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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겉만 보면 안 돼요

  • 그때만해도 만족한 것처럼 보였는데 아마도 더 나은 사람을 찾았나보다.
  • 이렇게 생각하니 임세연은 그나마 받아들일 수 있었다.
  • 저녁이 되었다.
  • 정민준은 돌아온 뒤 서재에서 나오질 않았다, 아마도 일이 바쁜 모양이었다.
  • 오후에 임세연은 유씨 아주머니에게서 정민준이 좋아하는 메뉴를 묻고 손수 저녁을 준비했다.
  • 유씨 아주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 “이거야말로 와이프가 해야 되는 일인 걸요.”
  • 임세연은 미소를 보이며 생각했다.
  • ‘부탁할 일이 없으면 이런짓도 안 했을텐데.’
  • 유씨 아주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사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회장님이 재혼하셔서 도련님이 집으로 잘 안 돌아가요, 저렇게 차가워 보여도 사실 정이 많은 분이에요.”
  • 임세연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듣고 있었다.
  • “그 주영 아가씨는 어릴 때 도련님을 구해주셨어요. 그 뒤로 계속 도련님 뒤만 쫓아다녀요, 전에는 도련님이 싫어했는데 그때 출장 갔다 온 뒤로 태도가 달라졌다니깐요? 근데 너무 신경 쓰지마세요. 아가씨야말로 정식 부인이잖아요.”
  • 유씨 아주머니는 그녀의 어깨를 툭툭치며 심심찮은 위로를 건넸다.
  • 하지만 그가 누구랑 좋아하든 그녀가 뭐라할 입장은 아니었다.
  • 비록 부부지만 서로에게 이렇게 낯설다니.
  • 그녀는 이미 이 결혼에 미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임세연은 서재를 힐끗보더니 아침에 백주영이 끓인 커피가 생각이나서 물었다.
  • “아주머니, 원두 어딨어요? 커피 좀 만들어 주려고요.”
  • 유씨 아주머니는 이 상황을 보더니 그녀가 이제야 맘을 다잡았다생각해 원두를 가져다주며 당부했다.
  • “시럽이랑 우유는 넣지 마세요. 도련님은 단 걸 싫어하세요.”
  • 임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후, 그녀는 커피를 타서 예쁜 유리컵에 담은 뒤 서재로 향했다.
  • 서재 안, 정민준은 전화를 하고 있었고 낯색은 어두웠다.
  • “인사팀에서는 어떻게 일 처리를 하는 거야? 통역 한 명 찾는 게 이렇게 어려워?”
  • 그가 아는 언어는 많았지만 유독 A 국 언어는 국제적으로 유통이 되지 않으니 전혀 몰랐다.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인 만큼 많은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데 언어가 안 통하니 일에 진전이 없었다.
  • “인사팀한테 전해, 하루만 더 줄 테니 만약에 못 찾으면 다 잘릴 준비하라고!”
  • 똑똑….
  • 정민준은 화가 치밀어오를 타이밍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차갑게 말했다.
  • “들어오세요.”
  • 임세연은 조금 겁났다. 이사람 지금 화내는 건가?
  • 하지만 문은 이미 두드렸고 그가 화가 나 있다 해도 들어가야 한다.
  • 임세연은 웃음을 짜내며 말했다.
  • “커피 좀 탔어요.”
  • 정민준은 그녀와 그녀의 손에 쥔 커피를 번갈아 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 ‘아침만해도 도망치더니 지금은 먼저 커피를 타 준다니. 이 여자 진짜 종잡을 수가 없군.’
  • 정민준은 폰을 내려놓고 앉아서 그녀가 도대체 무엇때문에 연기를 하나 지켜보았다.
  •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 임세연은 커피를 책상앞에 놔두었다.
  • 정민준은 가만히 지켜보다가 점점 몸에 힘을 풀며 뒤로 젖혔다.
  • 임세연은 웃으며 말했다.
  • “한 입 드셔보세요.”
  • 정민준은 그녀가 이렇게 변한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알 것만 같았다.
  • 그리하여 조롱 섞인 말을 내뱉었다.
  • “갑자기 태도가 바뀌다니, 천수만 일로 물어볼 게 있나 봐?”
