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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친히 그녀를 마중하다

  • 부검실 녹색 등을 끄고 남연아는 얼굴에 마스크와 보안경을 벗은 후 사무 구역으로 왔다.
  • 자리에 앉아 부검 보고서에 사인하려고 하던 그녀는 테이블 위에 쌓여 있는 정교하게 포장되고 주머니에 고풍스러운 글자체로 ‘운해각’이라고 적힌 밤참들을 발견했다.
  • “황빈아, 이게 뭐야?”
  • 남연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 “대장, 이건 대장 앞으로 배달 온 겁니다.”
  • 황빈은 정교한 밤참 박스에 눈독을 들이면서 말했다.
  • “운해각은 서울에서 제일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인데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고요, 회비만 해도 2억이라고 합니다. 어떤 신분이면 이렇게 늦은 밤 운해각에 배달시킬 수 있을까요?”
  • “내 것이라고?”
  • 남연아는 미간을 더 심하게 찌푸렸다.
  • “누가 보낸 건데?”
  • 황빈은 박스 옆에서 카드 한 장을 찾아내 읽었다.
  • “남연아 씨, 밤을 새워 일하느라 고생했습니다. 박시현 올림.”
  • 카드를 읽고 난 황빈은 깜짝 놀랐다. 강아란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 남연아가 법의 쪽에 조예가 깊다는 건 그들도 믿어 마지 않지만, 박시현이 주근깨투성이에 평범한 외모를 가진 남연아에게 구애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절대로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운해각에서 배달된 음식들을 보면 그들 사이가 보통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황빈은 염치 불고하고 물었다.
  • “대장, 박시현과는… 어떤 사이세요?”
  • “모르는 사람이야.”
  • “대장, 지금 거짓말하시는 거죠?”
  • “믿거나 말거나.”
  • 남연아는 황빈 손에서 카드를 받아서 휴지통에 버린 후 테이블 위에 있는 도시락 박스를 훑어보고는 차갑게 말했다.
  • “황빈, 이 도시락을 오늘 야근한 증거 수집팀 직원들한테도 나눠주고, 남으면 경비원 아저씨한테도 보내.”
  • 말을 마치고 남연아는 가방에서 파일럿 비스킷을 꺼내서 먹기 시작했다.
  • 황빈은 이해할 수 없었다.
  • “대장, 운해각 음식을 제쳐놓고 비스킷을 드신다고요?”
  • 남연아는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 “문제 있어?”
  • 황빈은 허둥지둥 고개를 저었다.
  • “아니요. 저는 얼른 가서 도시락을 나눠줄게요.”
  • 남연아는 그 도시락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비스킷을 씹어 삼켰다.
  • 운해각이 아무리 고급스럽고 비싸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랴?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녀의 몫이 아닌 건 한 푼도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음식에는 죄가 없었다. 맛있는 음식을 자신이 먹지 않으면 다른 사람한테 먹으라고 줄 수는 있었다.
  • 강아란은 운해각의 도시락을 건드리지 않고 남연아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 강아란은 새 상사한테 점점 더 흥취를 느꼈다. 그녀는 전문적 기술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와 박시현과 같은 권력 앞에서 비굴하지 않고 분수에 맞게 처신할 줄 알았다. 눈에 띄는 외모는 아니어도 여유롭고 침착한 그녀한테서 강아란은 눈을 뗄 수 없었다.
  • “대장, 저한테도 비스킷을 좀 주실래요?”
  • 남연아는 그녀와 눈을 마주친 후 미소를 지었다.
  • “박시현이 보내온 음식을 안 먹을 거야?”
  • “저도 박시현을 몰라요. 예전에는 대장과 그의 사이가 궁금해서 그랬고요. 대장이 그와 모르는 사이라고 하는데 저도 당연히 대장과 같은 라인에 서야죠.”
  • 남연아의 능력과 됨됨이를 알게 된 강아란은 마음속으로 기꺼이 남연아를 상사로 모셨다.
  • 강 영감님의 손녀가 꽤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남연아는 비스킷을 쪼개서 그녀한테 주었다.
  • “먹어.”
  • 두 여자애는 아무 맛도 없는 파일럿 비스킷을 씹으면서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 강아란은 갑자기 남연아가 이목구비는 평범해도 두 눈만은 너무나도 예쁘다는 걸 깨달았다. 특히 웃음을 머금었을 때 영특한 그 눈매는 한 번 보고 나면 잊을 수 없었다.
  • 이튿날 아침, 높이 솟은 빌딩 사무실에서 박시현은 유리 외벽을 마주하고 서서 서울 거리에서 끊임없이 오가는 차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검은 셔츠가 그의 넓은 어깨와 좁은 허리를 완벽하게 드러내 주었고 정교한 이목구비는 조각과도 같았다. 그의 몸에서는 윗사람의 기운이 절실히 느껴졌다.
  • “도련님, 제가 보기에 그 여자는 5G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 상호는 얼굴이 흙색이 되어 보고했다.
  • “남연아는 박씨 성이 서울에서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것 같아요. 운해각이 어떤 레벨인지도 모르고요. 어젯밤에 그녀가 부하한테 시켜 운해각의 도시락을 경비원 아저씨한테 주는 걸 제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요!”
  • 박시현이 입을 열었다.
  • “그녀는 박씨 가문이나 운해각을 모르지는 않을 거야.”
  • 상호는 이를 악물더니 자신의 대담한 추측을 말했다.
  • “도련님, 남연아가 모르고 한 게 아니라면 십중팔구는 밀고 당기기 게임을 하는 거라고요. 이건 분명히 도련님한테 미끼를 던져 자신한테 호기심을 가지게 하려는 거예요. 그녀가 이렇게 속이 엉큼하다면 앞으로 진아 아가씨를 이용해…”
  • 박시현은 심오한 눈빛을 띠고 손가락으로 리듬감 있게 사무용 테이블을 두드렸다.
  • “상호야, 너 이제 소설 써도 되겠다.”
  • “도련님…”
  • “우리 쪽 사람들이 그녀의 정보도 캐지 못하는데 넌 아직도 그녀가 일반인일 거라고 생각해?”
  • 고급 의자에 앉은 박시현의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심오했다. 그는 입가에 애매모호한 웃음을 지었다.
  • “법의 고문관? 그건 그 여자의 일각에 불과하지.”
  • 박시현의 말을 듣고서야 상호는 깨달았다.
  • “도련님, 제가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습니다.”
  • “괜찮아.”
  • 박시현은 두 손을 겹쳐 턱을 받쳤다.
  • “저녁 일정을 전부 뒤로 미뤄. 내가 직접 그녀가 퇴근하는 걸 픽업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