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불빛을 등지고 정민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임세연한테 다가갔다. 그의 발걸음은 한결같고 느렸으며 그는 임세연의 앞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며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
“나하고 부부 사이인데 함부로 다른 남자와 애정행각을 하지 마.”
결혼을 한 이유가 무엇이든지 그 기간 동안에는 결코 그를 두고 양다리를 걸치면 안 되었다. 이것은 그의 마지노선이자 또한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될 남자의 존엄이었다.
그녀는 상황 판단이 미처 되지 못한 채 가만히 서있었다. 그의 말은 도대체 임세연이 누구와 키스를 하였단 말인가?
그녀는 본능적 정민준의 말에 반박을 하면서 말했다.
“저도 그럼 당신이 이곳에서 다른 여자와 밤을 보낸 것을 아내로서 캐물어봐도 괜찮을까요?”
“이곳에서 다른 여자와 같이 잔 적 없어.”
정민준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그녀의 말을 부정하였다.
임세연은 지난 밤 백주영이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은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잠을 안 잤다고 누가 믿지?
그녀랑 잠을 잤든 자지 않았든 무슨 상관이 있을까?
정민준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고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임세연은 그와 모순을 만들어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에 말투를 최대한 온화하게 고치고 말했다.
“최대한 당신의 요구대로 할게요. 그럼 저는….”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흔들며 말했고 정민준은 그녀의 뜻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뜻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담담하게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분노로 들어차 있었지만 그것은 임세연을 향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한테 화가 난 것이었다.
자신이 그녀한테 왜 굳이 변명을 해야만 했던 것이지!
미쳤네 미쳤어!
정민준은 평상시와 다르게 어딘가 이상한 자신의 행동에 적응이 되지 않았고 지어 혐오감마저 들었다.
임세연은 레스토랑에 취직을 하였기 때문에 남은 번역이 필요한 서류들을 일찌감치 마무리를 짓고 싶었다.
저녁 12시가 되었는데 그녀는 아직 서류의 절반 정도 밖에 번역을 끝내지 못했고 졸음이 밀려와 그녀의 눈꺼풀을 무겁게 만들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하여 그녀는 서류를 들고 거실로 나왔고 늦은 시간의 별장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으며 정민준과 유 씨 아주머니도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그녀는 서류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 부엌에 들어가 따뜻한 물을 마셔 갈증을 해소한 다음 물이 담긴 컵을 제자리에 내려놓은 채로 거실의 카펫 위에 앉아 번역을 계속 하였다.
잠을 자던 정민준은 목이 말라 한밤중에 부엌으로 내려왔고 임세연이 번역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그녀한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고 임세연도 그를 발견했지만 말을 걸지 않았다.
정민준은 집안에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이 아직 습관이 되지 않아 탁상 위에 물이 담긴 컵을 보고 그대로 들고 마시게 되었다.
“그건….”
임세연은 그건 자신이 썼던 컵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가 이미 사용을 했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며 말문이 막혔다.
정민준은 그런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듯한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고개를 숙여 자신이 들고 있는 컵에 입술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분명히 그가 입술을 댄 부분이 누군가가 사용을 했던 흔적이 보였고 방금 전 임세연의 반응을 더불어서 보면 그 흔적의 범인이 그녀란 것이 틀림없었다.
임세연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고개를 숙였지만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들의 사이는 컵 하나를 공유할 만큼 친하지 않았고 정확히 말하자면 낯설었다.
비록 그가 본의 아니게 노리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임세연은 여전히 그를 쳐다보기 민망했다.
정민준은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쓸었고 자신도 무슨 생각인지 몰라 아예 입을 컵에 대고 남은 물을 원샷해 버렸다.
그는 빈 컵을 내려놓고 다가와 시계를 보니 어느새 새벽 한시였다.
“아직 안 자?”
임세연은 머리도 들지 못하고 그대로 숙인 채 그의 말에 대꾸했다.
“저는 아직 안 졸려요.”
