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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오늘부터 오빠라고 불러

  • 임세연이 어떤 여자인지 정민준이 제일 잘 안다.
  • 민준이는 어젯밤 쏟은 커피 때문에 젖은 서류를 회사에 가져가 복사본을 얻으려고 서재로 들어갔다.
  •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민준이는 눈치챘다. 누가 그의 책상을 건드렸다는 것을!
  • 이곳은 유 씨 아주머니, 강진, 백주연 빼고는 아무도 들어온 적이 없는데.
  • 누굴까?
  • ‘그 여자가 몰래 나의 서재에 들어온 걸까?’
  • 그가 책상으로 걸어갔을 때쯤 위에 번역 서류 하나가 보였다. 서류를 보니 정연하게 쓰인 손글씨가 눈에 띈다.
  • ‘이게 그 여자가 쓴 거라고?’
  • 민준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 ‘그 여자가 A 국어도 할 줄 안다고?’
  • 민준이는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 서류 확인 후 그 여자를 찾아 자초지종을 따지려던 찰나 서류에서 포스트잇이 떨어졌다.
  • ‘그쪽 허락 없이 맘대로 서재에 들어가서 죄송해요. 어젯밤 그쪽 서류가 젖은 일은 제 탓이에요. 그래서 어떻게든 제힘으로 서류를 복구하려고 우리말로 번역해 놨어요. A 국어가 어려워도 한번 번역해봤어요. 제가 그쪽 서류 망가뜨린 보상이라고 해두죠. 보시기 편했으면 좋겠네요. -임세연’
  • 민준이는 포스트잇을 꼭 쥐고 10장 정도의 손글씨 번역 서류를 보다 보니 서재를 채운 그의 화도 어느 정도 가라앉는 것 같았다.
  • 예쁜 글씨체를 보다가 민준이는 문득 그녀에게 호기심이 들었다.
  • 그녀가 A 국어도 할 줄 알다니! 할 줄 아는 사람이 아주 적은데 말이야.
  • 정민준은 포스트잇을 내려놓은 뒤 서류를 들고 회사로 갔다.
  • 임세연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점심이었다. 유 씨 아주머니가 식사를 다 준비했을 때 그녀는 늦잠 자서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여긴 분위기가 항상 이래요. 도련님은 항상 제시간에 기상하시거든요. 오히려 세연 씨가 들어오고 사람 사는 집 같은데요.”
  • 유 씨 아주머니가 웃었다.
  • “그 백비서 있잖아요. 그분 예전에 자주 오지 않았나요?”
  • 세연이 웃으면서 말했다.
  • 유 씨 아주머니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더니 혹시 질투하냐는 눈길로 바라봤다.
  • 임세연은 별다른 뜻 없이 그냥 물어본 건데 물어보고 바로 후회했다.
  • “자주 오는 건 아니에요. 도련님이 예전에도 그녀를 차갑게 대하다 보니….”
  • 유 씨 아주머니도 이상했다. 어떻게 출장 한번 다녀온 뒤 그녀에 대해 마음이 식을 수 있는지.
  • 그토록 오래 마음이 없다가 어떻게 다시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는지도.
  • 유 씨 아주머니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답을 찾을 수 없었다.
  • 임세연은 여자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운 만큼 남자의 마음도 알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 특히 정민준 같은 남자는 더 그럴 것이다.
  • 임세연은 회사에서 잘렸다고 백수 노릇하고 있을 사람이 아니다. 엄마의 물건도 당분간은 돌려받을 수 없고 그녀는 안정된 일자리가 필요했다.
  • 통장 잔고도 바닥이 보이고 여기에 있는다고 돈이 나가지는 않지만 엄마 쪽에서는 돈이 필요했다.
  • 밥을 먹고 그녀는 외출했다.
  • 학력도 낮고 근무 경험도 별로 없는 그녀에게 일자리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 여러 군데 알아봐야 체력 노동 같은 단순한 직종밖에 없었다.
  • ‘xxx 고급 레스토랑 웨이터 모집.’
