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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고작 점 가지고!

  • 하지만 남자는 차갑고 무뚝뚝한 얼굴로 서 있을 뿐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 답답해진 배성우는 화가 난 녀석을 쳐다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 ‘정말 그 아빠에 그 아들이야.’
  • 그는 재빨리 윤시후에게 설명했다.
  • “준호가 어디 아픈지 아빠가 검사하라고 해서 피 뽑은 거야. 너의 손목에 갑자기 없던 점이 생겨서 걱정돼서 그래.”
  • “점?”
  • 화들짝 놀란 윤시후는 손을 들고 확인했다.
  • “아, 이거요?”
  • 윤시후는 얼굴을 찌푸렸다. 하마터면 말실수할 뻔한 그는 재빨리 말을 바꾸면서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 “전 또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어요. 고작 점 하나 가지고!”
  • 구현승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 배성우는 침착한 얼굴의 윤시후와 옆에 있는 구현승을 번갈아 보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러다가 구현승과 눈이 마주친 순간 냉큼 웃음을 거두어들였다.
  • “꼬마 도련님, 의사 선생님이 피를 뽑아야 더 자세하게 검사할 수 있는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 집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윤시후를 달랬다. 윤시후는 손가락에 맺혀있는 핏방울을 보더니 쓰러질 뻔할 정도로 얼굴이 새파래졌다.
  • ‘피 공포증이 있었나?’
  • 겁먹은 아들의 모습에 구현승은 얼굴을 찌푸렸다. 볼수록 점점 아들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전에는 아무리 아파도 참더니 지금 갑자기 두려워하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 “당장 지혈시켜!”
  • 구현승이 배성우를 힐끗 쳐다보자 배성우는 재빨리 다가가 말했다.
  • “준호야, 조금만 참아, 아저씨 피 조금만 뽑을게.”
  • 배성우는 아이를 달래며 재빨리 피를 뽑고 지혈하였다.
  • “다 됐어.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 윤시후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얼굴만 찌푸렸다. 두려워하면서 화를 내는 모습이 어찌나 가여운지 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마저 다 아팠다.
  • 집사는 그런 윤시후를 끌어안고 면봉을 꾹 눌러주었다. 그 사이 배성우는 물건을 정리했다.
  • “준호야, 아저씨 먼저 갈게. 다음에 아저씨랑 놀자.”
  • 대꾸도 하지 않는 아이의 모습에 배성우는 더는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 재빨리 집을 나섰다. 마음속으로 조금 걱정이 됐던 그는 혈액 검사를 하러 갔다.
  • “꼬마 도련님, 더 잘래요?”
  • 집사는 계속하여 아이를 달랬다. 그러자 윤시후는 작은 입을 삐죽거리며 이런 생각을 했다.
  • ‘아빠가 의심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 갑자기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자 고개를 든 순간 구현승의 차가운 눈빛과 딱 마주쳤다.
  • “많이 아파?”
  • 평소에도 무뚝뚝한 말투라 누군가를 위로할 줄을 몰랐다.
  • 윤시후는 순간 멈칫했다.
  • ‘아빠는 평소에도 이래? 위로할 줄도 모르고 너무 차가워.’
  • “안 아플 리가 있겠어요? 아빠도 한번 찔러볼래요?”
  • 화가 나서 머리를 홱 돌리는 걸 보니 구현승과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 구현승은 그런 아이를 한참 동안 멍하니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 두 부자가 또다시 싸울까 봐 걱정된 집사는 재빨리 그 고요함을 깨뜨렸다.
  • “꼬마 도련님, 배 안 고파요? 맛있는 거 해줄까요?”
  • “...”
  • 윤시후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제야 윤시후도 배가 고프다는 걸 느꼈다.
  • 집사는 아무 말 없이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면봉을 뗐다. 피가 멈춘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아이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 “조금만 더 자요. 맛있는 거 해줄게요!”
  • 침대에 누운 윤시후는 구현승을 보기 어색한지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방 안의 인테리어는 무척이나 럭셔리했고 윤시후가 좋아하는 로봇도 엄청 많았다.
  • ‘와! 구준호네 집에 장난감이 이렇게나 많았어?’
  • 갑자기 머릿속에 구준호가 생각난 윤시후는 심각한 문제를 떠올렸다.
