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세연은 유 씨 아주머니가 무엇 때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자신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지 짐작해 낼 수 있었다.
그녀와 정민준은 단순한 비즈니스 사이에 불과했기에 그녀는 정민준의 사생활을 물어볼 자격이 없었다.
그녀는 정민준이 자리를 비운 덕에 조금은 자유로워진 듯했다.
임세연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눈에는 그제서야 방안 곳곳의 독특한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다. 블랙 앤 화이트의 조화롭고 모던한 색 조합에 깔끔하고 고풍스러운 방안의 설계는 우아하다는 단어가 절로 떠올랐다.
“여기는 도련님의 방이에요.”
유 씨 아주머니는 생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들은 엄연히 결혼을 한 부부였기에 한 방, 한 침대에 함께 누워 잠에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임세연은 핑계라도 대보아야겠다는 마음에 입을 열고 닫기를 벙긋벙긋 반복했지만 결국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한 듯 고개를 맥없이 끄덕여 볼 뿐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집이 아닌 낯선 곳에서 잠을 청하려니 그녀의 정신은 시간이 지날 수 록 점점 더 뚜렷해져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잠자기를 포기한 채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 알바천국을 뒤적여보았다. 안정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보험 삼아 하고 있어야 그녀의 어머니와 배 속의 아이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임세연은 통역 알바를 구한다는 모집 글을 보았다. 채용자격에 A 국 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구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A 국은 그녀가 임국에 의해 가게 됐었던 열대의 아주 낙후한 나라였다. 넘치는 언어들이 통하는 이 넓은 세상 속에서 빈곤한 지역의 언어를 배우려 하는 사람이 많지 않음은 극명한 사실이었다.
쏠쏠한 수입과 조건을 확인한 임세연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개인 정보를 남겼고 가벼운 마음으로 잠을 청해 보았다.
창문을 타고 들어온 달빛은 방안 가득 채워져 포근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깊은 밤, 은은한 분위기 속에서 임세연은 스르르 깊은 잠에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더 지났을까, 집 마당에는 한 줄기 빛이 새어들어왔고 그 빛의 주인은 다름 아닌 정민준이 몰고 들어온 차였다.
차에서 내린 정민준은 저벅저벅 집으로 걸어들어갔다. 평소보다는 조금 가벼워진 듯한 발걸음 소리에는 술 냄새가 풍기는 듯했다.
갑갑했던 넥타이를 한 손으로 휙 잡아당긴 정민준은 목이 타는 듯한 갈증에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백주영의 생일이라 평소보다 무리해서 마신 탓에 주량이 나름 괜찮은 편인 정민준도 약간의 취기를 보이는 듯했다.
그는 외투를 소파에 벗어던진 채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익숙하게 침대의 위치를 찾아냈고 바로 누워버렸다.
곤히 자고 있던 임세연도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척였지만 방안이 고요해짐과 동시에 곧바로 다시 잠에 들었다.
이른 아침, 햇빛은 방안을 밝게 비추었다.
침대 위에는 한 여인이 남자의 품에 안긴 채 함께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그 둘은 보기 좋은 한 쌍의 커플같았다.
먼저 잠에서 깬 정민준은 숙취로 인해 머리가 무겁고 아파왔다. 우선 찬 꿀물이라도 꺼내 마셔 정신 차려보려던 정민준은 자신의 팔이 무엇인가에 깔려있음을 느꼈다.
머리를 돌려본 그는 그제서야 자신 품속의 여인의 존재를 확인했다.
비단결같이 부드럽고 검은 머리카락들은 그의 팔 위에 곱게 드리워져있었고 하얀 피부에 예쁜 속눈썹, 살짝 벌려진 핑크빛 입술을 한 자고 있던 그 여인은 간지러운 숨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몸을 타고 내려갔다. 길고 가녀린 목, 매끈한 쇄골, 봉긋한 가슴, 옆으로 돌아누운 그녀의 잠옷 넥 라인 사이로 보이는 부드러운 피부는 그녀의 숨결을 따라 정민준을 유혹하고 있는 듯했다.
