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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그녀를 모르겠다

  • “뭔데요?”
  • 임세연은 혼란스러워하였다.
  • 밝은 불빛을 등지고 정민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임세연한테 다가갔다. 그의 발걸음은 한결같고 느렸으며 그는 임세연의 앞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며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
  • “나하고 부부 사이인데 함부로 다른 남자와 애정행각을 하지 마.”
  • 결혼을 한 이유가 무엇이든지 그 기간 동안에는 결코 그를 두고 양다리를 걸치면 안 되었다. 이것은 그의 마지노선이자 또한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될 남자의 존엄이었다.
  • 그녀는 상황 판단이 미처 되지 못한 채 가만히 서있었다. 그의 말은 도대체 임세연이 누구와 키스를 하였단 말인가?
  • 그녀는 본능적 정민준의 말에 반박을 하면서 말했다.
  • “저도 그럼 당신이 이곳에서 다른 여자와 밤을 보낸 것을 아내로서 캐물어봐도 괜찮을까요?”
  • “이곳에서 다른 여자와 같이 잔 적 없어.”
  • 정민준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그녀의 말을 부정하였다.
  • 임세연은 지난 밤 백주영이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은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 잠을 안 잤다고 누가 믿지?
  • 그녀랑 잠을 잤든 자지 않았든 무슨 상관이 있을까?
  • 정민준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고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 임세연은 그와 모순을 만들어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에 말투를 최대한 온화하게 고치고 말했다.
  • “최대한 당신의 요구대로 할게요. 그럼 저는….”
  •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흔들며 말했고 정민준은 그녀의 뜻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 그는 그녀의 뜻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담담하게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분노로 들어차 있었지만 그것은 임세연을 향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한테 화가 난 것이었다.
  • 자신이 그녀한테 왜 굳이 변명을 해야만 했던 것이지!
  • 미쳤네 미쳤어!
  • 정민준은 평상시와 다르게 어딘가 이상한 자신의 행동에 적응이 되지 않았고 지어 혐오감마저 들었다.
  • 임세연은 레스토랑에 취직을 하였기 때문에 남은 번역이 필요한 서류들을 일찌감치 마무리를 짓고 싶었다.
  • 저녁 12시가 되었는데 그녀는 아직 서류의 절반 정도 밖에 번역을 끝내지 못했고 졸음이 밀려와 그녀의 눈꺼풀을 무겁게 만들었다.
  • 정신을 차리기 위하여 그녀는 서류를 들고 거실로 나왔고 늦은 시간의 별장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으며 정민준과 유 씨 아주머니도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 그녀는 서류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 부엌에 들어가 따뜻한 물을 마셔 갈증을 해소한 다음 물이 담긴 컵을 제자리에 내려놓은 채로 거실의 카펫 위에 앉아 번역을 계속 하였다.
  • 잠을 자던 정민준은 목이 말라 한밤중에 부엌으로 내려왔고 임세연이 번역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그녀한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고 임세연도 그를 발견했지만 말을 걸지 않았다.
  • 정민준은 집안에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이 아직 습관이 되지 않아 탁상 위에 물이 담긴 컵을 보고 그대로 들고 마시게 되었다.
  • “그건….”
  • 임세연은 그건 자신이 썼던 컵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가 이미 사용을 했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며 말문이 막혔다.
  • 정민준은 그런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듯한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고개를 숙여 자신이 들고 있는 컵에 입술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 분명히 그가 입술을 댄 부분이 누군가가 사용을 했던 흔적이 보였고 방금 전 임세연의 반응을 더불어서 보면 그 흔적의 범인이 그녀란 것이 틀림없었다.
  • 임세연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고개를 숙였지만 얼굴이 화끈거렸다.
  • 그들의 사이는 컵 하나를 공유할 만큼 친하지 않았고 정확히 말하자면 낯설었다.
  • 비록 그가 본의 아니게 노리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임세연은 여전히 그를 쳐다보기 민망했다.
  • 정민준은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쓸었고 자신도 무슨 생각인지 몰라 아예 입을 컵에 대고 남은 물을 원샷해 버렸다.
  • 그는 빈 컵을 내려놓고 다가와 시계를 보니 어느새 새벽 한시였다.
  • “아직 안 자?”
  • 임세연은 머리도 들지 못하고 그대로 숙인 채 그의 말에 대꾸했다.
  • “저는 아직 안 졸려요.”
  • 정민준은 그녀를 쳐다보다가 말없이 계단으로 올라갔다.
