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통역에 지원하다

• “그럼 당신은 제가 어떻게 대답하길 바라는데요?”
• 임세연은 백주영의 말에 어떻게 말을 이어야 될지 몰라 그에게 물었다.
• 그들의 사이를 갈라놓은 그녀가 사과를 해야 하는 입장인 것 같았다.
• 하지만 그건 너무 작위적인 사과일 것이다.
• 심지어 이 혼사는 두 엄마가 결정한 일이었기에 그녀가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 정민준은 그녀를 뚫어지라 바라보며 섬찟한 분위기를 풍기며 천천히 걸어왔다. 임세연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한발짝 물러나며 말했다.
• “저 때문에 화난 거 아니죠?”
• 백주영은 그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 “준아, 화내지 마. 내가 못나서 그래, 그런 말을 하면 안 됐는데. 세연 씨가 방으로 들어왔을 때 내가 들어오면 안 됐어. 일찍 쉬어, 먼저 가볼게.”
• “나가야 될 사람은 당신이 아니야.”
• 정민준은 임세연의 손목을 잡고 올라갔다.
• 백주영은 내심 기뻐했다. 비록 정민준이 임세연과 만난다고 말했지만 정민준이 그녀에게 다른 마음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 오늘 정민준의 행동은 그녀에게 기쁨을 안겨주었다.
• 필경 그날 밤의 여자도 그녀가 아니었고 실질적인 관계가 발생해야만 이 남자의 마음을 가져갈수 있었다.
• 임세연은 더는 올려다보지 않았고 묵묵히 방으로 들어갔다.
• 백주영이 뒤를 돌자 임세연의 여위고 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이때 그녀는 그날 밤 그 여자의 뒷모습과 굉장히 흡사하다는 걸 느꼈다.
• 그날 밤, 그녀는 질투심을 극복하며 정민준에게 처녀를 보냈다. 이건 이미 그녀의 최선이었다. 그녀는 정민준과 하룻밤을 보낸 그 여자를 보고 싶지 않았다.
• 그 여자가 떠날 때 그녀의 야윈 뒷모습밖에 보지 못했다.
• 어쩐지 임세연을 만났을 때 왠지 모를 익숙함이 들었다.
• 역시 이 익숙함은 그냥 든 게 아녔다.
• 그날 밤의 여자가 임세연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백주영은 심란해졌다.
• 그녀는 임세연을 정민준의 곁에 오래 두면 안 되겠다고 느꼈다.
• 계속 곁에 있다 보면 정민준이 알아볼 수도 있었다.
• 필경 정민준과 가장 가까운 접촉이 있었던 여자였기 때문이다.
• 방으로 들어가자 백주영은 바로 정민준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품에 안겨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준아, 한 번만 다시 너의 여자로 될 수 있게 해줘.”
• 말이 끝나고 그녀의 입술이 서서히 다가오자 정민준의 눈빛은 굳어졌다. 정상적인 남자라면 있어야 할 충동심이 그에게는 없었다.
• 그날 밤을 제외하고는 그녀에게 아무 욕망도 없었다.
• 백주영의 입술이 그와 거의 맞닿을 때 정민준은 고개를 돌려 피했다.
•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얼른 자.”
• 정민준은 느슨한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의 마음은 복잡했다.
• 무엇 때문에 복잡한지 그도 알 수 없었다. 그녀에 대해 남자라면 있어야 할 충동심이 없는 자신이 정상적이지 않다고 느껴졌다.
• 백주영은 두 손을 꽉 쥐였고 얼굴에는 속상함이 나타났다.
• “준아, 날 좋아하지 않는 거지….”
• “제멋대로 생각하지 마.”
• 정민준은 목소리를 깔고 그녀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 “오늘 밤은 여기서 쉬어.”
• 백주영은 여자이기에 알 수 있다. 한 남자가 그녀에게 아무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지.
• 그녀는 침대에 누워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고 눈물은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았다.
• 그녀가 속상한 모습을 감추려고 애쓰자 정민준은 흔들렸다. 그날 밤에도 그가 어떤 행동을 해도 그녀는 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 마음이 약해진 그는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 “제멋대로 생각하지 마. 명분만 생기면… 꼭 너와 함께할게.”
