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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결혼 아닌 결혼

  • 언뜻 듣기엔 그녀의 동의를 구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말속엔 거절할 수 없는 어떠한 힘이 내재되어 있었다.
  • 임세연은 그가 하려는 말이 있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 마침 그녀도 그와 얘기를 나누고 싶던 참이었다.
  • 임국안은 경고하듯 임세연에게 눈짓을 했다.
  • “눈치있게 행동해.”
  • 정민준의 차가운 태도를 보아 아마 임세연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으니, 혹여 결혼이 성사 되기도 전에 괜한 미움이라도 살까 염려되었다. 어찌 되었건 정 씨 가문과 이어진다는 것은, 사업 쪽으로도 임 씨 가문에겐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임세연으로 인해 혼사를 망치는 꼴을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임세연은 짐짓 못 본 척 하며 강진의 뒤를 따라 밖으로 향했다.
  • 그녀는 일찌감치 임국안의 속셈을 눈치채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가 자신이 정 씨 집안에 시집을 간 후 본인을 도와줄 거라 자신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 단지 그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 하지만 그는 자신을 딸로 여겼던 적이 있었던가, 자신이 이 지옥 같은 8년을 어떻게 견뎌왔는지 그는 알려나 싶은 그녀였다.
  • 임세연은 이렇듯 딴 생각에 잠겨 걷다가 단단한 무언가에 머리를 쿵 박고 멈춰 섰다.
  •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조각 같은 그의 얼굴이 바로 눈 앞에서 자신을 내려 보고 있었다.
  • 역…역시!
  • 그의 다리는 멀쩡했다. 그녀의 짐작이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 그의 눈빛에 임세연은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걸 느꼈지만, 짐짓 침착함을 유지하며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 “일부러 장애가 있는 척 했던 거죠?”
  • 정민준의 눈매가 가늘어지더니 이내 속내를 꿰뚫어 보듯 살짝 웃으며 낮지만 상대의 기를 압도하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 “장애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나랑 결혼 한다고 했지? 돈 때문인가, 아님 재벌가 사모님 자리를 원하는 건가? ”
  • 임세연은 그의 눈빛에 온 몸이 얼어붙을 듯한 한기를 느낄 뿐이었다. 누군가 심장을 콱 움켜쥐고 있는 듯 숨쉬는 것조차 버거워졌다. 그럼에도 애써 담담한척 말을 내뱉었다,
  • “제가 두 살 때 그쪽이랑 결혼하기로 정해진 걸로 아는데요, 두 살 된 아기가 돈 밝히고 재벌가 사모님 되고 싶어서, 양가 어머님 두 분께 이렇게 결정하시라고 억지라도 부렸겠어요?”
  • 그녀는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르고, 다시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 “제가 두 살이면 그 쪽은 열 살이었는데, 나보다 8살이나 많아도 제가 그쪽 나이 많다고 싫다 하진 않았잖아요?”
  • 정민준은 허 하고 실소했다.
  • 이 여자, 말을 그냥 잘 하는게 아니라, 조목조목 아주 날카롭게 하네!
  • 내가 늙었다고?
  • 둘을 감싸고 있던 공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 둘은 서로의 두 눈을 마주보며 신경전을 벌였고, 누구도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 임세연은 두 주먹을 꽉 쥐며 정 씨 집안으로 시집가는 목적이 엄마의 예물을 돌려받기 위해서임을 다시한번 되새겼다.
  • 그러기 위해선 이 남자를 적으로 둬선 안 된다는 걸 인식한 그녀는 한층 누그러진 기세로 전보다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얘기했다.
  • “정민준 씨, 그 쪽이 저와 결혼하는 걸 원치 않는다는 거 저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안될 것도 없는게….”
  • 그녀는 일부러 말을 멈추고 정민준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그의 미묘한 표정의 변화를 그녀는 캐치해냈다.
  • “정민준 씨, 우리 거래 좀 해요.”
  • 임세연은 입을 열었고 그녀도 정 씨 가문으로 시집갈 생각이 없기에 승낙을 할 것이다, 다만 외국에서 돌아와 어머니와 그녀의 것을 되찾고 싶을 뿐이다.
  • “허.”
  • 정민준은 황당한 듯 가볍게 웃었다. 그와 거래를 한다고?
  • 임세연은 침을 꿀꺽 삼켰고 긴장한 탓인지 등에서 식은 땀이 흘렀다. 키가 큰 정민준을 보기 위해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 “당신이 일부러 걷지 못하는 척 연기한 건 임 씨 가문에서 혼사를 번복하도록 바랐기 때문이란 걸 알고 있어요. 전 승낙할 거예요, 저도 제 고충이 있으니깐요.”
  • 이 말에 정민준은 오히려 흥미가 생겼다.
