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영이 반대쪽 복도에 있는 임세연을 발견하고는 그녀를 향해 냅다 뛰었다. 장자영이 검사 결과지를 들고 수술실에 도착했을 때 딸이 도망쳤다는 간호사의 말을 듣고 놀란 마음에 병원 이곳저곳을 찾아다녔었다. 장자영은 반대쪽 복도에서 딸을 발견하고는 감격스러운 마음에 소리친 것이었다.
“엄마….”
임세연은 코끝이 시큰거려 입술을 꼭 깨물었다
“먼저 들어가 계세요. 저는 볼일이 좀 있어서요.”
하주혁이 자신의 옆에 서있는 원장에게 말했다.
“하 선생님이 볼일이 있으시다는데 저희가 방해할 순 없죠. 저는 진심으로 하 선생님이 저희 병원에서 일해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 선생님이 원하는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저에게 말씀하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 만족시켜드리겠습니다.”
“고민해 볼게요.”
하주혁이 부드럽게 말했다.
이윽고 하주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어머님, 할 얘기가 있으시면 이곳 말고 밖에 나가서 얘기합시다. 여기는 얘기를 나눌만한 곳이 아니에요.”
병원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 듣는 귀가 많았기 때문이다.
장자영도 하주혁과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아들의 주치의였던 하주혁은 그녀가 돈이 없어 병원비를 내지 못할 때마다 대신 병원비를 내주곤 했다. 그렇기에 장자영은 하주혁을 매우 존경했다.
장자영은 행여나 딸이 도망칠까 봐 그녀의 손목을 힘껏 움켜잡은 채 병원 밖으로 걸어나갔다.
병원 문을 나서자마자 임세연은 장자영의 앞에 꿇어앉아 빌었다.
“세형이 하늘나라에 가고 생긴 아이야. 엄마, 나 이 아이까지 잃을 순 없어. 제발 낳을 수 있게 해줘.”
이게 무슨 말이지? 하주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그는 곧바로 눈치를 채고는 임세연의 배를 바라보았다. 하주혁은 장자영의 손에 들린 검사 결과지를 확인하고는 임세연의 임신 사실을 더욱더 확신했다. 너무나도 놀랍고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하주혁은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물어볼 때가 아닌 것 같아 물어보지 않았다.
임세연은 장자영앞에서 우는 일이 드물었다. 동생의 죽음 앞에서도 임세연은 장자영을 피해 몰래 눈물을 훔쳤었다.
장자영 또한 낙태를 강요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이를 낳고 난 뒤 딸이 당할 수모가 걱정되어 어쩔 수 없이 한 행동이었다.
여자는 약해도 엄마는 강하다고 딸의 행동을 보아하니 아이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네 맘대로 해.”
장자영이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바로 자리를 피했다. 그녀는 너무나도 속상한 나머지 딸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장자영이 떠나자 임세연이 천천히 무릎을 세워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그녀는 이 힘든 상황을 지금까지 홀로 버티려고 했었다. 홀로 버텨내느라 쌓였던 아픔과 서러움이 그녀를 집어삼키는듯했다. 그래도 눈물만은 참으려 했으나 눈물마저 그녀의 마음을 몰라주었다.
귀국하기 전에 하주혁은 그녀를 찾아간 적이 있었기에 동생의 사망 소식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귀국하고 발생한 일들은 알지 못했다.
하주혁 또한 쭈구리고 앉아 그녀의 등을 쓸어주며 그녀를 위로했다. 그가 그녀를 처음 봤을 때 그녀는 열몇 살의 어린아이였다. 일찍 철이 들어버린 그녀는 동생과 엄마를 돌봤었다.
하주혁은 옛날에 임세연이 가진 돈으로 엄마와 동생의 밥을 샀던 일이 떠올랐다. 이 일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임세연이 가진 돈으로는 2인분의 도시락을 살 수밖에 없었고 동생과 엄마를 배불리기 위해 자기는 굶었지만 이미 먹었다고 말하는 것을 그가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일찍 철이 들어 버린 임세연은 하주혁의 마음을 아프게 했었다.
하주혁이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순간 임세연이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항상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나중에 제가 돈을 많이 벌게 된다면 꼭 갚을게요.”
하주혁은 허공 위에 뻘쭘하게 놓인 손을 내려놓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바보야, 내가 도와주고 싶어서 도와준 거니까 갚지 않아도 돼.”
임세연이 고개를 저었다.
“은혜 꼭 갚을게요.”
말을 하는 임세연의 눈빛이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디 살아? 데려다줄게.”
하주혁이 임세연을 일으켰다.
혼자 자리를 떠난 엄마가 걱정된 임세연은 엄마의 거처를 알려주었다.
