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뱃속의 아이가 너의 애야?

• 백주영은 마음속의 당황함을 억누르며 한껏 내리뜬 눈망울은 이슬처럼 반짝이였다.
• “그 여자와 너는 늘 함께 살고 있는데 회사에 들어가서 통역 일까지 하게 된다면 너와 더욱 가까워질 것이고 그렇게 지내면서 둘이 정이 들까 봐 두려웠어.”
• 백주영은 이미 숨길 수 없게 된 이상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여 정민준의 의심을 피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단지 그를 잃게 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 그녀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말을 이어갔다.
• “네가 나를 안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너를 향한 내 맘을 잘 알고 있잖아. 그래서 그녀가 회사에 면접을 보러 온 것을 보고 혹시라도 너를 잃게 될까 봐 제멋대로 행동했어.”
• 정민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 “한 달 뒤 임세연이랑 이혼을 한다고 너한테 분명히 말했잖아.”
• 백주영은 정민준의 말을 알고 있었지만 만약 임세연이 그날 밤에 봤던 여자인 줄 몰랐다면 여러 해 동안 기다렸는데 그깟 한 달쯤은 식은 죽 먹기였겠지만 그녀가 누구인지 안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 그녀는 절대로 임세연을 정민준 가까이에 둘 수가 없었다.
• 절대로!
• “임세연 씨. 2번 테이블로 가져가시면 돼요.”
• 임세연은 호출에 응했고 어젯밤 잠을 제대로 못 잔채로 오늘 출근해서 계속 서 있은 탓인지 아랫배에서 이따금씩 통증이 느껴졌다.
• 임세연은 음식이 놓인 쟁반을 들고 2번 테이블로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였는데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그녀는 백주영을 미리 알아보았다. 그녀의 맞은편에 있는 사람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 그녀의 발걸음은 잠시 멈칫하였지만 이것은 그녀의 일이니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가 없었다.
• 그녀는 입꼬리에 미소를 띠며 그들한테로 걸어갔다.
• “주문하신 메뉴입니다.”
• 임세연은 몸을 숙여 쟁반 안의 음식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 그녀가 그릇을 정민준 앞에 놓을 때 그는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 그녀한테 물어보는 그의 말투는 한껏 차가웠다.
• 시선은 그녀의 몸에서 맴돌았고 흰색 셔츠에 검은색 조끼, 엉덩이만 가릴 수 있는 짧은 스커트에 하얗고 곧게 뻗은 다리가 드러나 있었다.
• 그는 그녀의 두 다리를 한동안 빤히 쳐다보다가 얼굴빛은 더욱 어두워졌다.
• 그녀의 옷 차림은 이게 웬 말인가? 누구한테 보여주기 위함인가? 그녀는 유부녀인데 이런 곳에서 무엇을 하고있던 것인가?
• 임세연은 시종일관 얼굴에 웃음을 유지하며 일하고 있는 중이라고 답하였다.
• 정민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불쾌함을 드러내 보이며 어제부터 번역한 서류를 들고 돈을 달라고 했던 것이랑 지금 이런 일을 하고 있는 임세연의 모습을 보니 임 씨 가문이 진정으로 이 지경까지 몰락되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 “부탁인데 이제 그만 놔줄래요?”
• 임세연은 자신의 손으로 떳떳하게 돈을 버는 일을 하고 있었기에 그의 시선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 백주영은 정민준의 손을 살짝 잡으며 입을 열었다.
• “준아, 여기 보는 눈이 많아서 할 말이 있으면 나가서 얘기하자.”
• 정민준과 임세연이 결혼을 한 사실을 누구도 몰랐는데 백주영은 결코 정민준이 다른 사람들한테 티를 낼 빌미를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 정민준은 임세연을 한참 동안이나 주시를 하다가 화를 가라앉히고 그녀의 손목을 풀어주며 말을 이어갔다.
• “나는 네가 여기서 일하는 것이 싫어.”
• 임세연은 아랫배의 통증이 더욱 거세졌고 이마에 식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설명을 하고 싶었으나 체력이 다소 떨어져 아무 말도 없이 쟁반을 들고 가버렸다.
• 쟁반을 내려놓고 화장실에 들어간 그녀는 몹시 겁이 났고 다행히도 아래에서는 아직 피가 흐르지 않았다.
• 그녀는 화장실에서 나와 세면대에 서서 고개를 숙여 손을 씻기도 하고 아랫배를 만지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아가야. 조금만 참아. 엄마는 할머니랑 너를 위해서라도 돈을 계속 벌어야 해.”
