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8화 넌 내가 어떻게 대답했으면 좋겠니?

  • 임세연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 “하 선생님.”
  • 임세연은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놀라워했다.
  • “하 선생님이 여기에 어쩐 일로 오셨어요?”
  • 하주혁의 뒤로 한무리의 사람들이 서있는 모습에 임세연은 더욱 의아해했다.
  • 하주혁과 임세연은 동생의 자폐증 치료로 자주 만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졌었다.
  • “하 선생님은 우리 병원에 강의하러 오셨어요.”
  • 하주혁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을 꺼내려는 순간 병원 원장이 입을 열었다.
  • 하주혁은 유명한 심리치료사였고 심리치료 중에서도 특히 자폐증 치료를 잘하기로 유명했다.
  • “너는 무슨 일로 온 거야? 어디 아파?”
  • 하주혁의 질문에 임세연은 엄마의 단호했던 태도가 떠올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 “연아!”
  • 장자영이 반대쪽 복도에 있는 임세연을 발견하고는 그녀를 향해 냅다 뛰었다. 장자영이 검사 결과지를 들고 수술실에 도착했을 때 딸이 도망쳤다는 간호사의 말을 듣고 놀란 마음에 병원 이곳저곳을 찾아다녔었다. 장자영은 반대쪽 복도에서 딸을 발견하고는 감격스러운 마음에 소리친 것이었다.
  • “엄마….”
  • 임세연은 코끝이 시큰거려 입술을 꼭 깨물었다
  • “먼저 들어가 계세요. 저는 볼일이 좀 있어서요.”
  • 하주혁이 자신의 옆에 서있는 원장에게 말했다.
  • “하 선생님이 볼일이 있으시다는데 저희가 방해할 순 없죠. 저는 진심으로 하 선생님이 저희 병원에서 일해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 선생님이 원하는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저에게 말씀하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 만족시켜드리겠습니다.”
  • “고민해 볼게요.”
  • 하주혁이 부드럽게 말했다.
  • 이윽고 하주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어머님, 할 얘기가 있으시면 이곳 말고 밖에 나가서 얘기합시다. 여기는 얘기를 나눌만한 곳이 아니에요.”
  • 병원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 듣는 귀가 많았기 때문이다.
  • 장자영도 하주혁과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아들의 주치의였던 하주혁은 그녀가 돈이 없어 병원비를 내지 못할 때마다 대신 병원비를 내주곤 했다. 그렇기에 장자영은 하주혁을 매우 존경했다.
  • 장자영은 행여나 딸이 도망칠까 봐 그녀의 손목을 힘껏 움켜잡은 채 병원 밖으로 걸어나갔다.
  • 병원 문을 나서자마자 임세연은 장자영의 앞에 꿇어앉아 빌었다.
  • “세형이 하늘나라에 가고 생긴 아이야. 엄마, 나 이 아이까지 잃을 순 없어. 제발 낳을 수 있게 해줘.”
  • 이게 무슨 말이지? 하주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그는 곧바로 눈치를 채고는 임세연의 배를 바라보았다. 하주혁은 장자영의 손에 들린 검사 결과지를 확인하고는 임세연의 임신 사실을 더욱더 확신했다. 너무나도 놀랍고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 하주혁은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물어볼 때가 아닌 것 같아 물어보지 않았다.
  • 임세연은 장자영앞에서 우는 일이 드물었다. 동생의 죽음 앞에서도 임세연은 장자영을 피해 몰래 눈물을 훔쳤었다.
  • 장자영 또한 낙태를 강요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이를 낳고 난 뒤 딸이 당할 수모가 걱정되어 어쩔 수 없이 한 행동이었다.
  • 여자는 약해도 엄마는 강하다고 딸의 행동을 보아하니 아이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 “네 맘대로 해.”
  • 장자영이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바로 자리를 피했다. 그녀는 너무나도 속상한 나머지 딸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 장자영이 떠나자 임세연이 천천히 무릎을 세워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그녀는 이 힘든 상황을 지금까지 홀로 버티려고 했었다. 홀로 버텨내느라 쌓였던 아픔과 서러움이 그녀를 집어삼키는듯했다. 그래도 눈물만은 참으려 했으나 눈물마저 그녀의 마음을 몰라주었다.
  • 귀국하기 전에 하주혁은 그녀를 찾아간 적이 있었기에 동생의 사망 소식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귀국하고 발생한 일들은 알지 못했다.
  • 하주혁 또한 쭈구리고 앉아 그녀의 등을 쓸어주며 그녀를 위로했다. 그가 그녀를 처음 봤을 때 그녀는 열몇 살의 어린아이였다. 일찍 철이 들어버린 그녀는 동생과 엄마를 돌봤었다.
  • 하주혁은 옛날에 임세연이 가진 돈으로 엄마와 동생의 밥을 샀던 일이 떠올랐다. 이 일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임세연이 가진 돈으로는 2인분의 도시락을 살 수밖에 없었고 동생과 엄마를 배불리기 위해 자기는 굶었지만 이미 먹었다고 말하는 것을 그가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일찍 철이 들어 버린 임세연은 하주혁의 마음을 아프게 했었다.
  • 하주혁이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순간 임세연이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 “항상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나중에 제가 돈을 많이 벌게 된다면 꼭 갚을게요.”
  • 하주혁은 허공 위에 뻘쭘하게 놓인 손을 내려놓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 “바보야, 내가 도와주고 싶어서 도와준 거니까 갚지 않아도 돼.”
  • 임세연이 고개를 저었다.