  • ‘내가 구준호의 아빠랑 집에 왔으면 구준호는 어디 간 거야? 설마 없어진 건 아니겠지? 그럴 리는 없을 거야. 나도 집 가는 길 아는데 걔도 알겠지. 형제니까 그리 멍청하진 않을 거야. 그런데 구준호가 만약 집에 오면 내가 가짜라는 게 들키게 되잖아?’
  • 잠깐 사이 윤시후는 구현승이 보는 앞에서 멍한 표정으로 오만가지 생각과 대책을 떠올렸다.
  • 구현승은 가지런히 놓여있는 피규어를 힐끗 쳐다보았다. 얇은 입술을 오므리는 걸 보니 윤시후를 달래려는 것 같았다.
  • “뭘 좋아해? 아빠가 사줄게!”
  • 아이를 달랠 줄 몰랐던 구현승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 그가 예전에 사줬던 피규어들도 아이가 TV를 한참 동안 뚫어지라 쳐다보는 걸 보고 좋아하겠다 싶어서 사준 것이었고 역시나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 구현승의 말에 윤시후의 두 눈이 반짝이었다. 지금 집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구준호의 것이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윤시후는 구현승을 힐끗 쳐다보았다.
  • “정말요? 아무거나 다 돼요?”
  • “그럼!”
  • 구현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내뱉은 말은 꼭 지키는 성격이었다.
  • 윤시후는 미소를 살짝 짓더니 혹시라도 구현승한테 들킬까 봐 이내 다시 거두어들였다.
  • “저거 한 세트 더 갖고 싶어요!”
  • 한 세트 더 있으면 가져가서 다른 형제들과 놀 수 있었다.
  • 구현승의 대답을 듣지 못한 윤시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피규어가 비싸다 보니 다짜고짜 비싼 걸 사달라고 해서 안 된다고 할까 봐 걱정됐다.
  • “진짜 한 세트 더?”
  • 구현승은 살짝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일반 사람들은 똑같은 물건을 하나 더 사진 않으니 말이다.
  • 구현승이 화를 내지 앉자 윤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윤시후의 귀여운 모습에 얼음처럼 차갑던 구현승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 “알았어. 그런데 어떤 건 하나밖에 없고 또 어떤 건 한정판이라 구하려면 시간이 좀 걸려!”
  • 아들이 좋아한다면 구현승은 하나를 더 만들어달라고 부탁할 생각도 있었다.
  • 윤시후는 흥분된 마음을 도저히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 “고마워요, 아저... 캑캑... 아빠!”
  • 날뛰듯이 좋아하는 아이의 모습에 구현승도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다.
  • “손 이리 줘봐!”
  • 침대 머리맡에 앉아있던 구현승은 윤시후더러 손을 내밀라고 하였다.
  • 윤시후는 순간 경계심이 생겼지만 그래도 순순히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 구현승은 윤시후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살피더니 고개를 숙이고 그의 손가락을 후후 불었다.
  • 윤시후는 순간 멈칫했다가 구현승을 바라보는 눈빛이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 ‘아빠가 쌀쌀맞긴 해도 나한테는 꽤 잘해주는데? 그냥 겉으로 보기에 다가가기 어렵고 무서울 뿐이었어.’
  • “조금 더 자, 집사 할아버지가 먹을 거 만들려면 아직 좀 기다려야 해!”
  • 그때 구현승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아들에게 한마디 당부한 후 침실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 윤시후는 문 앞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에야 마음 놓고 구준호 방에 놓여있는 장난감들을 둘러보았다. 이리저리 만지는 걸 보니 다 마음에 들었나 보다.
  • 하지만 윤시후는 구현승이 멀리 가지 않았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문틈 사이로 윤시후의 움직임을 본 구현승은 살짝 의아해했지만 해야 할 일이 있어 더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서재로 향했다.
  • 윤시후는 구준호의 방을 다 구경한 후 방에서 나와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 ‘아빠 집 엄청나게 크고 예뻐. 엄마랑 형이랑 동생이 다 함께 살아도 비좁지 않겠어. 마치 커다란 성 같아.’
  • 이곳이 너무나도 궁금했던 윤시후는 계속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숨겨진 CCTV가 많다는 사실을 문득 발견했다. 윤시후는 잠시 움찔하더니 이내 정색한 얼굴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 ‘아까는 들키지 않았겠지?’
  • 구준호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