  • 임세연은 조금 놀랬다. 이렇게 빨리 그가 알아챌거라 생각을 못했으니.
  • 정민준은 갑자기 임세연의 턱을 잡더니 말을 꺼냈다.
  • “이게 바로 임 씨 집안이 내가 절름발인 거 알면서 너를 시집보낸 이유인가?”
  • 그는 손에 힘을 꽉 주고 있어 임세연은 통증이 밀려왔다.
  • 그녀는 입을 벙긋거리며 뭐라말하려 했다.
  • 하지만 어떻게 말하나?
  • 자신은 버림 받았다고?
  • 그가 믿을까?
  • “아니에요….”
  • “나가!”
  • 정민준은 그녀를 밀쳤다.
  • 임세연은 휘청거리다 팔이 커피잔을 건드리는 바람에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파일에 커피가 흘러버렸다. 정민준의 표정은 더더욱 차가워졌다.
  • 임세연은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라 얼른 닦으려 했다.
  • 정민준은 파일을 뺏으며 큰 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 “나가란 소리 안 들려?”
  • 그는 그런 아부떠는 얼굴이 싫었다.
  • 임세연은 나갈 수밖에 없었다.
  • “잠깐, 이것들 다 가지고 나가!”
  • 정민준은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났다.
  • 임세연은 커피잔을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 저녁 식사 시간, 정민준은 밥을 먹자마자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 임세연은 묵묵히 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이렇게 성질머리가 고약하다니, 다가가기 참 어렵겠군.’
  • 그러다 보니 천수만 땅을 손에 넣고 임국안한테서 주도권을 빼앗아 오는 것도 더욱 힘든 일이었다.
  • 임세연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안 와서 뒤척이다 일어났다.
  • 그녀는 정민준에게 커피를 주러 갔을 때, 서류 위에 커피를 쏟았던 일이 내심 미안했다.
  • 그리하여 사과하기 위해서 그의 서재로 향했다.
  • 그녀는 전등을 켰다. 그 파일은 여전히 책상 위에 놓여있었다. 그녀는 그 서류 위에 A 국어가 적혀 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 하지만 커피에 젖었던 곳은 이미 글자가 흐릿해진 상태였다.
  • 그녀는 깨끗한 종이를 가져와 서류 위의 글자들을 베껴 쓰기 시작했다. 임세연은 A 국어가 국제 사회에서 보편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정민준한테 사과하는 의미로 그가 보기 편하도록 전부 모국어로 번역해서 써주기로 결심했다.
  • 열 장이 넘는 내용을 번역하고 다시 베껴 쓰려니 어느덧 새벽 세시가 훌쩍 넘었다.
  • 그녀는 펜을 내려놓고 아려오는 손목을 주무르다 파일들을 순서대로 정리하고 책상위에 올려놓고 방으로 들어가 잠에 들었다.
  • 정민준이 아침에 깨어나 밥을 먹을 때 임세연은 어젯밤에 너무 늦은 시간에 잠들고 게다가 임신을 한 뒤로 잠이 많아진 탓에 깨나지 못했다.
  • 정민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 “아직도 안 깼어요?”
  • 유씨 아주머니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 “아니요, 부부신데 왜 그걸 외부인인 저한테 물어보세요?”
  • 정민준은 유씨 아주머니의 뜻을 모를리가 없었다.
  • “됐어요.”
  • 정민준은 워낙 뭔가를 해명하기 싫어했고 그건 어릴 때부터 키워준 유 씨 아주머니한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사항이었다.
  • “도련님, 연이 아가씨와 정이 없다 해도 사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정한 혼사잖아요. 그리고 저는 아가씨가 도련님을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던데요? 어제 점심에 돌아오자마자 도련님이 뭘 좋아하는지 묻더니 저녁밥도 전부 아가씨가 준비했고 심지어 직접 커피까지 내려줬잖아요.”
  • ‘그녀가 갑자기 지극 정성을 들이는 건 임 씨 가문한테 천수만 땅을 얻어줄 수 있기 위해서 아닌가? 그를 신경 쓴다고?’
  • 정민준은 가소롭다고 생각했다.
  • 그는 뒤로 돌아 유 씨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 “그 여자의 겉모습에 속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