• 백주영은 화장실로 들어오던 중 때마침 그녀가 하고 있던 말을 듣고 자연스럽게 눈빛을 그녀의 배로 이동하고 얼굴빛 또한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 임세연은 창백해진 백주영의 얼굴을 보고 담담하게 말했다.
• “정민준의 아이가 아니야. 그렇게 식겁하지 않아도 돼.”
• 말을 마친 임세연은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지나쳐 화장실을 나왔다.
• “배 속의 아이가 혹시 두 달 정도 되었어?”
• 백주영은 몸을 약간 돌려 그녀한테 물었고 임세연은 발걸음을 멈추면서 머리를 돌려 그녀의 말에 답했다.
• “어떻게 알았어?”
• “너의 배를 보고 알았지.”
• 백주영은 간신히 말을 이었다.
• 저 여자가 정민준의 애를 가졌다고?
• 역시, 그녀를 옆에 가까이 두면 안 돼!
• 이 순간 백주영은 미치도록 그녀를 없애버리고 싶었고 또한 정민준의 삶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 임세연은 화장실을 나서자마자 정민준에게 손목을 잡혀 레스토랑 밖으로 끌려 나오게 되었다.
• 그녀의 몸은 원래부터 불편하였는데 강제로 끌려다니게 되니 고통은 곱절로 심해진 듯 아파왔다.
• “이 손 놔주세요!”
• 그녀는 본디 호통을 치려 했으나 기력이 떨어져 불가능하였다.
• 정민준은 그녀를 길가까지 끌고 와서야 놓아주었고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돈이 필요하면 나하고 말하면 되지. 내 앞에서 감정팔이는 하지 않아도 돼.”
• 그는 임 씨 가문이 이 지경까지 몰락하게 된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임국안은 불과 며칠전까지도 지금의 아내와 딸을 데리고 명품 매장을 들러 고액 소비를 하였기 때문에 지금 이 여자가 레스토랑의 웨이터로 일하는 것이 더더욱 말이 안되었다.
• 임세연은 길 옆의 광고판에 기댄 채 서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몸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공허한 마음을 간신히 달래며 입을 뗐다.
• “저와 당신은 비록 부부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관계는 비즈니스였고 필요한 것만 거래를 하였기에 제가 무엇을 하든지 당신이 이렇게까지 화를 낼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 “네가 내 아내인데 이런 일을 하고 있으면 얼마나 망신이야!”
• 그는 그녀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행동은 항상 뭇사람들의 예상을 빗나갔다.
• 임세연은 입술을 오므리며 간신히 아픔을 참았다.
• 그녀가 거의 버틸 수 없을 지경에 도달했을 때 하주혁이 멀리서 이쪽으로 달려왔다.
• “연아, 너를 찾아다녔는데…. 어디 아파?”
• 정신과 의사인 그는 사람의 몸 상태를 아주 자세하게 관찰하였고 그녀가 죽을힘을 다해 참았지만 그의 날카로운 관찰력을 피하지는 못했다.
• 그날 그녀와 헤어진 후로부터 하주혁은 임세연의 거처를 수소문하여 찾아가 장자영을 만났고 그녀한테서 임세연에 대한 자초지종을 들었으며 그렇게 뱃속에 아이가 생기게 된 사실도 알게 되었다.
• 그는 아무런 말도 못했지만 어쨌든 기분이 좋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녀가 이런 곤란에 부딪쳤는데 왜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단 말인가?
• 그는 그녀를 찾아오고 싶었으나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의 주소를 몰랐기에 그들이 만났던 장소에 와서 우연히 마주치기를 바랐지만 운 좋게도 이렇게 그녀를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임세연은 아무것도 돌볼 겨를이 없었고 아랫배를 잡아끄는 고통에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하주혁의 팔을 붙잡고 간신히 말을 이어갔다.
• “실례지만 혹시 병원에 좀 데려다주실 수 있나요?”
• 하주혁은 임세연의 아랫배를 힐끔 쳐다보고는 몸을 구부려 그녀를 안으려 할 때 갑자기 어깨 위로 떨어진 손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 정민준은 얼굴색이 잿빛으로 변한 채 입을 열었다.
• “내 아내야.”
• 말투가 가볍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았지만 실로 위압감을 조성하였다.
•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의 아내를 다른 사람이 건드리면 안 된다고 경고를 하는 듯하였다.
• 하주혁은 비아냥 거리는 듯한 웃음을 보이며 너희가 어떻게 부부냐고 되물었다.
• 정민준이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 “너희들은 비즈니스 관계일 뿐이야. 네가 뱃속에 아이가 있는 여자와 결혼을 할 리도 없고.”
• 정민준은 실눈을 가늘게 뜨며 하주혁을 위협하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 “뱃속의 아이가 너의 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