차가 집 앞에 도착하자 임세연이 차에서 내렸다.
“살던 데로 다시 돌아갈 거야?”
하주혁이 물었다.
“아니요.”
임세연이 고개를 돌려 하주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토록 바라던 귀국이었기에 임세연은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임세연이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녀는 의자에 앉아 눈물을 훔치고 있는 장자영을 발견했다. 엄마의 눈물에 그녀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장자영은 눈물을 닦아내고는 딸의 시선을 피했다.
“난 괜찮으니까 그만 돌아가.”
“엄마….”
“다 널 제대로 돌보지 못한 엄마 잘못이야.”
장자영은 고장 나버린 수도꼭지처럼 울어도 울어도 그치지 못했다.
임세연이 다가와 그녀를 힘껏 껴안았다. 두 모녀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로 울며 불며 서로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들은 마음을 추슬렀다. 임세연은 장자영에게 자신과 정민준의 계약 내용을 알려주며 장자영을 안심시키려 했다.
어떻게 결혼으로 장난을 칠 수가 있지? 장자영은 임세연의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딸은 이미 임신을 했고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계약 결혼이 달갑지는 않았지만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정민준이 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뻔해 나쁜 상황 같지는 않았다.
장자영은 앞으로 자신이 직접 딸을 돌볼 것을 다짐했다.
날이 어두워져서야 임세연은 별장에 돌아갔다. 정민준은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은듯 했다. 임세연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소화시킬 겸 별장 마당을 한 바퀴 돌며 별장 주변을 둘러보았다.
늦은 저녁이 돼서야 그녀는 방으로 돌아갔지만 갈증을 느낀 그녀는 주방으로 가서 물을 한 컵 따랐다.
반쯤 마시고 임세연이 방으로 돌아갈 차비를 하는 순간 현관 손잡이가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이윽고 건장한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들어왔고 그 뒤로 여리여리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임세연은 순간 멍해졌다.
비록 두 사람 사이는 계약 결혼 관계였지만 임세연은 그가 이 늦은 시간에 좋아하는 여자를 집으로 데려올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병원에서 본 여자가 여기에 웬일로? 백주영 또한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백주영은 고개를 들어 정민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모습은 차갑고 딱딱한 선으로 이루어진 조각상 같았다.
병원에서 왜 화를 낸 거지? 이 여자 때문인가?
여자의 촉은 항상 예리했고 평소와 달랐던 정민준의 반응이 백주영으로 하여금 임세연을 경계하게끔 만들었다.
“그럼 저는 먼저 방에 들어갈게요.”
임세연은 커플 사이에 낄 생각이 없었고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잠깐.”
정민준의 짙은 눈동자가 임세연을 응시했다. 임세연은 단정한 잠옷 치마를 입고 있었다. 잠옷 팔소매 아래로 희고 가느다란 두 팔이 드러났고 흰색 치맛자락이 그녀의 발목에서 살랑거리는 것이 청순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다만 앞뒤가 다른 그녀의 행동이 떠오를 때마다 정민준은 역겨운 감정이 들었다.
“주영이 이곳의 안주인인 걸 명심해. 내말 무슨 말인지 알지?”
임세연은 한 번도 자신을 이곳의 안주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 강조하지 않아도 임세연은 자신의 분수를 잘 알고 있었다.
“알아들었으니까 나 이만 들어가 잘래.”
임세연이 몸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
“임세연 씨, 미안해요.”
백주영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갑작스러운 사과에 임세연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임세연은 눈이 왕방울 만해진 채로 그녀를 응시했다.
“준이와 임세연 씨가 부부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와 준이가 알고 지낸 시간이 더 길고 임세연 씨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제가 준이의 아내가 됐겠죠. 저희는 서로를 사랑해요. 그러니까….”
백주영의 얼굴에는 미안한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러니까 뭐요?”
임세연은 눈앞의 여자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백주영은 그녀의 신분을 잘 알고 있고 그녀 또한 그들 사이에 끼어든 적도 없었다. 임세연은 이러한 말을 꺼내는 백주영의 의도가 궁금했다.
“임세연 씨가 준이에게 시집갔는데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건 다 준이와 저의 관계 때문인 것 같아 미안해져서요.”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러한 불편한 관계 속에서 서로 모르는척하는 것이 맞지 않나? 이런 쇼를 벌인다는 건 정민준 앞에서 착한 이미지를 쌓기 위해서 인가?
임세연은 왠지 모르게 백주영에게 호감이 가지 않았다.
“너 이게 무슨 태도야?”
정민준이 실눈을 뜬 채로 임세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임세연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 여자가 뜬금없는 얘기를 꺼냈을 뿐 그녀의 대처에는 아무런 악의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무탈하게 지내다가 돈만 챙기고 떠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