  • 이건 학력도 필요 없고 민첩하게 대처하고 빠르게 반응하면 된다. 돈을 벌기 위해 그녀는 바로 취직하러 레스토랑 매니저를 찾아갔다.
  • 학사증은 없지만 대학은 다녔던 그녀는 말하는 거나 행동하는 거나 흠잡을 데 없었다.
  • 레스토랑 매니저는 바로 내일부터 나오라고 했다.
  • 이젠 일자리도 찾았겠다. 임세연은 기분이 한껏 좋아져 레스토랑에서 나온 뒤 홀로 산책하러 갔다. 저녁해가 지면서 지평선이 노을로 빨갛게 물들었다. 빨간빛이 거리를 비추고 임세연의 그림자도 길어졌다.
  • 혼자 있으니까 그녀는 어쩐지 좀 외로워졌다.
  • “세연아.”
  • 소리가 난 쪽을 보니 하주혁이 길 건너편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 “난 내가 잘못 본 줄 알았어.”
  • 하주혁이 웃었다.
  • “하 선생님.”
  • 그를 다시 보니 임세연은 조금 놀랐다.
  • “어떻게 된 일이에요? 어떻게 아직 국내에 있는 거죠?”
  • “그냥 여기서 일하려고.”
  • 그는 임세연은 보고 말했다.
  • 임세연은 그날 병원에서 병원장이 직접 그를 스카우트하는 모습을 봤기에 충분히 이해가 됐다.
  • “병원은 어때요? 대우는 괜찮죠? 마음에 들어요?”
  • 임세연은 부러운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 아픈 엄마를 간호하느라 졸업장도 못 따고 지금은 취직도 어렵고.
  • “응, 괜찮아.”
  • 하주혁은 따뜻하게 웃었다.
  • 사실 임세연만 아니었으면 대우가 아무리 좋아도 국내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 국내엔 그가 떠올리기 싫은 사람과 일이 너무 많다.
  • 임세연은 머리를 들어 하늘을 봤다. 날도 어두워졌고 돌아온 지 이젠 두 달이 다 되어간다.
  • 지금 그녀는 조금 막막하다.
  • 그들에게 속했던 것을 되찾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 “힘든 일 있으면 내게 말해.”
  • 하주혁은 그녀의 막막한 심경을 알고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 예전에도 하주혁의 도움을 받은 적이 너무 많다. 그래서 세연이는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 그녀와 알고 지낸 세월도 짧지 않다. 이젠 세연이의 마음도 조금 알 것 같다. 혼자 힘들어도 남에게 신세 지려고 하지 않는 것!
  • “넌 너무 고집이 세 .”
  • 주혁이의 마음이 아플 만큼.
  • 임세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세 지기 싫어서 안 지는 것이 아니라 신세를 갚지 못할까 봐 그러는 것이다.
  • 그녀는 가난하고 힘도 없으니까.
  • “날이 벌써 어두워졌네요. 하 선생님은 언제 귀가하세요?”
  • 임세연이 물었다.
  • 임세연은 늘 하주혁을 하 선생님이라고 불러왔다.
  • “연아.”
  • 하주혁은 임세연은 바라봤다.
  • “이젠 하 선생이라고 부르지 말아 줄래?”
  • 하주혁은 더 그윽하게 바라봤다.
  • “이름 불러, 아님 오빠라고 부르던지. 우리 서로 알고 지낸지도 오랜데, 네가 자꾸 하 선생님 이러면 좀 낯설어 보이잖아, 안 그래?”
  • “그럼 오빠라고 부를까요?”
  • 하주혁이 나이도 많고 평소에도 그녀를 오빠처럼 잘 챙겨줬으니까.
  • “그래.”
  • 하주혁은 이때다 싶어 팔을 벌려 그녀를 꼭 안아주며 웃었다.
  • “오늘부터 오빠라고 부르기!”
  • “준아, 저거 임세연 씨 아니야?”
  • 운전 중인 정민준은 지나가는 행인을 보지 못했으나 백주영의 한마디에 그의 눈빛은 이쪽을 향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