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듣기엔 그녀의 동의를 구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말속엔 거절할 수 없는 어떠한 힘이 내재되어 있었다.
임세연은 그가 하려는 말이 있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그녀도 그와 얘기를 나누고 싶던 참이었다.
임국안은 경고하듯 임세연에게 눈짓을 했다.
“눈치있게 행동해.”
정민준의 차가운 태도를 보아 아마 임세연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으니, 혹여 결혼이 성사 되기도 전에 괜한 미움이라도 살까 염려되었다. 어찌 되었건 정 씨 가문과 이어진다는 것은, 사업 쪽으로도 임 씨 가문에겐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임세연으로 인해 혼사를 망치는 꼴을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임세연은 짐짓 못 본 척 하며 강진의 뒤를 따라 밖으로 향했다.
그녀는 일찌감치 임국안의 속셈을 눈치채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가 자신이 정 씨 집안에 시집을 간 후 본인을 도와줄 거라 자신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단지 그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하지만 그는 자신을 딸로 여겼던 적이 있었던가, 자신이 이 지옥 같은 8년을 어떻게 견뎌왔는지 그는 알려나 싶은 그녀였다.
임세연은 이렇듯 딴 생각에 잠겨 걷다가 단단한 무언가에 머리를 쿵 박고 멈춰 섰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조각 같은 그의 얼굴이 바로 눈 앞에서 자신을 내려 보고 있었다.
역…역시!
그의 다리는 멀쩡했다. 그녀의 짐작이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그의 눈빛에 임세연은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걸 느꼈지만, 짐짓 침착함을 유지하며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일부러 장애가 있는 척 했던 거죠?”
정민준의 눈매가 가늘어지더니 이내 속내를 꿰뚫어 보듯 살짝 웃으며 낮지만 상대의 기를 압도하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장애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나랑 결혼 한다고 했지? 돈 때문인가, 아님 재벌가 사모님 자리를 원하는 건가? ”
임세연은 그의 눈빛에 온 몸이 얼어붙을 듯한 한기를 느낄 뿐이었다. 누군가 심장을 콱 움켜쥐고 있는 듯 숨쉬는 것조차 버거워졌다. 그럼에도 애써 담담한척 말을 내뱉었다,
“제가 두 살 때 그쪽이랑 결혼하기로 정해진 걸로 아는데요, 두 살 된 아기가 돈 밝히고 재벌가 사모님 되고 싶어서, 양가 어머님 두 분께 이렇게 결정하시라고 억지라도 부렸겠어요?”
그녀는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르고, 다시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제가 두 살이면 그 쪽은 열 살이었는데, 나보다 8살이나 많아도 제가 그쪽 나이 많다고 싫다 하진 않았잖아요?”
정민준은 허 하고 실소했다.
이 여자, 말을 그냥 잘 하는게 아니라, 조목조목 아주 날카롭게 하네!
내가 늙었다고?
둘을 감싸고 있던 공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둘은 서로의 두 눈을 마주보며 신경전을 벌였고, 누구도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임세연은 두 주먹을 꽉 쥐며 정 씨 집안으로 시집가는 목적이 엄마의 예물을 돌려받기 위해서임을 다시한번 되새겼다.
그러기 위해선 이 남자를 적으로 둬선 안 된다는 걸 인식한 그녀는 한층 누그러진 기세로 전보다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얘기했다.
“정민준 씨, 그 쪽이 저와 결혼하는 걸 원치 않는다는 거 저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안될 것도 없는게….”
그녀는 일부러 말을 멈추고 정민준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그의 미묘한 표정의 변화를 그녀는 캐치해냈다.
“정민준 씨, 우리 거래 좀 해요.”
임세연은 입을 열었고 그녀도 정 씨 가문으로 시집갈 생각이 없기에 승낙을 할 것이다, 다만 외국에서 돌아와 어머니와 그녀의 것을 되찾고 싶을 뿐이다.
“허.”
정민준은 황당한 듯 가볍게 웃었다. 그와 거래를 한다고?
임세연은 침을 꿀꺽 삼켰고 긴장한 탓인지 등에서 식은 땀이 흘렀다. 키가 큰 정민준을 보기 위해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당신이 일부러 걷지 못하는 척 연기한 건 임 씨 가문에서 혼사를 번복하도록 바랐기 때문이란 걸 알고 있어요. 전 승낙할 거예요, 저도 제 고충이 있으니깐요.”
