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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서로에게 의지하는 세 사람

  • 정민준은 속고 있었다는 기분이 들어 미간을 찌푸렸다.
  • 거실에서는 일찍 기상하신 유 씨 아주머니가 한창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유 씨 아주머니는 잠옷을 입고 소파에 앉는 임세연을 보며 물었다.
  • “어제는 잘 주무셨어요?”
  • 사실 그녀는 어젯밤 정민준이 백주영과 함께 있어 집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녀가 인기척에 놀라 거실로 나가보았을 때, 정민준이 임세연이 잠을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 오랫동안 도련님을 모셔왔던 유 씨 아주머니는 그가 드디어 자신의 아내를 챙길 줄 알게 된 것이라 여겼는지 무척이나 들뜨고 기뻐 보였다.
  • 그녀의 열정적인 말에 임세연은 어딘가 애매한 기분이 들었다.
  • 임세연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 “잘, 잘 잤어요.”
  • “그럼 어서 옷 갈아입으셔야지요. 저는 아침식사 준비해야 돼서 일 보러 갈게요. 아가씨도 좀 더 쉬시다가 내려와 식사하세요.”
  • 말을 마친 유 씨 아주머니는 다시 주방에 들어가 아침준비를 시작했다.
  • 임세연은 갈아입을 옷들이 다 방안에 있었기에 입고 있는 잠옷을 내려다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지금 이 시간쯤이면 안에 있는 그 인간도 옷 갈아입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그녀는 안방 문 앞에 다가가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 아무런 대꾸나 기척이 없어 다시 한번 노크했지만 역시나 방안은 잠잠했다.
  •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문 손잡이를 살짝 당겨보았다. 방문은 쉽게 열렸다.
  • 문을 연 순간 훅 불어온 냉랭한 기운은 12월의 얼어붙은 공기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정민준은 침대에 걸터앉아 손에 든 종이를 싸늘한 눈빛으로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 임세연은 그 종이가 무엇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 어지럽혀진 방바닥을 보니 자신의 프라이버시가 남한테 까발려졌다는 수치감에 뛰어들어가 그 종이를 정민준의 손에서 낚아챘다.
  • 그녀는 잔뜩 화가 난 말투로 물었다.
  • “당신이 뭔데 내 허락도 없이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는 거죠? 프라이버시 모르세요?”
  • “프라이버시?”
  • 정민준의 헛웃음이 가득 찬 말투는 더욱더 사람을 무섭게 만들었다.
  • “누구 핏줄인지도 모를 애를 뱃속에 배고 있는 채로 날 속여 결혼했으면서, 그런 네가 지금 나한테 감히 프라이버시를 논하는 거야?”
  • “그, 그건….”
  • 임세연은 뭐라고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합당한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정민준은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 그의 발걸음 소리는 온 방안에 울려 퍼지는 듯했고 한 발자국 내디딜때마다 더해지는 중압감은 그녀를 떨게 만들었다.
  • 그는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물었다.
  • “말해, 도대체 뭔 목적인지.”
  • 그 애를 자신의 자식으로 둔갑해 장 씨 집안의 첫 장손이라도 만들어볼 계획이었을 까? 그렇다면 전에 했던 모든 것이 그녀의 계획이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 생각을 하면 할 수록 정민준의 안색은 점점 더 어두워져갔다.
  • 임세연은 입을 꾹 다문 채 몸을 부들부들 떨며 뒷걸음질 쳤다. 정민준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임세연은 두 손으로 배를 꼭 끌어안았다.
  • “일, 일부러 속이려 했던건 아니에요. 어차피 이 결혼도 계약 결혼에 불과하니까 말하지 않은 거죠. 애초에 그 어떤 목적이나 계획 같은건 없었다고요.”
  • “그래?”
  • 정민준은 조금은 가소롭다는 말투로 답했다.
  • 그 말속에서 위협감을 느낀 임세연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지만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 “네. 이런 일을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정민준 씨 말대로 내가 다른 뜻을 품고 있었다면 난 죽어도 싸죠. 제가 만약 그런 짓을 꾸미고 있다면 당신이 가만히 있을 리도 없잖아요.”
  • 그녀의 모든 행동은 아주 작고 조심스러웠지만 정민준은 눈치챌 수 있었고 그는 시선을 그녀의 배 쪽에 둔 채 물었다.
  • “왜 그전에 말하지 않은 거지?”
  • 정민준은 결코 쉽게 믿어주지 않았다.
  • 그녀는 두 손으로 배를 꼭 감싸 쥐었다. 뱃속의 아이가 갑작스럽게 찾아온 건 사실이지만 그녀와 아이는 피로 이어진 혈육이었다. 게다가 동생을 잃은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그녀는 아이를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 전처럼 엄마랑 셋이서 의지하며 살아가면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었다.
  • 저도 모르게 그날 밤을 떠올린 임세연은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 “저, 저도 금방 알게 된 거니까요.”
  • 선뜻 장자영한테 말할 용기 없었던 그녀는 혹시라도 장자영이 알게 될까 봐 병원에서 받은 진단서도 맘 놓고 집안에 놓을 수 없었다.