  • “네가 원하는 게 뭐지?”
  • 이왕 거래한 이상 조건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 “한 달, 결혼은 한 달만 하고 전 당신과 이혼할 거예요.”
  • 한 달이라는 시간이면 충분하다, 엄마의 혼수를 받으면 그녀는 그와 이혼할 것이다.
  • 정민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 “이게 네가 나한테 요구한 거래야?”
  • “네, 이 결혼은 무조건 해야 해요, 두 어머니의 약속이기에 우린 그 약속을 깨서는 안돼요. 그분들에 대한 존중이니깐요. 하지만 결혼 후, 우리가 성격이 맞지 않다는 이유로 이혼을 하면 약속을 깬 건 아니잖아요. 당신도 평생 원치 않는 사람과 살지 않아도 되고 당신한테는 나쁜 것 없이 이익뿐인데….”
  • 여기까지 말하고 임세연의 말투는 좀 느려졌다.
  • “제 생각에는 정민준 씨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백방으로 약속을 깨려 하는 거 아닌가요?”
  • 정민준의 얼굴빛이 갑자기 어두워졌고 조금 화나 있었다.
  • “보기와 다르게 똑똑하네.”
  • 그래, 그도 백주영에게 명분을 주고 싶었다. 그 날, 그녀의 풋풋함과 인내심이 그를 자극했다.
  • 정민준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짓는 그녀한테 시선을 고정시켰다.
  • “그럼 넌? 결혼이 너한테는 무슨 이익이 있지?”
  • 정민준은 그녀가 단지 자신을 위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 임세연은 마음이 뜨끔했지만 엄마의 혼수를 위함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 하지만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그는 믿지 않을 것 같았다.
  • “엄마가 이번 결혼을 중시해요, 건강도 좋지 않으신데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요.”
  • 그녀는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말할 때 시선을 살짝 피했다, 엄마는 그녀가 정 씨 가문에 시집가는 걸 전혀 바라지 않았다.
  • 정민준의 말투는 어딘지 모르게 음산하고 기괴한 위압감을 주었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간파라도 한듯.
  • “그래?”
  • 임세연은 등 뒤를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그의 눈빛이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것 같아 어쩔 줄 모르던 참에 그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 정민준은 그녀를 흘겨보고 휴대전화를 꺼내 위에 뜨는 이름을 보더니 다소 누그러진 표정으로 몸을 돌려 전화를 받다가 무슨 생각이라도 떠오른 건지 고개를 돌렸다.
  • “어차피 한 달인데 결혼식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 임세연은 선택할 여지가 없었고 승낙만 했다.
  • “네.”
  • 8월 12일, 강진은 임세연을 데리러 왔다.
  • 예식도 없고 결혼식도 없고, 혼인 신고서 한 장만 있다.
  • 임세연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각자 원하는 거래를 했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만약 어릴 때 부모님들끼리 정한 혼사만 아니었으면 아마 그들은 아무런 접점이 없었을 것이다.
  • 차는 빠르게 한 별장 앞에 멈추었다.
  • 햇빛 아래, 매우 넓은 석조 건축물은 기세가 등등하다.
  • “들어가시죠.”
  • 강진은 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 그녀에게 불친절하고 비위를 맞추지 않는 태도를 보면 그는 그녀와 정민준의 결혼이 그냥 약속을 지키기 위함인 걸 아는 것 같았다.
  • 진정한 정 씨 가문의 사모님이 아니다.
  • 저택은 크지만 사람은 많지 않고 하인 한 명뿐인데 강진은 소개도 없이 그녀를 집안으로 데려다주고는 떠나갔다.
  • 임세연은 조금 적응이 안 되었다.
  • “이쪽은 도련님 방이에요. 저는 도련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유 씨 아주머니라고 부르시면 돼요.”
  • 유 씨 아주머니는 그녀를 데리고 방으로 향했다.
  •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저한테 말씀해주시면 돼요.”
  • 한 달은 긴 시간이 아니기에 임세연은 자신의 생활용품을 가져왔고 비록 그녀에게 부탁을 하진 않겠지만 일단 답했다.
  • “네.”
  • 유 씨 아주머니는 방문을 열고 돌아서서 그녀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한숨만 내쉬었다.
  • “오늘 밤 도련님은 아마 들어오시지 않을 거예요, 오늘은 백주영 씨 생일이거든요.”
  • 비록 결혼식을 치르지 않았지만 어쨌든 명의상에서는 그의 아내이고 오늘은 아무래도 그들의 결혼 첫날인데 그는 밖에서 다른 여자와 함께 있으니 유 씨 아주머니는 임세연을 가련하다고 느꼈다. 이제 막 들어왔는데 정민준한테 이런 푸대접을 받았으니 앞으로 더 비참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