정민준은 그녀를 쳐다보다가 말없이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는 걸어가 계단 어구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회사에 면접을 보러 왔었다던 말이 불현듯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그녀가 통역에 합격을 하지 못한 게 꽤나 이상하여 그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핸드폰을 들어 강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분 좋게 자고 있던 강진은 시끄럽게 울려대는 전화 벨소리에 비몽사몽한 채로 침대맡에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을 삼키며 발신인 이름을 본 순간 그는 치켜들었던 꼬리를 내리고 눈을 비비며 전화를 받았다.
“정 대표님.”
“네가 내일 인사부에 가서 통역사 채용을 거부한 원인을 알아봐.”
“네?”
강진이 미처 영문을 파악하기도 전에 정민준은 자신의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는 전화가 끊긴 휴대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고작 이런 일로 한밤중에 전화를 건 정민준을 생각하니 그의 얼굴은 한껏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 밖에 투덜대지 못했고 직접 정민준한테 대들지는 못하였다.
이튿날 아침, 해가 떠오르고 유 씨 아주머니가 잠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가보니 임세연은 여전히 탁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고 옆에 놓인 종이 더미의 내용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업무상의 일이라는 것은 쉽게 보아낼 수 있었다. 아주머니는 한숨을 깊이 내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일이 중요하다고 해도 이렇게 잠도 안 자고 악착같이 할 필요는 없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아주머니는 방으로 들어가 담요를 가지고 나와서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
이때 정민준은 위층에서 내려오면서 그 상황을 목격했고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그는 그녀한테 다가가 몸을 숙여 어젯밤 내내 손수 번역한 22페이지의 서류를 보았다.
이 정도 양을 다하려면 분명 밤을 꼴딱 새였을 것인데 그녀가 밤새 잠을 못 잤다는 말인가?
정민준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한 번 더 쳐다보았다.
유 씨 아주머니도 한숨을 내쉬면서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하며 부엌으로 들어가 아침 준비를 하였다.
임세연이 깨어났을 때 정민준은 이미 아침을 먹고 있었고 그녀는 두 눈을 비비며 일어나려 했으나 다리의 감각이 마비가 온 듯 저려 왔다.
그녀는 할 수없이 한참을 쉬고 나서야 겨우 걸을 수 있었다.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세안을 하는 김에 샤워까지 하여 스스로 정신이 번쩍 들게 하였다.
임세연은 옷을 갈아입고 나와 번역을 마친 서류를 정민준 앞에 놓으며 다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리에 앉아 밥을 한 술 뜨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돈을 저한테 보내주세요.”
임세연은 그가 혹시라도 잊어버릴까 봐 두려웠고 정민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현금을 들고 다니는 습관이 없어서 늦게 회사로 나를 찾아와.”
말을 마친 그는 몸을 일으켰고 임세연도 우유를 한 모금 마시며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임세연이 이렇게 필사적으로 서류를 번역한 이유는 오늘 일에 지장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민준이 집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임세연도 집을 나섰다.
그녀가 출근하게 될 레스토랑은 유니폼이 있었다. 임세연은 흰색 셔츠에 검은색 조끼, 네크라인 리본과 하체 랩스커트인 유니폼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녀한테 길이가 짧은 치마는 미처 그녀의 가늘고 길게 뻗은 다리를 감추지 못하였다.
창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백주영은 기분이 한껏 상기되어 보였는데 그 이유는 오늘 정민준이 먼저 밥을 먹자고 그녀를 찾았기 때문이다.
비록 정민준이 둘의 관계를 인정하고 그녀와 결혼을 하기로 했다지만 여태껏 그가 먼저 만나자고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준아….”
“내가 듣기론 임세연이 회사통역을 지원했는데 네가 채용을 못 하게 했다면서?”
그는 아침 일찍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강진한테서 백주영이 면접 중간에 훼방을 놓았다는 것을 전해들었다.
백주영은 불현듯 두 손을 꽉 쥐였는데 그가 어떻게 이 일을 알게 되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정민준은 의자에 등을 바짝 붙여 앉았고 창밖의 화창한 햇볕은 그를 비추었으며 나른해진 그는 턱을 괴고 그윽한 눈빛으로 백주영의 행동을 연구했다. 백주영은 어릴 때 자신을 구해주고 또한 자신의 방패막이 되어준 착한 여자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