정민준의 목젖은 제멋대로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는 백주영한테도 가져본 적 없는 충동을 고작 두 번 만난 여자한테 느끼게 된 것이었다.
자신의 통제를 받지 않는 몸이 썩 기분이 좋지 않았던 그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녀한테서 눈이 쉽게 떼지지 않았다.
한편 아무것도 모른 채 꿈을 꾸고 있던 임세연은 꿈 속에서 아프리카 초원 위 한 마리의 사자가 자신을 잡아먹을 기세로 뚫어지게 보고 있음을 보았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 임세연은 눈을 떴고 그런 그녀의 눈앞에 보이는 건 또 다른 한 쌍의 강렬하고 매서운 눈빛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눈을 부릅 뜬 임세연은 가슴을 부여잡은 채 물었다.
“당신이 어떻게 제 침대 위에 있는 거죠?”
정민준은 그녀의 몸에 두었던 시선을 최대한 담담하게 거두고는 이불을 거둬내며 말했다.
“이건 내 침대야.”
임세연은 반박하려 하였지만 불현듯 느껴진 방안의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정신을 차리고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꾸역꾸역 삼켜냈다.
“여자친구 생일이라 나간 거 아니었나요? 왜 다시 돌아온 거죠?”
임세연은 침대에서 내려와 선 채 물었다.
어제 유 씨 아주머니가 정민준이 집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그녀는 경각심을 낮춘 채 평소보다 더 깊게 잠들었고 그 덕에 그녀는 정민준이 방에 들어온 것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이었다.
자신이 정민준과 한 침대에서 잠들었다니. 그녀의 볼은 어젯밤 정민준의 품에 안겨 잔 것을 떠올릴 때마다 붉게 달아올랐다.
정민준은 문득 어젯밤 그대로 입고 잔 술 냄새가 잔뜩 배인 셔츠가 불편했는지 옷을 갈아입으려 단추를 풀어내렸다. 그는 침대 옆에 무심하게 서있는 임세연을 힐끗 쳐다보았다.
“여자친구 생일이 우리의 첫날밤보다 중요하겠어?”
“….”
임세연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건 엄연한 비즈니스 관계였고 진짜 부부도 아닌데 그런 사이에 첫날밤이 어디 있다고?
정민준은 웃옷을 훌렁 벗어버렸다.
임세연은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녀가 보는 앞에서 옷을 그냥 벗어버리다니. 그날 밤 이후로 임세연은 남자라 하면 진절머리를 쳤다. 특히는 남자와의 접촉 같은 거 말이다.
그녀는 당황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말했다.
“저, 저 먼저 나가볼게요.”
말을 맞힌 임세연은 줄행랑치듯 안방에서 달려나갔다. 정민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벨트를 풀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는 샤워라도 해 정신을 말끔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시원한 물소리는 욕실에서 울려 퍼졌다. 그 후로 한 시간쯤 지났을 때 향긋한 보디워시 냄새를 머금은 연기가 흘러나오더니 흰색 샤워가운을 걸친 정민준이 욕실로부터 걸어 나왔다. 물기가 채 가시지 않은 그의 짧고 검은 머리는 헝클어져있었고 가운 사이로 얼핏 드러난 구릿빛 근육질 피부는 남성미를 뽐내고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옷장 앞으로 걸어갔다. 무심하게 옷을 집어 꺼내려 할 때, 그의 눈에는 해바라기가 새겨져있는 낯선 가방이 들어왔다.
그는 순간 멈칫했다. 이건 임세연의 것인 건가? 유치하게 꽃이나 새긴 가방을 들고 다니다니! 게다가 자신의 물건을 겁도 없이 함부로 옷장 속에 넣어두다니!
그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옷을 주워 입었고 실수로 임세연의 가방을 건드려 떨어뜨리고 말았다.
채 잠가두지 않았는지 가방 속의 물건은 와르르 바닥에 쏟아져 버렸다. 그 속에는 각종 생활필수품들과 가벼운 옷들이 들어있었다.
물건들을 주우려 쭈그려앉으려는 찰나 그 물건들 사이에 숨어있는 초음파 사진을 발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