 그녀의 앞길을 한 낯선 남자가 막아섰다.
  • “남연아 씨, 저희 도련님이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저기 벤틀리로 가서 몇 마디 얘기 나눌 수 있겠습니까?”
  • 남연아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벤틀리를 흘끔 보면서 오만방자하게 말했다.
  • “누군가를 초대하기 전에 자기소개부터 하는 게 예의 아닌가요?”
  • 상호는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박시현의 부하로서 많은 사람을 대해 본 그는 대놓고 그한테 되물은 여자는 아직 한 명도 보지 못했다.
  • “남연아 씨, 저의 윗전은 성세 그룹 대표 박시현입니다. 그분이 남연아 씨와 몇 마디 나누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 ‘박시현?’
  • 남연아는 비록 5년 동안 서울에 있지는 않았지만, 박시현의 이름을 들어본 적은 있었다.
  • 박씨 가문은 서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재벌가로서 부동산, 금융, 반도체,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등 여러 개 산업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몹시 겸손했지만, 그들의 산업은 이미 한국의 모든 업종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 ‘나와 박시현은 아무런 접점도 없는 사이인데 왜 갑자기 날 찾는 걸까?’
  • 이해가 안 되면 생각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남연아는 스스로 고민거리를 찾는 성격이 아니었다.
  • “당신네 도련님한테 전해주세요. 난 부검해야 해서 그를 만날 시간이 없다고.”
  • 그녀의 말에 상호는 물론이고 황빈과 강아란마저 멍해졌다.
  • “뭐라고요? 당신을 요청한 사람은 박시현인데요…”
  • “대장, 다른 사람이라면 거절해도 괜찮겠지만, 박시현을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어요?”
  • 남연아는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부하들을 보면서 눈썹을 찌푸렸다.
  • “세 주머니나 되는 시신 조각들은 어떻게 할 거야? 박시현을 만나고 싶더라도 저 시신들을 전부 부검한 다음 만나도록 해!”
  • 아침 햇살 아래서 소녀의 용모는 비록 못생겼으나 매서운 눈매의 그녀는 카리스마가 어마어마했다.
  • 황빈과 강아란은 이번 부검 임무가 중요하기도 하고 급하기도 했던지라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남연아를 따라 해부실로 올라갔다.
  • 단호하게 떠나가는 남연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의 부실한 일 처리를 깨달은 상호는 낙심하여 벤틀리의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 박시현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뗐다.
  • “상호야, 그 여자는?”
  • “도련님이 남연아 씨한테 할 얘기가 있다고 자리를 좀 옮기자고 했더니 거절하더라고요… 생각도 해보지 않고요…”
  • 상호의 배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목소리가 점점 더 낮아졌다.
  • ‘생각지도 않았다고?’
  • 박진아를 위해 진심을 담아 그녀와 얘기 나누려고 했더니 얼굴조차 못 보게 생겼다.
  • “거절하는 이유가 뭐래?”
  • “급하게 부검해야 해서 도련님을 만날 시간이 없대요.”
  • 말을 마친 상호는 조심스레 백미러를 통해 박시현을 훑어보았다.
  • 박시현은 손가락으로 얇은 입술을 만지며 어두운 눈빛으로 강력계 빌딩을 그윽이 바라보았다.
  • “부검 때문에 날 만나줄 시간이 없다고 하면 부검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자.”
  • 최근 몇 년 박시현은 열심히 일만 하면서 아들딸을 박시우한테 맡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박진봉, 박진아한테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 박진아의 실어증을 고칠 기회를 그는 단 한 번도 놓치려고 하지 않았다.
  • “상호야, 남연아의 정보를 받았어?”
  • “있기는 한데 가장 기본적인 정보뿐이에요.”
  • 상호는 골치가 아픈 듯 말했다.
  • “그녀의 직업 때문인지는 몰라도 예전 경력들이 전부 감춰졌어요.”
  • “우리 사람들은 해킹을 못해?”
  • “도련님…”
  • 상호는 눈을 감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 “해킹이 안 돼요. 해킹은커녕 우리 쪽 시스템이 오히려 상대방의 공격을 받아 수천만 개의 코드를 손해봤어요.”
  • 박시현의 눈빛이 애매해지더니 입귀가 도전적으로 위로 올라갔다.
  • “재미있네! 이 남연아라는 사람을 내가 꼭 봐야 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