  • 그는 걸어가 계단 어구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회사에 면접을 보러 왔었다던 말이 불현듯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그녀가 통역에 합격을 하지 못한 게 꽤나 이상하여 그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핸드폰을 들어 강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 기분 좋게 자고 있던 강진은 시끄럽게 울려대는 전화 벨소리에 비몽사몽한 채로 침대맡에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을 삼키며 발신인 이름을 본 순간 그는 치켜들었던 꼬리를 내리고 눈을 비비며 전화를 받았다.
  • “정 대표님.”
  • “네가 내일 인사부에 가서 통역사 채용을 거부한 원인을 알아봐.”
  • “네?”
  • 강진이 미처 영문을 파악하기도 전에 정민준은 자신의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 그는 전화가 끊긴 휴대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고작 이런 일로 한밤중에 전화를 건 정민준을 생각하니 그의 얼굴은 한껏 일그러졌다.
  • 하지만 그는 속으로 밖에 투덜대지 못했고 직접 정민준한테 대들지는 못하였다.
  • 이튿날 아침, 해가 떠오르고 유 씨 아주머니가 잠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가보니 임세연은 여전히 탁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고 옆에 놓인 종이 더미의 내용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업무상의 일이라는 것은 쉽게 보아낼 수 있었다. 아주머니는 한숨을 깊이 내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아무리 일이 중요하다고 해도 이렇게 잠도 안 자고 악착같이 할 필요는 없지.”
  •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아주머니는 방으로 들어가 담요를 가지고 나와서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
  • 이때 정민준은 위층에서 내려오면서 그 상황을 목격했고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 그는 그녀한테 다가가 몸을 숙여 어젯밤 내내 손수 번역한 22페이지의 서류를 보았다.
  • 이 정도 양을 다하려면 분명 밤을 꼴딱 새였을 것인데 그녀가 밤새 잠을 못 잤다는 말인가?
  • 정민준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한 번 더 쳐다보았다.
  • 유 씨 아주머니도 한숨을 내쉬면서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하며 부엌으로 들어가 아침 준비를 하였다.
  • 임세연이 깨어났을 때 정민준은 이미 아침을 먹고 있었고 그녀는 두 눈을 비비며 일어나려 했으나 다리의 감각이 마비가 온 듯 저려 왔다.
  • 그녀는 할 수없이 한참을 쉬고 나서야 겨우 걸을 수 있었다.
  •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세안을 하는 김에 샤워까지 하여 스스로 정신이 번쩍 들게 하였다.
  • 임세연은 옷을 갈아입고 나와 번역을 마친 서류를 정민준 앞에 놓으며 다 되었다고 말했다.
  • 그리고 그녀는 자리에 앉아 밥을 한 술 뜨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괜찮으시다면 돈을 저한테 보내주세요.”
  • 임세연은 그가 혹시라도 잊어버릴까 봐 두려웠고 정민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 “현금을 들고 다니는 습관이 없어서 늦게 회사로 나를 찾아와.”
  • 말을 마친 그는 몸을 일으켰고 임세연도 우유를 한 모금 마시며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임세연이 이렇게 필사적으로 서류를 번역한 이유는 오늘 일에 지장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정민준이 집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임세연도 집을 나섰다.
  • 그녀가 출근하게 될 레스토랑은 유니폼이 있었다. 임세연은 흰색 셔츠에 검은색 조끼, 네크라인 리본과 하체 랩스커트인 유니폼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녀한테 길이가 짧은 치마는 미처 그녀의 가늘고 길게 뻗은 다리를 감추지 못하였다.
  • 창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백주영은 기분이 한껏 상기되어 보였는데 그 이유는 오늘 정민준이 먼저 밥을 먹자고 그녀를 찾았기 때문이다.
  • 비록 정민준이 둘의 관계를 인정하고 그녀와 결혼을 하기로 했다지만 여태껏 그가 먼저 만나자고 한 적은 거의 없었다.
  • “준아….”
  • “내가 듣기론 임세연이 회사통역을 지원했는데 네가 채용을 못 하게 했다면서?”
  • 그는 아침 일찍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강진한테서 백주영이 면접 중간에 훼방을 놓았다는 것을 전해들었다.
  • 백주영은 불현듯 두 손을 꽉 쥐였는데 그가 어떻게 이 일을 알게 되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 정민준은 의자에 등을 바짝 붙여 앉았고 창밖의 화창한 햇볕은 그를 비추었으며 나른해진 그는 턱을 괴고 그윽한 눈빛으로 백주영의 행동을 연구했다. 백주영은 어릴 때 자신을 구해주고 또한 자신의 방패막이 되어준 착한 여자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