  • “은혜 꼭 갚을게요.”
  • 말을 하는 임세연의 눈빛이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 “어디 살아? 데려다줄게.”
  • 하주혁이 임세연을 일으켰다.
  • 혼자 자리를 떠난 엄마가 걱정된 임세연은 엄마의 거처를 알려주었다.
  • 차가 집 앞에 도착하자 임세연이 차에서 내렸다.
  • “살던 데로 다시 돌아갈 거야?”
  • 하주혁이 물었다.
  • “아니요.”
  • 임세연이 고개를 돌려 하주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토록 바라던 귀국이었기에 임세연은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 임세연이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녀는 의자에 앉아 눈물을 훔치고 있는 장자영을 발견했다. 엄마의 눈물에 그녀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 장자영은 눈물을 닦아내고는 딸의 시선을 피했다.
  • “난 괜찮으니까 그만 돌아가.”
  • “엄마….”
  • “다 널 제대로 돌보지 못한 엄마 잘못이야.”
  • 장자영은 고장 나버린 수도꼭지처럼 울어도 울어도 그치지 못했다.
  • 임세연이 다가와 그녀를 힘껏 껴안았다. 두 모녀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로 울며 불며 서로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 한참이 지나서야 그들은 마음을 추슬렀다. 임세연은 장자영에게 자신과 정민준의 계약 내용을 알려주며 장자영을 안심시키려 했다.
  • 어떻게 결혼으로 장난을 칠 수가 있지? 장자영은 임세연의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 딸은 이미 임신을 했고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계약 결혼이 달갑지는 않았지만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정민준이 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뻔해 나쁜 상황 같지는 않았다.
  • 장자영은 앞으로 자신이 직접 딸을 돌볼 것을 다짐했다.
  • 날이 어두워져서야 임세연은 별장에 돌아갔다. 정민준은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은듯 했다. 임세연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소화시킬 겸 별장 마당을 한 바퀴 돌며 별장 주변을 둘러보았다.
  • 늦은 저녁이 돼서야 그녀는 방으로 돌아갔지만 갈증을 느낀 그녀는 주방으로 가서 물을 한 컵 따랐다.
  • 반쯤 마시고 임세연이 방으로 돌아갈 차비를 하는 순간 현관 손잡이가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 이윽고 건장한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들어왔고 그 뒤로 여리여리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 임세연은 순간 멍해졌다.
  • 비록 두 사람 사이는 계약 결혼 관계였지만 임세연은 그가 이 늦은 시간에 좋아하는 여자를 집으로 데려올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병원에서 본 여자가 여기에 웬일로? 백주영 또한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 백주영은 고개를 들어 정민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모습은 차갑고 딱딱한 선으로 이루어진 조각상 같았다.
  • 병원에서 왜 화를 낸 거지? 이 여자 때문인가?
  • 여자의 촉은 항상 예리했고 평소와 달랐던 정민준의 반응이 백주영으로 하여금 임세연을 경계하게끔 만들었다.
  • “그럼 저는 먼저 방에 들어갈게요.”
  • 임세연은 커플 사이에 낄 생각이 없었고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 “잠깐.”
  • 정민준의 짙은 눈동자가 임세연을 응시했다. 임세연은 단정한 잠옷 치마를 입고 있었다. 잠옷 팔소매 아래로 희고 가느다란 두 팔이 드러났고 흰색 치맛자락이 그녀의 발목에서 살랑거리는 것이 청순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 다만 앞뒤가 다른 그녀의 행동이 떠오를 때마다 정민준은 역겨운 감정이 들었다.
  • “주영이 이곳의 안주인인 걸 명심해. 내말 무슨 말인지 알지?”
  • 임세연은 한 번도 자신을 이곳의 안주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 강조하지 않아도 임세연은 자신의 분수를 잘 알고 있었다.
  • “알아들었으니까 나 이만 들어가 잘래.”
  • 임세연이 몸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
  • “임세연 씨, 미안해요.”
  • 백주영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 갑작스러운 사과에 임세연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임세연은 눈이 왕방울 만해진 채로 그녀를 응시했다.
  • “준이와 임세연 씨가 부부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와 준이가 알고 지낸 시간이 더 길고 임세연 씨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제가 준이의 아내가 됐겠죠. 저희는 서로를 사랑해요. 그러니까….”
  • 백주영의 얼굴에는 미안한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 “그러니까 뭐요?”
  • 임세연은 눈앞의 여자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백주영은 그녀의 신분을 잘 알고 있고 그녀 또한 그들 사이에 끼어든 적도 없었다. 임세연은 이러한 말을 꺼내는 백주영의 의도가 궁금했다.
  • “임세연 씨가 준이에게 시집갔는데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건 다 준이와 저의 관계 때문인 것 같아 미안해져서요.”
  •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러한 불편한 관계 속에서 서로 모르는척하는 것이 맞지 않나? 이런 쇼를 벌인다는 건 정민준 앞에서 착한 이미지를 쌓기 위해서 인가?
  • 임세연은 왠지 모르게 백주영에게 호감이 가지 않았다.
  • “너 이게 무슨 태도야?”
  • 정민준이 실눈을 뜬 채로 임세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 임세연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 여자가 뜬금없는 얘기를 꺼냈을 뿐 그녀의 대처에는 아무런 악의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무탈하게 지내다가 돈만 챙기고 떠날 생각이었다.
  • “그럼 당신은 제가 어떻게 대답하길 바라는데요?”
  • 임세연은 백주영의 말에 어떻게 말을 이어야 될지 몰라 그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