• 백주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민준의 곁에 오래 있었던 그녀는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책임감 때문에라도 그녀를 책임질 것이다.
• 정민준은 외투를 벗고 방을 나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손에 쥐었던 외투를 소파에 던지고 소파에 누웠다. 긴 다리는 탁자에 올려놓고 머리는 소파의 등받이에 기댄 정민준은 많이 피곤해 보였다.
• 다음 날 아침.
• 임세연은 씻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정민준은 식탁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고 백주영은 그런 그를 잘 알고 있는 듯 그에게 진한 블랙 커피를 내려주었다.
• 유 씨 아주머니는 아침을 차려놓았고 임세연은 자신의 존재감을 최대한 없애기 위해 소리도 내지 않고 식탁의 구석에서 그들과 거리를 두고 고개를 숙인 채 죽만 먹고 있었다.
• 유 씨 아주머니는 계란프라이를 가져오며 임세연의 축 처진 모습을 보자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야말로 명분이 있는 여자인데 이런 제삼자 앞에서 왜 이토록 비참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 유 씨 아주머니는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 “사모님, 도련님 앞에 앉으셔야죠.”
• 임세연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 정민준은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았다.
• 두 사람 모두 놀라 멍해 있었다. 임세연은 어젯밤 차가운 눈길로 자신을 보던 이 남자만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났다.
• 정민준이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 유 씨 아주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 자신을 키워준 어르신을 그는 존중했다.
• 그래서 유 씨 아주머니의 말에 따를까 생각했다.
• 그와의 결혼으로 그들은 각자 원하는 걸 가져가면 됐다. 임세연은 그의 사생활에 간섭하고 싶지 않아 마지막으로 죽 한입을 먹고 웃으며 말했다.
• “전 다 먹었어요. 천천히 드세요.”
• 어젯밤의 일이 있은 후 임세연은 정민준이 백주영을 얼마나 신경 쓰는지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눈치 있게 행동하기로 했다.
• 말을 마친 후 그녀는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듯이 빠르게 걸어 나갔다.
• 정민준은 그녀의 다급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백주영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내가 있어서 세연 씨가 적응하지 못하나 봐. 앞으론….”
• 정민준은 우유 한 잔을 그녀의 앞에 놓으며 말했다.
• “한 달 후면 저 여자는 여기를 떠날 거야.”
• 백주영은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그녀에게 한 달이라는 시간은 너무 긴 시간이었다.
• 임세연은 방으로 돌아와 휴대폰을 열자 알바천국에 올린 글에 대답이 온 걸 봤다.
• 정민준과 백주영이 떠난 후 임세연도 별장을 나가 택시를 타고 면접을 보러 갔다.
• 만월 그룹, 끝이 보이지 않는 건물은 웅장하기 그지없었다.
• 임세연은 빌딩 앞에서 심호흡을 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대학 졸업을 하지 않은 그녀가 일자리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었기에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 면접실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있었다. 그들은 모두 정장을 입고 손에는 이력서를 들고 이번 면접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마친 것 같았다. 그에 비해 임세연은 흰 티에 청바지를 입고 있어 이런 곳에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 면접을 보러 온 사람 같지 않았다.
• 그녀는 자신을 향한 시선을 모른척하며 한쪽에서 조용히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 한 시간 정도가 지나고 임세연의 차례가 왔다.
• 설거지, 신문배달 같은 일을 경력이라고 할 수도 없었고 학력도 없었기에 그녀는 이력서를 준비하지 않았다.
• 면접관은 그녀의 백지 같은 경력에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 “어떻게 A 국어를 배운 거죠?”
• 필경 대중적인 언어는 아니었다.
• 채용공고를 낸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지원자는 없었다.
• 임세연은 지난날들을 생각하며 주먹을 꽉 쥐고 대답했다.
• “거기서 살았었어요, 현지 사람들과 잘 소통하기 위해서 특별히 배웠어요. 언어, 문자….”
• 이 목소리는….
• 백주영은 파일을 들고 면접실을 지나가다 익숙한 목소리를 들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갔다. 면접을 보고 있는 임세연을 보자 그녀는 놀라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