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란과 황빈도 오늘 본서에서 중요한 인물이 온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중요한 인물이 눈앞에 있는, 스물몇 살 되는 여자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두 사람은 당황한 표정으로 남연아를 쳐다보면서 반나절 멍해 있었다.
일도 하지 않고 서 있는 두 사람한테 남연아는 눈을 찌푸렸다.
“왜 나만 쳐다봐? 내 얼굴에 실마리라도 있어?”
가죽 가면 탓에 생김새는 엉망이었지만, 날카로운 눈빛과 여유 있고 침착한 기세에 눌린 강아란과 황빈 두 사람은 무의식중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정신을 가다듬고 남연아를 도와 주머니에 있는 시신 조각에 표기한 후 표본 주머니에 넣었다. 모든 것을 다 마무리하고 시신 주머니를 차에 실은 후 그들은 경찰서로 돌아갔다.
차가 경찰서 대문에 서자 남연아가 차에서 내려 시신 주머니를 따라 부검실로 가려는데 그녀의 앞길을 한 낯선 남자가 막아섰다.
“남연아 씨, 저희 도련님이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저기 벤틀리로 가서 몇 마디 얘기 나눌 수 있겠습니까?”
남연아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벤틀리를 흘끔 보면서 오만방자하게 말했다.
“누군가를 초대하기 전에 자기소개부터 하는 게 예의 아닌가요?”
상호는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박시현의 부하로서 많은 사람을 대해 본 그는 대놓고 그한테 되물은 여자는 아직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남연아 씨, 저의 윗전은 성세 그룹 대표 박시현입니다. 그분이 남연아 씨와 몇 마디 나누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박시현?’
남연아는 비록 5년 동안 서울에 있지는 않았지만, 박시현의 이름을 들어본 적은 있었다.
박씨 가문은 서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재벌가로서 부동산, 금융, 반도체,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등 여러 개 산업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몹시 겸손했지만, 그들의 산업은 이미 한국의 모든 업종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나와 박시현은 아무런 접점도 없는 사이인데 왜 갑자기 날 찾는 걸까?’
이해가 안 되면 생각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남연아는 스스로 고민거리를 찾는 성격이 아니었다.
“당신네 도련님한테 전해주세요. 난 부검해야 해서 그를 만날 시간이 없다고.”
그녀의 말에 상호는 물론이고 황빈과 강아란마저 멍해졌다.
“뭐라고요? 당신을 요청한 사람은 박시현인데요…”
“대장, 다른 사람이라면 거절해도 괜찮겠지만, 박시현을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어요?”
남연아는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부하들을 보면서 눈썹을 찌푸렸다.
“세 주머니나 되는 시신 조각들은 어떻게 할 거야? 박시현을 만나고 싶더라도 저 시신들을 전부 부검한 다음 만나도록 해!”
아침 햇살 아래서 소녀의 용모는 비록 못생겼으나 매서운 눈매의 그녀는 카리스마가 어마어마했다.
황빈과 강아란은 이번 부검 임무가 중요하기도 하고 급하기도 했던지라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남연아를 따라 해부실로 올라갔다.
단호하게 떠나가는 남연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의 부실한 일 처리를 깨달은 상호는 낙심하여 벤틀리의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박시현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뗐다.
“상호야, 그 여자는?”
“도련님이 남연아 씨한테 할 얘기가 있다고 자리를 좀 옮기자고 했더니 거절하더라고요… 생각도 해보지 않고요…”
상호의 배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목소리가 점점 더 낮아졌다.
‘생각지도 않았다고?’
박진아를 위해 진심을 담아 그녀와 얘기 나누려고 했더니 얼굴조차 못 보게 생겼다.
“거절하는 이유가 뭐래?”
“급하게 부검해야 해서 도련님을 만날 시간이 없대요.”
말을 마친 상호는 조심스레 백미러를 통해 박시현을 훑어보았다.
박시현은 손가락으로 얇은 입술을 만지며 어두운 눈빛으로 강력계 빌딩을 그윽이 바라보았다.
“부검 때문에 날 만나줄 시간이 없다고 하면 부검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자.”
최근 몇 년 박시현은 열심히 일만 하면서 아들딸을 박시우한테 맡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박진봉, 박진아한테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박진아의 실어증을 고칠 기회를 그는 단 한 번도 놓치려고 하지 않았다.
“상호야, 남연아의 정보를 받았어?”
“있기는 한데 가장 기본적인 정보뿐이에요.”
상호는 골치가 아픈 듯 말했다.
“그녀의 직업 때문인지는 몰라도 예전 경력들이 전부 감춰졌어요.”
“우리 사람들은 해킹을 못해?”
“도련님…”
상호는 눈을 감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해킹이 안 돼요. 해킹은커녕 우리 쪽 시스템이 오히려 상대방의 공격을 받아 수천만 개의 코드를 손해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