  • 그런데 이렇게 들켜버려 정민준의 의심을 받게 되다니!
  • 정민준의 머릿속은 더욱더 복잡해졌다.
  • 18살 밖에 되지 않은 그녀의 사생활이 도대체 얼마나 문란하면….
  • 정민준은 어두운 표정으로 경고했다.
  • “한 달 동안 얌전히 있어. 만약 네가 또 무슨 짓을 벌이는 걸 내가 알게 되었다면 그땐….”
  • “아니요, 절대 안 그래요, 경우에 어긋나는 일도 안 하고 그냥 얌전하게 가만히 있을게요.”
  • 임세연은 황급히 보증했다. 설령 그의 신임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가 자신의 동기를 의심하게 해서는 안 된다. 가뜩이나 곤경에 처해있는데 적이 더 많아지면 그녀한테 더욱 불리해진다. 정민준은 그녀의 말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듯한 눈빛을 던지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 쿵쿵… 그때 유 씨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 “아침밥 다 됐어요.”
  • 정민준은 시선을 거두며 호되게 말했다.
  • “바닥 깨끗이 치워!”
  • 말을 마치고 홱 돌아서 나갔다.
  • 정민준이 떠나자, 임세연은 두 다리에 맥이 풀리면서, 뒤에 있는 책상에 기대어 있었다. 한참을 쉬고서야 다시 원기를 회복한 그녀는 쪼그려 앉아 바닥에 널려 있는 옷을 하나씩 주워 담았다. 다시 손에 잡은 초음파 사진을 보니 눈물이 주르르 흘러떨어져 종이에 번졌다. 그녀는 얼굴을 한 번 닦았다.
  • ‘울면 안 돼, 울지 마, 나약해지면 안 돼.’
  • 그녀는 약해지면 안 된다. 엄마도 뱃속의 아이도 모두 그녀가 필요했다. 종이를 접어 가방에 넣고 옷을 갈아입고 나갔다.
  • 식탁 위에 빈 커피잔과 빈 식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마도 그가 먹고 간 것 같았다. 임세연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였다. 그 남자와 지내는 것이 너무 답답했다. 그녀는 식탁 앞으로 걸어가서 밥을 먹었다.
  • 아침밥을 먹고 바로 집을 나섰다. 엄마한테 가기로 했었다. 그녀는 장자영이 걱정할까 봐 겁이 났다.
  • 문에 들어서자마자 장자영이 끌고 가서 물었다.
  • “정 씨 가문 도련님이….”
  • “엄마.”
  • 임세연은 힘을 주며 말했다. 그는 이 일을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 “좋은 사람이니깐 나 때문에 걱정하지 마.”
  • 장자영은 한숨을 쉬었다. 딸이 커가면서 자기 주견이 있고, 또 말을 잘 듣지 않아, 저도 모르게 기분이 상했다.
  • “나는 그냥 네가 걱정돼서.”
  • 정민준이 그녀에게 잘해주지 않을까 봐서였다. 임세연은 그녀를 끌어안았다.
  • 그녀는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정민준과 대치하며 설득하는 과정에 정신력이 소진되어 심한 피곤함을 느꼈다.
  • “엄마, 나 좀 피곤해서 그래.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 “알아, 엄마는 널 탓하지 않아.”
  • 장자영은 그녀가 피곤해함을 느낀 듯 말했다.
  • “힘들면 좀 쉬어.”
  • 임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졸리지 않았지만 피곤함을 느끼고 방으로 돌아와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 점심때 장자영이 밥을 다 지어놓고 그녀를 깨웠다.
  • 식탁에 앉자 장자영은 딸에게 밥을 퍼주며 말했다.
  • “네가 좋아하는 생선을 만들었어.”
  • 장자영은 내심 딸에게 미안해했다. 비록 그녀를 낳았지만 아름다운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하고 그녀로 하여금 자신을 따라 고생만 하게 하였다.
  • 임세연은 식탁 위의 엄마가 만든 생선찜을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옅은 새콤달콤한 향을 좋아했는데, 지금은 이 냄새를 맡으니, 속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참지 못했다.
  • “웁….”
  • “세연아.”
  • 임세연은 해석할 겨를도 없이 입을 가린 채 화장실로 뛰어들어 헛구역질을 했다.
  • 장자영은 걱정돼서 따라왔다. 그녀는 그 경험을 겪어본 사람이라 딸의 반응을 보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딸은 아주 보수적이고 성실하며 학교에서도 남자친구를 사귄 적도 없었다. 장자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세연아, 어찌 된 일이야?”
  • 임세연의 몸이 갑자기 굳어 버리면서 양손으로 세면대 가장자리를 꽉 잡았다. 그녀는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였다. 그렇게 되면 장자영도 조만간 바로 알게 될 것이다. 그녀는 몸을 돌려 어머니를 바라보며 용기를 냈다.
  • “엄마, 나 임신했어.”
  • 장자영은 너무 놀라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이제 겨우 열여덟 살밖에 안 되었다, 그랬기에 더더욱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