이 말에 정민준은 오히려 흥미가 생겼다.
“네가 원하는 게 뭐지?”
이왕 거래한 이상 조건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한 달, 결혼은 한 달만 하고 전 당신과 이혼할 거예요.”
한 달이라는 시간이면 충분하다, 엄마의 혼수를 받으면 그녀는 그와 이혼할 것이다.
정민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네가 나한테 요구한 거래야?”
“네, 이 결혼은 무조건 해야 해요, 두 어머니의 약속이기에 우린 그 약속을 깨서는 안돼요. 그분들에 대한 존중이니깐요. 하지만 결혼 후, 우리가 성격이 맞지 않다는 이유로 이혼을 하면 약속을 깬 건 아니잖아요. 당신도 평생 원치 않는 사람과 살지 않아도 되고 당신한테는 나쁜 것 없이 이익뿐인데….”
여기까지 말하고 임세연의 말투는 좀 느려졌다.
“제 생각에는 정민준 씨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백방으로 약속을 깨려 하는 거 아닌가요?”
정민준의 얼굴빛이 갑자기 어두워졌고 조금 화나 있었다.
“보기와 다르게 똑똑하네.”
그래, 그도 백주영에게 명분을 주고 싶었다. 그 날, 그녀의 풋풋함과 인내심이 그를 자극했다.
정민준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짓는 그녀한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럼 넌? 결혼이 너한테는 무슨 이익이 있지?”
정민준은 그녀가 단지 자신을 위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임세연은 마음이 뜨끔했지만 엄마의 혼수를 위함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그는 믿지 않을 것 같았다.
“엄마가 이번 결혼을 중시해요, 건강도 좋지 않으신데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말할 때 시선을 살짝 피했다, 엄마는 그녀가 정 씨 가문에 시집가는 걸 전혀 바라지 않았다.
정민준의 말투는 어딘지 모르게 음산하고 기괴한 위압감을 주었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간파라도 한듯.
“그래?”
임세연은 등 뒤를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그의 눈빛이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것 같아 어쩔 줄 모르던 참에 그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정민준은 그녀를 흘겨보고 휴대전화를 꺼내 위에 뜨는 이름을 보더니 다소 누그러진 표정으로 몸을 돌려 전화를 받다가 무슨 생각이라도 떠오른 건지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한 달인데 결혼식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임세연은 선택할 여지가 없었고 승낙만 했다.
“네.”
8월 12일, 강진은 임세연을 데리러 왔다.
예식도 없고 결혼식도 없고, 혼인 신고서 한 장만 있다.
임세연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각자 원하는 거래를 했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어릴 때 부모님들끼리 정한 혼사만 아니었으면 아마 그들은 아무런 접점이 없었을 것이다.
차는 빠르게 한 별장 앞에 멈추었다.
햇빛 아래, 매우 넓은 석조 건축물은 기세가 등등하다.
“들어가시죠.”
강진은 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녀에게 불친절하고 비위를 맞추지 않는 태도를 보면 그는 그녀와 정민준의 결혼이 그냥 약속을 지키기 위함인 걸 아는 것 같았다.
진정한 정 씨 가문의 사모님이 아니다.
저택은 크지만 사람은 많지 않고 하인 한 명뿐인데 강진은 소개도 없이 그녀를 집안으로 데려다주고는 떠나갔다.
임세연은 조금 적응이 안 되었다.
“이쪽은 도련님 방이에요. 저는 도련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유 씨 아주머니라고 부르시면 돼요.”
유 씨 아주머니는 그녀를 데리고 방으로 향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저한테 말씀해주시면 돼요.”
한 달은 긴 시간이 아니기에 임세연은 자신의 생활용품을 가져왔고 비록 그녀에게 부탁을 하진 않겠지만 일단 답했다.
“네.”
유 씨 아주머니는 방문을 열고 돌아서서 그녀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한숨만 내쉬었다.
“오늘 밤 도련님은 아마 들어오시지 않을 거예요, 오늘은 백주영 씨 생일이거든요.”
비록 결혼식을 치르지 않았지만 어쨌든 명의상에서는 그의 아내이고 오늘은 아무래도 그들의 결혼 첫날인데 그는 밖에서 다른 여자와 함께 있으니 유 씨 아주머니는 임세연을 가련하다고 느꼈다. 이제 막 들어왔는데 정민준한테 이런 푸대접을 받았으니 앞으로 더 비참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